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혁명가 쑨원은 왜 숭앙받나

<차이나 소프트-정치 2> 치우치지 않은 정치적 행보

등록 2002.07.12 19:01수정 2002.07.23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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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위에수공원의 중간 기념비 쑨원의 정치적 고향인 광저우에는 그의 정치적 발자취가 많다.
광저우 위에수공원의 중간 기념비쑨원의 정치적 고향인 광저우에는 그의 정치적 발자취가 많다.조창완
중국 근대사에서 극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몇사람이 있다. 청나라 말기 정권을 움직인 서태후도 있고, 청나라의 마지막 부흥을 꾀한 위안스카이(袁世凱)도 있고, 새로운 중국성립을 다른 방식으로 고민한 량치차오(梁啓超)나 캉요웨이(康有爲)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근세를 가장 잘 넘긴 이를 꼽으라면 누구라도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孫文)을 꼽을 것이다.

기자가 중국에서 만난 것 중에 가장 특이한 것은 쑨원에 대한 중국인들의 절대적인 사랑이다. 중국 대도시에 가면 빼놓고 만날 수 있는 곳이 하나있다. 바로 쑨원의 호에서 따온 ‘중산(中山)공원’. 왜 중국이 얻어맞는 문제를 해결해준 마오쩌둥이나 배고픔을 해결해준 덩샤오핑을 기념한 것이 아니라 쑨원을 기념하는 공원이 생겼을까.

이런 의문은 난징(南京)에 있는 중산릉에서 절정에 달한다. 묘의 중심지까지 반시간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도 규모지만 ‘중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의 묘를 전제주의 왕들의 묘를 지칭하는 릉(陵)이라고 부른 것도 특이하다.

이밖에도 쑨원의 고향인 샹산(香山)을 중산으로 바꾼 것을 비롯해 고향인 광둥(廣東)성의 성도인 광저우의 중산기념관과 비는 물론이고 상하이, 베이징의 그가 살았던 집은 잘 보존되어 숭배 분위기가 짙다.

베이징의 외곽에 있는 샹산(香山) 피윈스(碧雲寺)는 쑨원이 죽은 후 안치된 곳으로 유명해 모두 쑨원의 유산으로 채워져 있다. 산의 이름조차도 쑨원의 고향인 샹산으로 개명됐다. 또 2002년 봄 중앙텔레비전의 드라마를 비롯해 쑨원의 생애를 다룬 드라마가 심심치 않게 만들어진 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중국뿐만 아니라 대만도 쑨원을 정신적 지도자로 삼는다는 데 있다.

광둥성 중산에 위치한 쑨원의 옛집. 중국 건국의 아버지 답게 끝없이 관광객이 몰린다
광둥성 중산에 위치한 쑨원의 옛집.중국 건국의 아버지 답게 끝없이 관광객이 몰린다조창완
사실 기자는 쑨원이라는 인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혁명가적인 기질은 좋아하지만 그가 혁명을 이루기 위해 모색하던 다양한 방식을 보면 일본 등 외세의 힘을 빌어서 청 왕조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속성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 지향은 백범 김구과 이승만의 정치 행보를 복합해 놓은 것처럼 복잡하다. 혁명을 위해 투쟁할 때의 모습은 김구선생을 닮았지만, 일본은 물론이고 영국 등 외세를 빌려 자국에서 정치적 힘을 확보하려는 것은 이승만을 닮았기 때문이다.

쑨원 삶의 단편을 살펴보자. 그는 1866년 11월 광둥성 샹산(香山-현재의 중산(中山))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이 하와이에서 경제적으로 성공해 서구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그는 서서히 혁명가의 기질을 갖기 시작했고, 마을사람들이 미신으로 숭배하는 북제묘(北帝廟)와 신상(神像)을 파괴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쑨원은 이후 의학을 배워 의사로서 명성을 높였다. 그가 혼란에 빠진 중국 정치계에 이름을 올린 것은 1896년 10월 런던 ‘청나라공사관 감금사건’ 때문이다. 그는 전해 광저우(廣州)에서 봉기를 일으키다가 실패해 미국을 거쳐 영국에 갔다가 스스로 청나라 공사관으로 들어가 갇히는 꼴이 된다. 다행히 컨트리 경의 구명운동과 ‘더 글로브’지가 ‘중국 혁명가가 런던에서 유괴, 공사관에 감금되다’는 특종을 터트리는 바람에 석방되어 편안하게 서구사상을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됐다. 1894년에는 하와이로 건너가 중국 부흥을 의미하는 흥중회(興中會)를 건립하는 등 수차례 중국 부흥을 기도했다. 이후에 다시 중국에 돌아가 앞에서 말한 봉기를 일으키다가 실패, 감금, 석방을 거듭하면서 명사가 됐다.

쑨원이 사망한 후 안치되었던 샹산 피윈스 그의 시신은 난징 중산릉으로 떠났지만 레닌이 보낸 관등이 전시되어 있다.
쑨원이 사망한 후 안치되었던 샹산 피윈스그의 시신은 난징 중산릉으로 떠났지만 레닌이 보낸 관등이 전시되어 있다.조창완
그는 런던 공부중에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구상했다. 삼민주의는 중국을 천년의 전제에서 해방하고, 만주족의 지배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민족과 민권, 민생, 이 세가지를 혁명을 통해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혁명의 동지로 일본을 상당히 중시했다. 그는 일본인 들과 합작해 다시 봉기를 준비하고, 보황파(保皇派-청조를 옹호하면서 그 체제 속에서 개혁을 하자는 파)인 캉요웨이(康有爲) 등과 접촉해 혁명을 모색하지만 서태후의 ‘무술정변’으로 인해 이 세력을 타격을 받고, 모두 쫓기는 신세가 된다. 1900년 쑨원은 청나라 거물 리훙장(李洪長)과 합작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홍장이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되어 올라가는 바람에 혁명이 실패한다. 그는 다시 세를 모아 후이저우(惠州)를 기점으로 무력봉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일본의 지원철회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에 그는 여러 가지 노력을 하다가 1905년 일본으로 들어가 8천명에 이르는 유학생들을 천천히 규합한다. 그는 일본 유학생 세력과 힘을 규합해 ‘중국혁명 동맹회’를 만들고, 각종 홍보활동과 조직활동을 서두른다. 또 먼저 귀국한 이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킨다. 하지만 번번히 실패한다. 1911년 10차 봉기인 황화강(黃花岡) 봉기가 실패하지만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쑨원의 이름은 높아간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중국은 급속히 변혁의 시대에 들어간다. 이때 국제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쑨원은 1911년 크리스마스날 상하이에 돌아옴으로써 화려하게 중국 정치의 전면에 자리한다. 청조의 몰락은 이제 불을 보듯 뻔했지만 그 역시 중국을 삼키려는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움직임도 기민했다.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 초상
중국 건국의 아버지 쑨원 초상조창완
이 와중에 쑨원은 상하이에 도착한 지 4일 후인 12월 29일 난징에서 열린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로 대총통에 당선된다. 1912년 1월 1일에 쑨원을 대통령으로한 중화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베이징에서는 연일 비상회의가 열렸고 실질적인 권력자였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혁명군과 협의하에 청조를 몰락시키고, 대신에 쑨원으로부터 임시대총통직을 물려받았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선거에서 승리한 국민당의 당수 쑹자오런(宋敎仁)을 암살하고 다시 황제로 등극하려는 야심을 보였다. 쑨원은 다시 봉기를 일으켰지만 실패해 일본으로 망명했다.

쑨원은 일본과 중국에서 새로운 세 모으기를 지속했고, 장쩨스(蔣介石) 등이 이 모임에 참여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의 야망은 지속될 수 없었다. 광둥 등 남방에서 몰고간 반원(反袁)은 확장됐고, 그의 지지자였던 군벌(軍閥)들이 하나둘 손을 놓자 위안스카이는 절망했고, 1916년 6월 5일 숨을 거둔다. 쑨원은 다시 힘을 모았지만 차츰 각 지역에서 군림하던 군벌의 성장으로 인해 좌절할 즈음인 1919년 ‘5.4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중국에 대한 야심을 불태우던 일본에 대한 경계심도 커갔다. 하지만 쑨원에게는 정치적으로 여전히 어려움이 계속됐다. 그는 국민당은 물론이고 공산당 장교들의 토대가 된 황포군관학교를 세워 힘을 모았다. 학교 내부는 국민당의 실질적 지휘자인 장쩨스가 주역이었지만 서서히 발원하는 공산당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쑨원은 부인 쑹칭링(宋慶齡)등과 더불어 일본 국민에 불평등한 조약을 직접 호소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고, 베이징도 방문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 지병이 악화됐고, 1925년 3월 12일 간장암으로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그는 시양산 삐윈스에 안치되어 있다가, 1926년 6월 1일 난징 중산릉으로 무덤을 옮겼다. 그는 결국 중국 통일의 꿈을 이루자 죽게 된 것이다.

쑨원의 인생은 위와 같이 실패로 거듭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대만은 물론이고 공산중국에서도 영웅이 된 것은 공산당과 국민당 어디에도 확실한 지지를 남기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거기에 새로운 중국 수립에는 맨몸으로 중국 건국을 끌어가던 쑨원의 정치적 자산이 필요했다. 결국 서로 쑨원이 자신들의 정치 사상을 지지한다고 믿은 두 세력은 각각의 쑨원을 만들어냈다. 쑨원은 동서인 짱제스와 의견이 맞았지만, 국민당과 연계된 서구 제국주의 세력이 중국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소련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수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군벌 뒤에 제국주의가 있다는 것과, 인민들과 단결하여 반제(反帝)·반군벌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러시아혁명을 본받아 국민당을 개조한 뒤,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 노동자·농민과의 결속을 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는 죽음 직전까지 정확한 정치적 입장을 피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당도 그를 추앙했다. 사망 당시 국민당이 장례를 준비했지만, 레닌이 그를 위해 관(棺)을 보내는 등 예우한 것만 봐도 그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의 부인인 쑹칭링이 그가 사망후 국공합작을 이끌고, 항일전쟁을 선도한 후 공산중국의 성립후 역할이 지대해진데다 국민에게 덕망이 높아 중국에서 쑨원의 위상도 그 만큼 커졌다. 살아 생전에 쑨원은 별다른 영화를 누리지 못했지만 그는 죽어서 ‘중산능’이라는 절대 군주시대의 묘명(墓名)을 갖는 등 ‘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숭앙받았다.

쑨원은 근대 중국의 가장 풍운아였고, 흥미로운 삶을 살았다. 그는 수십차례의 봉기를 벌였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 봉기로 인해 처형된 동지의 숫자만해도 엄청나다. 그가 삼민주의를 주창했지만 그의 국제관계는 일본에 가서 일본인들에게 동정을 구할 만큼 둔감했다. 그가 동정을 구하려 했던 일본인들은 그가 난징에 묻힌 후 약 10년뒤인 1937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난징과 부근에서 35만명 가량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의 국제정세에 대한 감각은 그토록 미약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여전히 빛난다. 중국인들에게 그는 영원한 혁명가이고, 중국 성립의 투쟁철학을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그는 한족(漢族)의 중국이 지속되는 한 영원히 ‘건국의 아버지’로 숭앙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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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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