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피언의 어머니

영화 속의 노년(35) -〈챔피언〉

등록 2002.07.01 14:15수정 2002.07.03 14:42
0
원고료로 응원
김득구. 세계 챔피언에 도전했다가 링 위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한 권투 선수, 약혼녀가 있었고, 그 때 그 약혼녀의 몸 속에 아기가 있었고, 또 어머니가 계셨던 것만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김득구는 너무 가난했고, 힘들었다. 두 번 재가한 어머니를 따라가다 보니 성(姓)이 세 번이나 바뀌어서 아이들의 놀림감이 된다. 무작정 뛰쳐나온 집. 껌팔이로도, 책 장사로도 모자라 피를 팔기도 하지만 늘 배가 고팠다. 수돗물로 채운 배에 그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만난 권투. 권투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그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동양 챔피언에 오르고 사랑도 얻지만, 세계 챔피언에 도전한 그는 그만 링 위에 쓰러져 눕고 끝내 이 곳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영화 한 귀퉁이에 챔피언의 어머니가 있다. 동양 챔피언이 되어 고향으로 금의환향한 아들, 동네 잔치가 벌어져도 어머니는 그저 부엌에 들어 앉아 음식만 만들고 있다. 바깥에서는 사나운 눈꼬리를 치켜 세우던 의붓 아버지가 언제 그랬더냐 싶게 챔피언 벨트를 두르고 동네 사람들에게 으스대는데도 말이다. 그리고는 아들에게 물을 뿐이다. '골병이나 안들었냐'고. 못 먹이고 못 가르친 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저만치에 우뚝 선 아들에게 그저 죄인이다.

세계 챔피언이 되려고 외국 땅으로 떠난 아들이 경기를 하는 날, 어머니는 텔레비전 중계를 하는 시골 다방 한 구석에 앉아 염주를 돌리며 기도할 뿐이다. 그런 아들이 링 위에서 쓰러진다. 치마 저고리 차려 입고 보퉁이 하나 손에 들고 비행기 타고 그 곳에 간 어머니는 의식을 잃고 누운 아들의 이름만 부를 뿐이다. '득구야, 득구야' 보퉁이 속에는 깨끗한 속옷과 겉옷 일습이 들어 있다. 깨끗한 옷 한 번 제대로 입혀보지 못한 어머니, 정신을 놓아버리고 누워있는 아들에게 역시 또 죄인이다.

끝내 깨어나지 못한 아들은 차디찬 몸으로 돌아오고, 어머니는 논두렁에 쭈그리고 앉아 아들이 남긴 권투 글러브를 태운다. 아들을 앞세운 어머니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죄인으로 세상에 홀로 남는다.

영화 속의 김득구가 주는 웃음과 눈물 사이에서, 몸 속에 아기를 가진 약혼녀의 울음 속에서, 챔피언의 어머니가 참 슬프다. 배고프고 의지할 곳 없어서 결혼이라는 형태로 몸을 의탁했겠지 싶다. 그래서 재가를, 그것도 두 번이나 하지 않았을까. 상급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성(姓)이 세 개라고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 가슴은 이미 다 해졌을 것을. 아들은 또 다시 죽음으로 어머니 가슴을 끝간데 없이 무너뜨린다.


이 땅의 가난한 아들, 바로 가난한 어머니의 아들이다. 눈물도 다 말라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쪼그라든 얼굴, 넉넉한 곳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작은 몸피. 어머니는 삶에 하도 눌리고 눌려 납작해진 몸으로 속울음을 삼키고 있을 뿐이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아들의 흔적을 태우는 어머니는 그래서 한없이 눈물겹다.

챔피언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매맞지 않아도 되는 세상으로 갔기에 어머니는 아들을 떠나보낼 수 있었으려나. 스스로 목숨을 거둬들여 아들의 뒤를 따라갔다는 실제의 어머니는 그래서 더더욱 가슴을 아리게 한다.


(챔피언 / 감독 곽경택 / 출연 유오성, 채민서, 윤승원 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