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태우고 갈 버스는 정말 올까?

영화 속의 노년(37) - <판타스틱 소녀백서>

등록 2002.07.11 16:23수정 2002.07.1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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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여덟 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니드와 레베카.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두 여자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각자 집에서 독립해서 같이 살기로 했지만 돈 버는 일은 어렵기만 하고 이도 저도 시큰둥하다.

대학에 가든지, 낮에 일하면서 밤에 공부를 하든지 다 좋지 않겠느냐는 아빠의 이야기도 이니드의 귀에는 통 들어오지 않는다. 인생에 별다른 꿈이나 계획이 없다. 이니드와 레베카는 만나서 남자 동창 조쉬를 골탕 먹이거나 신문 구인 광고란을 보고 장난 전화를 걸기도 하면서 그냥 저냥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장난 전화를 통해 40대 미혼 아저씨 시모어를 알게 된다. 오래 된 레코드판을 모으면서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도 않고, 허리뼈가 자주 삐끗해 허리에는 복대를 차고 있는 시모어. 이니드의 장난기는 호기심으로, 호기심은 호감으로 변하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에 이른다.

친구 레베카는 그래도 현실에 적응을 해서 커피점에서 일을 하지만, 매사가 시들하고 못마땅하고 흥이 나지 않는 이니드는 일자리를 구해도 만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다들 잘 살아가고 있을까….

이니드가 지나다니는 길에 2년 전에 폐쇄된 버스 정류장이 하나 있는데, 버스 정류장 벤치에는 늘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신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는 이니드의 말에도 노먼이라는 이름의 할아버지는 '네가 뭘 모른다'로 일관한다. 버스가 올 거라는 믿음으로 할아버지는 매일 한결같이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미술 아카데미 입학과 관련해 마음을 잡지만 자신의 뜻과는 달리 어그러져 버리고, 시모어와의 관계에서도 홍역을 치른 이니드. 문득 고개를 드니 놀랍게도 길 건너편에 버스가 와서 서고 노먼 할아버지가 그 버스를 타고 떠난다.

자신으로 인해 마음 상해 하다가 다쳐서 병원에 누운 시모어에게 인사를 마친 이니드는, 가방 하나 들고 폐쇄된 버스 정류장에서 이제는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불밝힌 버스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와 이니드를 태우고 멀어져 간다.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이라던 이니드는 그렇게 멀어져 간다.


내 인생에서 진정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그 곳으로 가기 위해 나는 무얼 했나, 무얼 하고 있나. 무엇이 나를 그 곳으로 데려다주는 걸까. 정말 나를 태우고 갈 버스는 올까? 어쩜 오래 전에, 아니 지금 막 그 버스가 떠나 버린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와 홀로 선 혜화동 로터리 버스 정류장. 끊임없이 버스가 도착했다가 출발한다. 내가 탈 버스가 오나 하고 고개를 내밀어 멀리 눈을 돌려본다. 내가 타고 갈 버스는 눈 앞에 와서 멈춰섰지만, 내 마음이 이리도 먼 곳을 보는 것은 왜일까.


내 인생에서 진정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를 다시 묻는다. 세상 속에 뿌리 내리고 살면서 그것은 정말 꿈인가. 가고 싶어하는 마음조차 생활 속에 묻어버리고 사는 내가 참 야속하다. 버스가 온다는 믿음 하나로 기다리고 앉아 있던 영화 속 할아버지는 그 기다림과 믿음으로 버스를 타고 떠났다. 이니드도 그랬다. 부럽다.

(판타스틱 소녀백서 Ghost World / 감독 테리 지고프 / 출연 도라 버치, 스칼렛 조핸슨, 스티브 부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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