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아프리카야

등록 2002.06.03 12:48수정 2002.06.0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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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과 프랑스의 월드컵 개막식이 있던 날 나도 집에 앉아서 세기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네갈이 세계 랭킹 1위이고 아트사커를 구사한다는 프랑스를 1대0으로 물리치는 이변을 연출했을 때 나도 남들처럼 이상스러운 감동을 맛보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잔잔히 솟아오르는 그같은 감정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래도 그것은 세네갈과 프랑스의 얽힌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세네갈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그날 전반전에 한 골을 넣고도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세네갈 사람들의 표정은 전혀 밝지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차라리 어둡기까지 했고 뭔가 겁을 집어먹은 사람들처럼 얼굴 표정들이 단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본래 아프리카 사람들은 느긋하고 낙천적이라는데 왜 그랬을까. 쾌활하게 웃는 사람보다 뭔가 모를 걱정을 안고 있는 것처럼 막간을 이용한 응원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라운드를 쳐다보고 있던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 가슴 졸이는 후반 45분이 흘러가 월드컵 사상 최대의 이변이 현실화되었을 때, 그들은 너무나 한국적으로, 아프리카적으로가 아니라, 눈물을 훔치고 있지 않던가.

프랑스의 문명비평가인 기소르망(Guy Sorman)은 약소국이 강대국을 이긴데서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했다는데, 그의 선의는 고맙기 이를 데 없지만 그때 나는 카타르시스를 느낄만한 심리적 여유조차 없이 마치 내 자신이 세네갈 사람이 된 것 같은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디오프 선수의 어시스트로 부바 선수가 골을 넣었을 때 그 골 세러모니 또한 나의 마음을 자극하는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골을 넣은 선수는 자기 유니폼을 벗어 잔디밭에 뉘여놓는다. 여러 선수들이 함께 이 유니폼을 둘러싸고 리드미컬한 춤을 추는데 이는 필시 그네들 전래의 집단무일 것이다. 이 주술같은 공동의 춤은 혼자 그라운드를 뛰어다니기 일쑤인 서양 선수들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 서 있는 세러모니일 것이니, 그네들에게 공은 단순한 스포츠나 오락이 아니라 제의이고 한국인 또한 이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한국인에게 16강 진출은 이미 하나의 주술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은가.

세네갈 대통령은 그날을 국경일로 선포하고 오늘같은 날은 공부할 수가 없다며 휴교령을 내리고 모든 직장에 유급휴가를 주도록 했다던가. 이런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세네갈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오고 한국대사관 앞에서 모여 우의를 나타내고 아프리카 대륙이 기쁨으로 아우성쳤다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마치 그들이 한국인 같다는 이상스러운 연민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식민지 경험을 경유한 사람들의 통성(通性)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심리적 유대감이야말로 월드컵이 한국인에게 선사해준 가장 큰 가치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다라니경과 고속철도와 바르도라는 한심한 여인에도 불구하고 나는 혁명과 자유를 들어 프랑스에 대한 호감을 유지하겠지만 그러나 아마도 그 어둠과 빛의 역사 때문에 나는 아프리카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날 개막전 앞에서 나는 소리 없이 아프리카를 부르고 있는 나를 느꼈다. "너, 아프리카야……" 그러나 그것은 아직 뒷문장을 이어갈 수 없는, 아직은 한갓 감동의 감탄사일 뿐이었다. 지금 아프리카는 내게 어릴 적에 헤어져 수십 년만에 만난 얼굴 기억나지 않는 형제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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