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녀석의 변성기를 겪으며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

등록 2002.02.05 08:50수정 2002.02.05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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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소년 시절의 '변성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그때로부터 대략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을 테지만, 세월 탓만은 아닐 것이다. 변성기와 관련하는 아무런 사건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아이들의 발육이 워낙 빨라서 여자아이들의 초경도, 남자아이들의 변성기도 옛날보다 훨씬 앞당겨졌음이 거의 보편적인 현상인 것 같다. 지금은 중학생인 내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초경을 해서, 그때 가졌던 당혹감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래도 아들녀석은 중학생이 돼서나 변성기를 맞을 줄 알았다. 그것은 내 '희망'이기도 했다.

정말이지 나는 아들녀석의 소년 시절의 미성(美聲)이 좀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랐다. 적어도 초등학생 시절 동안은 아들녀석의 미성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물건너가고 말았다. 5학년이 된 지난 해 여름께부터 아들녀석은 갑자기 그 특유의 미성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총각 시절에도 평일 미사에 열심히 참례하며 살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얻은 후로는 평일 미사 참례를 더욱 중요한 일로 생각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함께 미사에 참례할 수 있게 된 뒤부터는 가족이 함께 평일 미사에 참례하는 일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로 여겼다. 우리 성당에서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은 평일 미사를 저녁에 지내는데, 이 평일 저녁 미사에 우리 가족이(한 사람이라도)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온 가족이 함께 평일 미사를 지낼 수 있는 생활에서 큰 행복을 느낀다. 가족과 함께 미사를 지낼 적마다 하느님께 감사하곤 한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에는 성당에 가는 것이 습관이 된 아이들과 손을 잡고, 때로는 가볍게 장난도 하며 성당 언덕길을 오를 때의 그 기쁨과 즐거움을 과연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가족과 함께 미사를 지내면서 내가 더욱 행복을 느꼈던 것은 아들녀석의 목소리 덕이었다. 아들녀석은 유치원생 시절부터 성인 성가를 곧잘 불렀다. 어떤 노래든 한두 번 들으면 쉽게 따라 불렀고, 음정과 박자가 정확했다. 더욱 특별한 것은 해맑은 목소리였다. 이 세상에 어린아이의 미성처럼 아름답고 듣기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아들녀석의 미성은 아무래도 타고난 것인 듯했고, 내가 듣기에는 거의 황홀할 정도였다.


신부님도, 수녀님들도 부임하신 날부터 내 아들녀석의 목소리에 반하시는 것 같았다. 평일 미사에 나와서 내 아들녀석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어떤 이는 '천상의 목소리'라는 말로 자신의 느낌을 표현했다. 녀석이 1학년이던 해 여름에는 바닷가로 피정을 오셨다가 평일 미사에 참례하신 살레시오회의 여러 수녀님들이 미사 후에 녀석에게로 와서 한마디씩을 건네주고 한 분 수녀님은 작은 성물 배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1999년 2월 온 가족이 제주도에 가서 3박 4일 동안 '성 이시돌 피정센타'에 머물 때는 일정을 함께 하는 100여 명의 신자들이 하나같이 내 아들녀석을 귀여워해주었다. 어떤 자매는 몸이 무거워서 아침 미사에 나오지 않으려고 했다가 내 아들녀석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나왔노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녀석의 그 고운 목소리는 이제 온데간데 없다. 변성기의 탁음만이 전부일 뿐이다. 그나마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녀석도 자신의 변한 목소리가 싫고 힘이 드는지 미사 시간에 아예 성가를 부르지도 않는다.

생각하면 아쉬움이 크다. 벌써 변성기에 접어들어서 아들녀석의 그 미성을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이상한 스산함을 안겨 주기도 하다. 나는 여기에서도 세월 빠름을 절감한다. 급기야는 세상의 '덧없음'까지 반추하는데, 아내는 아들녀석의 그 미성을 일찍이 녹음해두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한다.

정말이지 나는 요즘 아들녀석의 심한 변성을 들으면서도 내 나이를 의식하면서 인생의 무상을 반추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변성기라는 것이 일시적인 과정임을 상기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갖기도 한다.

아들녀석에게 오늘의 변성기가 별 탈없이 잘 지나간다면, 원래의 미성이 새롭게 회복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녀석이 좀더 강화된 새로운 미성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게는 분명히 하나의 바람이고 희망이다.

그 희망을 아들녀석도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녀석에게 물었다.
"지금의 네 변한 목소리가 너도 싫지?"
녀석은 대답 대신 멋쩍게 웃었다.
"너도 네 목소리가 다시 좋아지고, 높은 음까지 낼 수 있기를 바라지?"
녀석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녀석이 며칠 전에 피아노 학원에 가지 않고 친구 집에 가서 놀고 왔으면서도 천연덕스럽게 피아노 학원에 갔다 왔다고 거짓말을 했던 (그래서 아빠로부터 종아리를 맞았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다시 좋은 목소리를 갖고 싶으면 하느님께 기도해. '하느님, 제가 맑은 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제게 다시 좋은 목소리를 주십시오'하고…. 그렇게 기도하면서 절대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착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살 것을 결심하고 그것을 하느님께 약속해야 해. 착한 마음을 지녀야만 넌 다시 좋은 목소리를 가질 수 있어. 마음이 착하고 영혼이 맑은 사람에게서만 좋은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착하고 영혼이 맑은 사람의 좋은 목소리는 더욱 아름다운 법이야."

좋은 목소리를 바라는 것이 결국은 맑은 영혼을 추구하는 것임을―아빠의 말뜻을 녀석은 알아듣는 듯한 기색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아들녀석이 변성기를 잘 극복하고 다시 좋은 목소리를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더불어 나는 아들녀석이 평생 동안 착한 마음과 깨끗한 영혼을 지니고 살게 되기를 바란다. 아들녀석도 오늘 함께 그런 소망을 갖게 되기를….

착한 마음을 지니고 산다면 현실적으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지만, 이 세상에서의 손해가 하늘나라에서는 득이 됨을, 그것을 아들녀석이 일찍부터 헤아리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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