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이를 수 있는 곳

영화 속의 노년(36) - <시네마 천국>

등록 2002.07.10 17:20수정 2002.07.1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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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영화는 무엇일까. 바닷가 작은 마을 광장 한가운데 있는 극장에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영화가 상영되면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극장에 모여 앉아 울고 웃는다.

영화 검열관인 마을 성당의 신부님은 키스 장면은 모조리 잘라낼 것을 명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어린 토토는 영사 기사 알프레도가 있는 영사실을 들락거리는 게 낙이다.


영사 기사의 어려움을 아는 알프레도는 토토를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막지만 어느 사이에 정이 든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며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사는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친구이면서 선배이면서 또 아빠같은 존재이다.

어느 날 필름이 타면서 옮겨 붙은 불로 극장은 다 타버리고, 불 속에 갇힌 알프레도를 토토가 구하지만 알프레도는 심한 화상을 입고 실명하고 만다. 알프레도에게서 배운 기술로 새 극장에서 영사 기사로 일하는 토토. 그러나 첫사랑의 실패는 토토에게 심한 좌절감을 가져오고,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고향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갈 것을 권한다.

로마에서 유명한 영화감독이 된 중년의 토토. 알프레도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을 찾는다.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올 수 있는 곳인데, 다시 오는데 30년이 걸린 것이다. 알프레도의 장례식을 치르고, 폐허가 되어 주차장 부지로 팔린 극장이 폭약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도 보게 된다.

알프레도가 토토에게 남긴 것은 영화 필름 한 통. 로마로 돌아와 시사실에 혼자 앉은 토토 앞에는 알프레도가 남긴 선물이 스크린 가득 펼쳐진다.

청년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말한다. "인생은 영화하고는 다르다. 인생이 더 힘들다. 떠나라. 돌아오지 말아라. 편지도 하지 말고, 향수에 젖지도 말아라. 나도 잊고, 모두 잊어라." 그러면서 무슨 일이든 좋아서 하라는 말을 덧붙인다.


왜 알프레도는 그렇게 토토를 밀어냈을까. 여름엔 더위에 겨울엔 추위에 시달리며 휴일도 없이 사는 영사 기사의 생활을 절대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토토가 이 작은 마을에 그대로 머물러 살기에는 아까운 그릇이라고 생각해서였을까.

전쟁에 나간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남매를 데리고 홀로 살아가야 하는 엄마는 떠나는 아들을 붙잡지 않는다. 30년 동안 걸음을 하지 않는 아들이지만, 아들의 물건을 한 방에 모아 놓고 언젠가 올 것이라고 믿는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토토는 "고향에 오는 것이 두려웠다"고 이제야 비로소 어머니에게 고백한다. '나는 강하다. 모두 잊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토토지만 결국 한 번도 이 곳을 떠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30년 동안 오지 않은 아들에 대해 원망할 법도 하지만 어머니는 그저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안정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헤어짐과 떠남을 경험한다. 사람 혹은 사물로부터의 떠남이 나의 뜻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확인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키가 자라는지도 모르겠다.

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던 어머니가 아들이 온 것을 알고 문을 열어 주러 나갈 때, 뜨개 바늘이 바닥에 떨어져 딸려 가면서 짜놓았던 옷에서 실이 주루룩 풀린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는 인연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한 올 한 올 짜나가다가 어느 순간 주루룩 풀려버리기도 하는.

알프레도와 어머니가 토토를 떠나보낸 마음은 바로 사랑이 아니었을까. 토토는 30년 세월을 떠나와서야 그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에게 인생이란 어쩜 떠나야 이를 수 있는 곳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네마 천국 Cinema Paradiso /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 / 출연 필립 느와레, 쟈크 페랭, 살바토레 카시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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