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행복한 가족 나들이

등록 2002.03.11 09:30수정 2002.03.11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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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거의 매일같이 백화산(白華山)을 오릅니다. 당뇨 환자인 내 건강을 위해서도 오르고, 기도를 하기 위해서도 오르고, 사색을 하기 위해서도 오릅니다. 거의 매일같이 산을 오를 수 있는 내 휘늘어진 팔자에 대해서 감사함과 죄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백화산 정상에 서면 서산시 팔봉면의 팔봉산(八峰山)과 부석면의 도비산(島飛山)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북쪽과 동남쪽의 방향에서 두 산은 언제나 내게 손짓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내 눈에 담는 것만으로도 한량없이 반갑고 정다운 산들….

지척에 있는 정다운 산들이건만 나는 참으로 오래도록 그 산들을 쉬이 밟지 못하며 살아왔습니다. 팔봉산은 지난해 11월에서야 하루 가족과 함께 겨우 밟아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팔봉산을 오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감회를 느꼈지요. 그런 것을 일러 '감개무량'이라고 하던가…. 실로 이십 수년만의 '재회'였습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예비군 노릇을 할 때, 1975년쯤이었던가…예비군 훈련을 받느라고 팔봉산을 올랐던 일을 회억하자니 그 가뭇없는 세월에 괜히 눈물이 나더군요.

팔봉산과 이십 수년만의 재회를 하고 난 후로는 자주 도비산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백화산 날망에서 도비산을 바라볼 때마다 가까운 시일 내에 내 가족들에게 꼭 도비산을 구경시켜 주고픈 마음을 키우곤 했습니다. 나 혼자만 간다면 언제라도 쉽게 갈 수 있는 일이지만, 내 가족과 동생 가족이 모두 함께 움직이려면 날을 잘 골라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날을 잡고 계획을 세울 수가 있었습니다. 어제(10일)는 정말이지 놓칠 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동생도 쉬는 일요일이고, 성당에서도 별다른 행사가 없어 주일 미사를 지내고 곧바로 집에 올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낮에 지역 종친회 모임이 있지만 슬그머니 비켜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고….

전국적으로 비가 내리리라는 일기 예보 때문에, 그리고 이른 아침의 곰살궂은 봄비를 확인하자니 아침때까지는 다소 서운한 마음이었습니다. 가뭄이 해소될 정도로 시원스럽게 비가 쏟아진다면 차라리 위안이 되리라는 생각도 했는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날이 훤히 들더군요.


미사를 지내고 성당에서 돌아오는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어머니와 아이들의 점심상 보는 일을 마친 아내와 함께 아들을 장가 보내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네 집에 가서 국수를 먹고 서둘러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오후 2시경 우리 가족은 드디어 도비산을 향해 출발을 했습니다.

이번의 가족 나들이에도 연세 팔순이 다 되신 어머니도 기꺼이 동참을 해주셨습니다. 내 12인승 승합차가 또 한번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동생네 가족까지 아홉 명이 한 차를 타고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태안읍을 벗어나 서산시 부석면 땅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더욱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부석면 취평리의 도비산은 내 청소년 시절의 추억 한 조각이 어려 있는 곳이랍니다. 고등학생 시절에 도비산으로 소풍을 갔던 거지요. 2학년 때의 가을 소풍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지금은 태안읍에서 부석면 도비산까지 자동차로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지만, 1960년대 중반 시절에는 실로 '원족(遠足)'이었지요. 원족이었기에, 그리고 한 개 반 40여 명밖에 되지 않아서 부석사(浮石寺)에서 일박을 했었고….

헤아려보니 그 시절로부터 어언 3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무려 37년만에 도비산과 재회를 하는 셈이었습니다.

도비산 중턱의 부석사 앞에까지 콘크리트 포장 길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구불구불한 길이 좁고 경사가 심한 편이어서 차 운전에 조심을 해야 했습니다. 절 앞의 작은 주차장에 차를 놓고 우선 절 구경부터 했습니다.

도비산의 부석사는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창건한 절이라는데, 규모는 작지만 긴 역사를 지닌 고찰이어서인지 찾는 사람이 제법 많은 듯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생 시절에 소풍 와서 하룻밤 자고 갔던 방이 어디에 있었는지, 수십 명이 함께 잤던 그 너른 방이 지금도 있는지 눈으로만 보아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곧 도비산의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놀랍게도 어머니도 8부 능선쯤의 헬기 착륙장 밑에까지 동행을 하셨습니다. 결국 기운이 부쳐 포기하고 말았지만, 작년 가을 대장암 수술 전처럼 몹시 숨 가빠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수술 전에는 심한 빈혈로 2층 연립주택 옥상을 오르는데도 숨이 몹시 가쁘시곤 했는데…. 지금은 산길을 오르면서도(조금이지만) 별로 숨 가빠하시지를 않으니 몸 안에 혈액의 양이 정상으로 돌아온 듯싶고, 그만큼 몸이 건강해 지셨음이 분명한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정정하신 보행이 기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짐짓 놀라워하고 감탄하는 말로 어머니의 기운을 북돋아 드리면서도 무리하시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도비산 정상까지는 다소 경사가 심한 편이었습니다. 높이가 352미터에 불과한 산이지만 정상에 서니 역시 사면 팔방의 전망이 황홀할 정도로 좋았습니다. 부석면과 인지면, 서산시가 한눈에 보이고, 팔봉산과 백화산이 손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간월호와 부남호를 싸고 도는 천수만의 바둑판같이 가지런한 들판이 아스라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땀을 닦으며 환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풍광이 우리에게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와 동생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면서 천수만의 옛 풍경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빼앗긴 바다 천수만, 갖가지 어족의 산란장이었던 황금 어장 천수만을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의 숙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천수만을 감싸고 있는 3개 시·군 44개 리 주민들에게는 천수만은 아릿한 향수와 함께 통한의 아픔을 안겨 주는 곳인 까닭이었습니다.

따고 줍고 캐고 뜯고 긁고 잡고…쉽게 얻을 수 있는 해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던 바다 천수만, 어디서든 아무 때나 바구니 하나 들고 갯벌로 나가기만 하면 금세 쉽게 반찬거리를 구할 수 있던 바다 천수만, 잃어버린 우리의 바다 천수만….

도비산 정상에서 하산을 할 때는 천수만의 광활한 들판을 보며 우리 형제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부석사 앞으로 내려와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우리 가족은 다시 차에 올랐습니다. 나는 천수만의 A지구 제방으로 내려가서 간월도를 들른 다음 B지구 제방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오리 떼와 들판에 깔려 있는 철새들을 보며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곤 했습니다.

안면도와 태안 읍으로 갈라지는 삼거리로 나온 나는 이번에는 청포대 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마검포에서부터 청포대, 달산포, 몽산포로 이어지는 30리 갯벌을 달리면서 내가 태안이라는 참으로 좋은 곳에서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6시경 태안 읍내로 돌아온 우리는 한식 음식점에 가서 4천 원 짜리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천주교 신자로서는 절제와 극기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순 시기'이니 비싼 음식은 피하고 수수한 음식으로 저녁을 먹자는 내 제안에 모두 찬동을 했습니다.

나와 아내와 올해 중3이 된 딸아이는 사순 시기 동안 저녁을 굶기로 하고 (굶은 만큼 자선을 하기로 하고) 잘 실행을 해오고 있는데, 오늘은 도비산 산행을 한 데다가 가족 외식이기도 하니 가볍게 저녁을 먹기로 했습니다.

저녁 식사 도중에 "아주버님 덕분에 오늘 하루도 참 즐겁고 행복했어요"라는 말이 제수씨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기쁘게 웃으며 대꾸했습니다.

"내가 더 즐겁고 행복합니다. 나는 어머니가 계셔서 행복하고, 마누라가 있어서 행복하고, 아들딸이 있어서 행복하고, 동생과 제수씨가 있어서 행복하고, 어린 조카들이 있어서 즐겁고 행복하거든요."

그러자 딸아이가 "그럼, 우리 모두 아빠께 행복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네요. 그렇담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행복감을 주는 사람들이라는 말도 되겠네요?"라는 말을 했고, 나는 또 즐겁게 웃으며 "역시 우리 딸은 똑똑해"라고 대꾸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 통상적인 '식사 후 기도'에 이어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저희 가족에게 오늘 하루 즐거운 시간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며 즐겁게 살고 있는 저희 가족이 즐거운 시간을 갖지 못하고 사는 불행한 사람들을 늘 기억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여러 가지 이유로 가족간에 사랑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가난과 병고 속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마음 쓰며 사는 저희들이 되게 하소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가족 나들이를 하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주일을 좀더 뜻 있게 살려면 주변의 불우한 사람이나 시설들을 찾아다니며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이 더 좋겠지만,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장의 가까운 명소들만이라도 찾아다니며 바람을 쏘이는 가족 나들이를 자주 하고 싶은 것이 내 뜻이었습니다.

내 뜻을 고맙게 받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면도 '꽃지'를 가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고, 그래서 다음 주일에는 꽃지와 안면도 남단인 영목항을 둘러보는 가족 나들이를 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 슬하를 떠나기 전에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도 간절합니다. 세월이 빨리 흐르고 아이들이 성큼성큼 자라는 것에서 이상한 상실감 같은 것을 느끼곤 합니다. 아이들과의 즐거운 시간들, 추억들이 점점 많아지고 점점 아련해지는 것도 느낍니다. 정말 아련한 것들이 많습니다. 백화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몇 년 전에 아이들과 (생질 아이들도 함께) 둘러앉아 즐겁게 과자를 먹었던 약수터 통나무 식탁 자리를 눈여겨보곤 합니다. 아련해지는 감정이 야릇한 우수를 자아내기도 하는데, 나는 그것을 즐기는 지도 모릅니다.

아련함과 우수를 쫓는 오늘의 이런 내 발걸음도 시시각각 과거를 향해 달려가고, 언젠가는 이것 역시 아련한 추억이 되고 말겠지요. 인간의 시간이란 이렇게 덧없기 마련인 것을…. 시간의 덧없음을 생각하다 보면 다시 하느님의 시간도 생각하게 되고…. 덧없음을 많이 느끼고 가슴에 슬픔들을 많이 지닐수록 하느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다시 그런 생각들을 반추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메일을 확인하려고 컴퓨터를 켜고 보니, 아내가 간밤에 넣은 듯한 음악 메일이 뜨더군요. 어제의 가족 나들이가 무척 즐겁고 행복했노라는, 내게 감사하는 메일이….

아내의 메일을 읽고 음악을 듣다보니 어제의 가족 나들이를 가지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일기를 쓰고 싶은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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