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공 아버지와 아들

등록 2002.02.06 00:58수정 2002.02.0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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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수리할 일이 생겨 수리공을 부르게 되었는데 만나고 보니 예순 살이 다 되어가는 중년 아저씨였다. 욕조를 없애고 타일을 붙이는 등으로 얼마나 하느냐고 묻자 꽤 만만찮은 액수를 댔다. 예상밖의 비용에 놀라 비싸다는 뜻을 밝히니 그러면 다른 데 알아 보라고 딱 잡아 떼는 것이었다.

울며 겨자먹기로 이 곰보 아저씨께 일을 맡기기는 맡겼는데 날이 되자 젊은이를 하나 데려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묻자 그는 "학생이유"하고는 그만이었다. 나는 그 젊은이가 일종의 '시다'라는 뜻으로 이해하고는 "아, 선생님께 배우는 학생이군요"하고는 웃어 넘겼다.


그런데 그 묵뚝뚝한 수리공 양반이 학생 가르치는 일에는 자상하기가 자심하여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또 그 젊은이도 수리공 양반이 '뻰찌' 달라면 '뻰찌', 드릴 달라면 드릴, 제깍제깍 찾아 올리는데 그 낯빛에 '시다'로서의 권태나 불만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양반 먹고 살려다 보니 목수 일부터 전기 고치는 일까지 안해 본 일 없으시다는데 그 일하는 양이 능숙하고도 깔끔했다. 눈이 게으르지 손은 부지런하다고, 언제 그 많은 일 다 끝내나 했는데 선생과 학생이 오순도순 낮은 목소리로 공구와 재료를 넘겨받고 넘겨주면서 점심 저녁이 지나자 마침내 일이 끝났다.

원래 약정했던 것에 몇 만원 더 보태 드리자 그 양반 돈을 세다 말고 "니가 세봐라"라고 젊은이에게 돈다발을 넘긴다. 그 돈 세던 엄지 손가락에 손톱이 없었다.

내 낯에서 궁금한 표정을 읽었는지 "이거 말유?"하고 손가락을 들어 보여주었다. 서울에 처음 와서 한 겨울 일 없이 놀다가 고향 사람이 일거리 생겼다고 나오라 해서 반가운 마음에 연장 챙겨 서둘러 나가다 그만 기계톱에 스쳤는데 손톱만 싹 베어나가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시멘트 타일 먼지를 뒤집어 쓴 웃옷을 들춰올려 배 언저리를 보여주는데 살을 떼어낸 자국이 선명했다.

"뱃살을 이식해 붙이기는 했는디 감각이 읎어서 돈 시는 게 힘들어유. 미친 놈마냥 자꾸만 아래루 흘린다니께."


연장들, 남은 재료들을 트럭에 챙겨 올리고 떼어낸 욕조 조각이며까지 함께 실어 떠나면서 그 양반이 젊은이를 가리키며 한 마디 말을 던진다. "지 아들이유. 일을 곧잘 도와주니께. 어제는 작은 놈이 했는디."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네들의 트럭을 한동안 바라보고 서 있었다.

오랫동안 나는 내 자신이 가족에 대한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지금 나는 행복이라는 말도, 그 관념도 혐오하지만 돌이켜 보면 내 성장기에는 행복한 감정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비록 착각이었다 해도 나는 불행했는지 모르겠다.


불행하게 자란 사람은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다 맞지는 않겠지만 그래서인지 지금도 나는 가까운 이들에 대한 사랑을 모른다. 곧 가족을 사랑하는 법을, 가족에 진실해지는 법을 모른다.

일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고도, 지독한 이기주의에 중독되지 않고도, 감정의 마비를 겪지 않고도 가족이라는 것을 꾸리고 그것을 울타리 삼아 살아갈 수 있는 길은 과연 존재하는가? 아직도 나는 그 답을 모른다. 수리공 부자는 그것을 말하지 않고도 알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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