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가 영웅을 만든다?

<미국여행기11> 9·11테러 이후 '애국주의' 전쟁영화

등록 2002.02.05 08:24수정 2002.02.06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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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그 자체로 푹 빠져 보는 것이 좋다. 감독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혹시나 보여지는 화면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메시지가 없지는 않는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영화 자체에 푹 빠지는 것과 그것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보여지는 영상과 이미지만을 본다는 것은 다른 의미일 것이다.

민감한 주제를 다룬 '블랙호크 다운'


전우애가 미국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블랙호크 다운'이 그것이다. 1992년 평화유지군이라는 이름으로 소말리아 내전에 참전한 미국. '블랙호크'라는 전투 헬리콥터가 작전 도중 추락하고, 이로 인해 미군병사들이 적지에 고립된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 쓴 전우애를 다루는 이 영화는 소말리아 내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을 배경으로 했을 뿐 많은 것들이 낯익은 설정이다.

그런데 미국에서의 반응은 열렬하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전쟁 욕에 불타있는 부시와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 정부 각료들도 국정연설을 통해 "악의 축"운운하며, 전쟁영화를 엄호하기 위한 지원사격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하게 인과관계를 따져보는 추측이 아니다. 미국은 지금 전쟁 분위기를 조성하고, 국방비를 대폭 인상하면서 새로운 국가를 대상으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전쟁여론몰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까? '신이 축복을 내린 미국'을 외치며 몰려드는 관객들로 인해, 영화 '블랙호크 다운'은 연일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하며 기세를 한껏 올리고 있다. 왜 전장에 뛰어들었는지 보다는 조국을 위해, 동료를 구출하기 위해 죽임과 죽음을 반복하는 미국의 전사들의 이야기는 1993년 소말리아 내전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곳곳에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생소한 소말리아 내전을 소재로 한 전쟁영화이지만, 소말리아는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부시가 다음 전쟁수행지역으로 지목한 후보지역(부시는 오사마 빈 라덴의 조직인 '알 카에다'가 활동하고 있는 나라들-소말리아, 예멘, 수단-을 '테러와의 전쟁지역'의 다음목표로 손꼽고 있다)에 속한 곳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파장은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앞으로 진행될 전쟁에 대한 미국의 여론을 환기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리라는 예상은 한낮 기우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영화와 현실사이

이 영화 그 어디에서도 인도적 명분을 내세우며 저지른 미국의 잘못과 반성은 없다. 왜 계속되는 비극이 생겨나는가에 대한 물음은 온데 간데 없고,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미군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화의 현실 굴절은 엉뚱하게 위대한 미국의 아픔과 고뇌로 비춰진다. 이 삼성 교수가 쓴 '세계와 미국'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의 저자 캘리니코스의 말을 빌어 소말리아 내전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92년 12월 인도적 명분을 내건 미국의 주도 아래 소말리아에서 이른바 '희망복원작전'을 벌이고 있던 유엔군은 민간인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감행했다. 하지만 워싱턴에서는 보통 소말리아 작전을 재앙으로 간주했다. 수천 명의 소말리아 국민이 살해되어서가 아니라 18명의 미국인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는 동지와 적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동지에 대한 인간애는 동지에 의해서 저질러졌을 수도 있는 살육의 잔치에 대해서는 눈감아 버린다. 인도적 명분이라 대의에 숨겨진 강대국 군사패권의 폭력성은 휴머니즘과 전우애로 위장된다. 그리고 미국을 위해 죽어간 이들의 아픔만 우리의 머리와 마음속에 저장되고 있다. "그들의 죽음을 보며 전쟁의 참혹함을 느낀다"는 일부 미국언론과 그것을 추종하는 우리언론의 "전장에서 꽃피는 전우애"라는 주장은 어찌 주객이 바뀐 듯한 기분이다.

'람보'와 '제임스 본드'가 테러와의 전쟁을?

1980년대 이후 헐리 우드에는 든든한 흥행 보증수표가 있다. 1970년대 '대부'와 같은 깡패들의 이야기가 지금 한국처럼 확실한 보증수표였다면, 80년대 이후로는 줄 곳 '애국주의'가 그것이다. 1970년대 3류 복서의 인생 역경을 다룬 실베스타 스텔론 주연의 영화 '록키'는 80년대 속편이 만들어지면서, 당시 소련과의 냉전상황을 극화시킨 미국영웅 '록키'로 부활한다.

그 시대 또 하나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영웅이 있다. 베트남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홀로 적과 싸워가던 '람보'다. 전쟁의 목표와 의미보다는 전쟁 수행과정에서 보여지는 파괴와 승리만이 기록된 '람보'식의 전쟁영웅영화는 소련이 무너지면서 미소냉전이 해체되기까지 헐리우드 전쟁영화의 주를 이룬다. 명백한 적이 없어진 상황에 실베스타 스텔론 주연의 람보시리즈는 이러한 애국주의 영화의 전형으로 일컬어졌다.

요즘 할리우드에서는 9·11테러 이후 실베스타 스텔론이 부시를 대신해 오사마 빈 라덴과 맞서 싸우는 '람보4'가 기획 중에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냉전시기 이후 최대의 호재가 할리우드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는 이럴 때일수록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악당을 무찌르는 영웅의 등장을 애타게 염원하고 있다보다.

현실과의 비교분석이 필요할 때

이것으로도 부족했을까? 요즘 들어 부시가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에 느닷없이 주연으로 등장한 북한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007'도 새로 기획되고 있다. 북한의 테러요원과 제임스 본드가 대결하는 것을 토대로 영화를 만든다고 한다. 제임스 본드와 본드 걸의 활약이 이제 우리의 민감한 사안인 남북문제까지 뛰어든 것이다.

부시의 '악의 축'발언에서 보여지는 강경 분위기는 이제 단순하게 정치적인 발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것을 바탕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영화는 영화다"라는 홍보와 함께 그 속에 숨겨진 더 커다란 이야기는 우리 머리 속에 조용하게 똬리를 틀 것이다.

그래서 일까? 북한 첩보원으로 출연제의를 받았던 차인표 씨가 "007이 남북간의 긴장관계를 조성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출연을 거부했다는 언론보도는 우리를 좀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언제까지 진실을 가장한 위선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는 영화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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