미국 UCLA 도서관 속의 '작은 한국'

<미국 여행기6> 우리는 미국의 무엇을 분석해야 하나?

등록 2002.01.16 14:17수정 2002.01.1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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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다. 내가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교수님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내용은 한국의 경제상황이 아닌 미국의 이야기였다. 미국의 경제학자가 정립해 놓은 분석틀을 공부하고, 이 분석방법에 다른 수치를 적용시켜보는 것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미국의 상황이 세계 모든 나라의 보편적인 기준이 될 수 없음에도, 그들은 '자유주의'와 '시장'이라는 이름 아래 세계적 상황을 동일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유학했던 미국의 대학제도에 대해서 칭찬하고 "한국의 대학도 미국과 같은 운영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늘 상 주장한다. 미국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을 위해서? 아니면 미국을 위해서? 내 생각으로는 우리(한국)의 상황과 입장보다는, 미국과 미국인의 입장에서 서술된 책과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 우리 대학의 현주소이다.

대학의 졸업자격요건마저도 졸업논문대신 토익점수로 대체하는 대학들이 늘어나고 있다. 4년간 대학에서 제공하는 교육시스템을 이수했다하더라도 토익점수를 통해 졸업자격 유·무를 판별하겠다는 계산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자신이 공부한 성과를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영어점수의 많고 적음으로 능력을 검증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 대학인 것이다.

한국적인 것, 미국적인 것

토익점수가 국제화와 세계화의 기준이 되어버린 가운데,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하는 미국의 본질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미국에 대한 세계관을 정립할 수 있는 기초자료마저 구비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의 시각으로 미국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미국인의 시각으로 미국을 분석하고 세계를 분석한 책을 배우고 있는 우리가 미국의 진짜 모습을 얼마나 잘 볼 수 있을까?

이는 대학만의 현실은 아닐 것이다. 지난 9·11테러 사건에 보여준 우리 언론들의 모습은 흡사 '한국이 미국의 51번째 주인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미국이 테러 당했다"며 자신들을 미국적 상황과 동일시하는 언론이 있었는가 하면, 방송에서는 CNN뉴스를 실시간으로 내보내는 기민함을 보여주며 기꺼이 황금 방송시간대를 미국의 시각을 선전하는 데 할애했다.


작년 가을에는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결승전에 숨죽이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 백스의 우승에 너도나도 기뻐하던 우리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NBA농구 소식이 스포츠면을 장식하고, 텍사스 레인저스 타자들의 공격력이 국내 중요 스포츠뉴스가 되고, 어떤 여자골퍼의 LPGA(미 여자프로골프리그) 우승이 '자랑스러운 대한의 딸'로 표현되는 '한국 속 미국'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미국식'이라는 것이 모두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를 변화시켜가기 전에 '미국을 알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미국화 물결'에 앞서 이것이 "과연 누구를 위함인가"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부터 아직 뚜렷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미국 대학 속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한국'

미국 내에서 한국에 대한 자료를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는 대학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UCLA 도서관을 방문했다. UCLA는 미국 대학 가운데 한국계 학생이 많기로 유명한 대학이다(한국계 학생은 3300 명으로, 전체 정원 3만3천 명의 10%에 달한다).

이 대학에는 동아시아(중국, 일본, 한국)에 관련된 자료들을 한곳에 모아둔 '동아시아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 UCLA에 있는 13개의 도서관 중 하나인 '동아시아 도서관'은 학술도서관 건물(Young Research Library building)에 자리잡고 있다. 이 도서관은 1948년에 동아시아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교수와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현재 동아시아 도서관에는 중국과 일본 한국(북한포함)에 관한 장서와 정기간행물 등을 합쳐 45만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

조선의 첫 임금 태조부터 마지막 임금 순종까지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의 북한판 이름은 '리조실록'이다. 이 책은 1975년 북한 사회과학원 '리조번역 연구실'에서 태조편을 발행한 것을 시작으로 마지막 임금 순조까지, 조선의 역대임금들에 관한 이야기를 400권으로 엮어놓고 있다. 장장 16년 동안 북한 내 최고 엘리트들이 번역해낸 성과물이 UCLA 동아시아 도서관에 고스란히 소장되어 있었다.

'금강산 전설'과 같은 북한 민화(民話)에서부터 '김일성 전집(전14권)'등 북한지도 지침으로 자리잡고 있는 김일성의 어록중심의 철학전집까지 그 종류와 분량을 떠나 너무나 방대한 규모였다. 50여 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분단의 골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소장하고 있어야 하는 북한에 관한 이런 일차적 학술자료마저도 제대로 구비되어 있지 않은 한국의 대학들과 너무나 많이 비교가 되는 대목이다.

또한 우리나라 각 지방의 구비문학과 토속신앙에 관한 서적에서부터 민속학,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고전 등 UCLA의 동아시아 도서관에 소장된 남·북한에 관련된 서적만 3만5천여 권에 이른다. 5·18민주화 운동자료총서에서 한국 별신굿에 관한 책까지, 매해 한국과 관련된 책들을 몇 개의 영역으로 구분해 구비해놓고 있다. 정기간행물도 일·월간지에서 불교 관련 소식지까지 145종이 매 달마다 새로 구비되고 있다. 이들은 왜, 무엇을 위해서 한반도에 관심을 가지는가? 서쪽의 변방에 불과한 한국에 대해서 매달마다 새로운 자료를 보충하고, 또 알려고 하는가?

발칙한 상상, 발가벗은(?) 미국을 보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국식 시각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으로 미국을 분석할 수 있는 자료라 생각한다. 미국에서 분석한 북한관련 자료가 아니라, 우리가 분석한 북한자료가 우리에게는 더 절실하다. 미국인들이 분석한 세계각국의 문화와 전통,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한국사람이 한국의 입장에서 서술한 서적들과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미국의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는 사람들은 어느 한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닐 것이다. 해방이후 우리가 미국의 울타리 속에서 유지해온 정치·경제·교육·문화의 영역이 우리를 부시의 대변인으로, 프리드만의 전도사로 만들어내고 있다. 또 앞으로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 민족의 이익보다는 부시의 폭력성이 북한을 구석으로 몰아넣게끔 여론을 조작하는 일들도 서슴없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한국의 풍토에 맞는, 한국적인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것도 결코 손쉬운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미국이 작은 나라 한국을 조금 더 심도 깊게 알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미국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우리가 또 한 번 따라 해볼 만한 것이다.

미국 정치경제 사상가들의 이야기들을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각에서 미국을 요리조리 벗겨보고 관찰할 수 있게끔, 깡패국가 미국의 허위와 가식을 벗겨낼 수 있게끔, 미국의 민주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이면서도 이중적인 국가폭력성을 들쳐낼 수 있는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끔, 미국의 제도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한 번 더 확실하게 노력해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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