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그리 독하실줄 몰랐어요"

초심이 무너지는 두려움에 대하여

등록 2002.04.28 10:16수정 2002.05.0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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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쉽게 만나지 말자'
이것은 초임교사 시절 제가 정해놓은 일종의 교사로서의 좌우명입니다. 지금도 그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는 있지만, 천년을 갈 것 같았던 몸이 차츰 쇠하기 시작하면서 마음도 함께 녹이 스는지 쉽고 빠른 길로 자주 눈이 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몸에서 쉰내가 나도록 땀을 흘리며 함께 교정을 뛰었던 먼 기억 속의 아이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두 번째 담임을 맡던 해의 일입니다. 그 해에도 저는 아이들을 쉽게 만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체벌금지를 미리 선언해놓고 담임 업무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만 해도 학급 당 학생수가 세계 최하위의 수준이었던 교실 환경 속에서 무장해제나 다름이 없는 체벌금지가 선언된 학급이 잘 돌아갈 리는 없었습니다.

결석생이 줄어들 기미가 보여지지 않던 어느 날, 저는 종례 시간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중대발표를 하고 맙니다.
"너희들이 정한 규칙만으로는 결석이 줄지 않으니 이제는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정한 규칙이란 결석 하루에 운동장 스무 바퀴를 도는 일종의 자율법칙이었습니다. 체벌을 금하는 대신 아이들 스스로 결석생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해보라고 하여 그런 자율법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효험이 있는 듯하더니, 아이들이 운동장을 도는 것으로 자신의 잘못을 상쇄해버리는 식의 묘한 논리가 작용되면서 아이들 스스로 정한 자율법칙은 있으나마나한 것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뛴다. 하루 결석 한 명 당 스물 다섯 바퀴다. 두 명 결석이면 오십 바퀴가 되겠지. 두 명이 이틀 결석을 하면 백 바퀴. 지난번 단합대회 때 너희들과 축구시합을 한 뒤로 지금 선생님의 다리는 정상이 아니다. 무리하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제 딴에는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공갈 협박에 아이들의 동정심까지 노려본 분명하고 확실한 배수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다음 날 결석을 한 것입니다. 엎질러진 물을 주어 담을 수도 없고 나쁜 자식, 몹쓸 자식 하면서 후회에 후회를 거듭할 뿐이었습니다. 그의 결석은 그 다음날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날 방과 후 저는 그 아이를 찾아보려고 무작정 거리에 나섰다가 허탕을 치고 밤이 깊어서야 그의 집을 방문하여 녀석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에게 이 말만을 남기고 돌아섰습니다.

"오십 바퀴는 내 체력의 한계다. 운동 삼아 뛸만 하겠지만 그 이상은 좀 힘들겠다. 그러나 나는 뛴다."


다음날,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텅 빈 운동장 스타트 라인에는 그 아이와 제가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기특하게도 녀석이 동반 주행을 자청하고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방황과 무기력한 삶들이 그의 정신과 함께 건강마저 좀먹고 말았는지 그는 스물 일곱 바퀴만에 쓰러지고 맙니다. 그가 다시 일어나 뛰기 시작한 것은 제가 혼자서 다섯 바퀴를 돌고 난 뒤였습니다.

비틀거리며 이를 악물고 뛰는 모습이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지만, 저는 차츰 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상이 아닌 관절도 관절이었지만 점점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남아 있는 스물 세 바퀴를 도저히 주파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저의 속내도 모르고 녀석은 그제야 몸이 풀리는지 엄청난 속도로 저를 앞질러 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자꾸만 뒤처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다섯 바퀴를 남겨 놓고 어쩔 수없이 쓰러질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과장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무엇보다도 죽음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굳게 하면서, 저는 마지막 세 바퀴를 남겨놓고 오른쪽 팔뚝을 깨물었습니다. 만약 심장에 이상이 온다면 즉시 혈맥을 터뜨려 위험의 고비를 넘기리라는 순간적이고도 절박한 발상이었습니다.

한 기간의 긴 레이스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녀석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독하실 줄 몰랐어요."
저는 녀석의 그 말을 듣자 내심 쾌재를 불렀습니다. 아무리 눈에 쌍심지를 켜고 험상궂게 얘기를 해도 저를 허술히 보던 녀석들이었는데 이제 좀 정신을 차렸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그는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결석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불만인 아이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한 아이는 저에게 이런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제발 결석하면 저희들을 때리고 마십시오. 다른 반처럼 우리 반도 매를 드시란 말입니다. 어휴!"

그 해, 2학기가 되어 현장 실습을 떠난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아이도 멀리 서울 근교로 현장실습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의 생일이 돌아온 것은…. 저는 그가 실습중인 곳으로 편지나 다름 없는 한 편의 시를 띄워 보냈습니다.

잘 있었니?
일은 힘들지 않구
막상 너희들을 떠나보내고 나니
마음에 걸리는 것뿐이구나

오늘 찬일이에게서 편지가 왔더구나
잘 있다는 안부 끝에 힘이 좀 든다는
단 한 줄이 또 나를 울리고 말았는데
넌 그래도 찬일이에 비하면 건강하니까
좀 든든하단다

멀리 떠나 있으니 생일 잔치상도 못 받았겠고
동무들이랑 함께 모여 음료수라도 마셨는지
울적한 생각에 뎅그라니 혼자 보낸 것 아닌지
궁금하지 짝이 없구나

서울에 가니까 어때?
좋은 차, 좋은 집, 이쁜 여자애들 많지
조금은 가난이 부끄럽고 화도 나고 그렇지
하지만 별 것 아니란다

영어시간에 홈과 하우스를 설명했던 거
기억나니?
홈은 가정이란 뜻이 담긴 추상명사요
해서 관사를 붙일 수 없고
하우스는 건축물을 뜻하는 보통명사요
해서 관사를 붙이고 복수로도 만들 수 있다고

그리고 하우스보다는 홈이
열두 배는 더 소중한 단어라고 말했던 거

집이 근사하면 더 좋겠지
하지만 가시 덮개 속에 들어 있는 알밤들처럼
오순도순 정이 있으면 더욱 좋지
소중한 것은 하우스가 아니라 홈이란다
그건 지엔피가 아무리 높아도 변할 수 없는 진리야

그럼, 사랑이 가득 넘치고 용서가 있고
언제나 따뜻하게 반겨주는 미소들이 있기에
네 어머니가 계시는 집이기에
네가 살아갈 수 있는 거야

이제 곧 너도 가장이 되겠지
눈 깜빡할 사이인 것을 잊어서는 안돼
좋은 아내를 얻으려면
네가 먼저 좋은 남자가 되어야지
그래서 건강도 지켜야 하고
넉넉하게 사람 사귀는 기술도 필요한 거지

힘들 때는 우리 함께 뛰었던 교정을 생각하자꾸나
목숨이 단 하나뿐인 것을 사무치도록 일깨워주었던
그 벅찬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또 밀려오는 파도를 가슴으로 안아보자꾸나

어디 가슴팍만 하겠니 눈만 치켜 뜬다면
그딴 고난의 파고가 네 키만 하겠니
안녕, 다시 편지할게
생일 축하한다

요즘 들어 체벌에 대한 저의 생각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아이들의 육체에 가해지는 아픔도 그 아이의 바른 자람을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올해 담임 반 아이들에게 아직까지 매를 대지 않고 있습니다. 매를 댈 때 대더라도 매가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쉽게 만나지 말자'는 초심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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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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