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동안의 방학, 그 '자유' 선언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

등록 2002.07.21 16:22수정 2002.07.2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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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선언을 했습니다. 학기말 고사가 끝나자마자 취업반과 진학반으로 나뉘어져 서로 떨어져 생활하던 아이들이 방학선언식을 하기 위해 오랜만에 한 교실에 모였습니다. 취업반 아이들은 이제 곧 취업 현장으로 떠나게 됩니다. 만나서 기쁘지만 곧 먼 곳으로 떠나갈 아이들이 자꾸만 마음에 밟힙니다.

그런가 하면 진학반 아이들도 방학을 맞아 한 달 동안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한데, 아이들은 그런 내색조차 않습니다. 한 달 동안의 자유가 좋기만 한 모양입니다.

'한 달 동안의 자유'가 아이들에게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실업계 학교지만 실제로 대학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이 대다수인데 다른 인문계 학교처럼 방학중에도 보충수업을 해야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저는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상급관청에서 내려온 공문대로 희망자에 한해서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 반이 만들어졌습니다. 기간은 여름철의 무더위와 학교에 난방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해서 하루 4시간씩 10일 40시간으로 정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순순히 일이 진행된 것은 저희 학교가 실업계 학교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저희 학교도 학생들의 희망 여부와는 상관없이 거의 전체 학생을 강제적으로 방과후 교육활동, 혹은 특기적성교육에 참여시킨 적도 있습니다.

인근 실업계 학교에서 그렇게 하고 있으니 우리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식의 논리는 반박할 수 있었지만, 인문계에 비해 기초가 부족한 아이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지 않느냐는 말에는 슬그머니 마음을 놓고 말았던 것입니다.

겨울철에는 '팝송 영어' '스크린 영어' 등의 과목을 설강하여, 직접 교실로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강의 계획을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담임교사에게 부탁하면 자칫 강요가 될지도 몰라 제가 직접 나선 것입니다. 수익자 부담 원칙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에는 공부에 열의가 부족한 아이들을 일일이 만나고 설득하여 겨울 방학 한 달 내내 무료로 영어 수업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무료 수강이라고 해도 개인적인 의사를 존중하여 최종적인 결정은 본인 스스로 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철에는 전면 휴업을 선언합니다. 겨울철에는 소박한 난로 하나면 따뜻한 공간 속에서 큰 어려움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여름철은 상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냉방설비가 되어 있지 않은 교실에서 선풍기 몇 대에 의존하여 수업을 하다보면 수업의 효과를 기대한다는 것이 우스운 얘기가 되고 맙니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폭염에, 아이들의 몸에서 발산되는 뜨거운 체온의 열기가 더해져 교실은 말 그대로 찜통이 되고 맙니다.

그런 이유도 이유지만, 해마다 방학을 이용하여 자연과 여행지 그리고 도서관에서 더 큰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저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방학을 아이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름 방학이면 가까운 야산을 찾아 큰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깔고 앉아 배가 고파올 때까지 <헷세>나 <톨스토이>를 탐독하고는 마음인지 영혼이지 모를 저 깊은 곳이 한껏 투명해져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던 까까중 머리 소년의 모습이.


어느 핸가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오후 늦게까지 책을 보다가 잠을 자다가 하면서 몸의 휴식을 취했다가 저녁 무렵이 되자 무작정 길을 나섰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까지 하얀 새벽길을 걸어 저는 혼자만의 도보여행을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달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달맞이꽃이 밤에만 핀다는 말이 누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저녁이면 집 근처를 자주 산책하곤 합니다. 그 시간이 제겐 더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입니다. 학창시절, 방학의 자유가 저에게 준 아름다운 선물인 셈입니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황금보다도 더 값비싼.

방학은 아이들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독일은 방학 동안 숙제를 내주는 교사를 징계한다고 하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큰 그림을 그리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일 거라고 미루어 짐작이 됩니다. 사람이 공부를 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행복에 있습니다. 좀더 고상한 이상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만인의 행복을 꿈꿀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행복을 추구하는 주체로서의 아이들을 생각하는 교사는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주체가 없으면 행복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최근에 모 인문고등학교에서 근무하시는 선생님 두 분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방학을 전후해서 흔히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기도 합니다.

"선생님 학교는 방학 때 보충수업 몇 시간이나 합니까?"
"1학년과 2학년은 100시간이고, 3학년은 120시간입니다."
"자율학습은요?'
"오후 6시까지 합니다."

"그럼 우리 학교가 더 심한 편이네요."
"몇 시간 하는데요?"
"전 학년이 다 120시간 합니다."
"자율학습은요?"
"6시 반까지 합니다."

이때 제가 끼어 들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아이들 방학은 며칠이나 됩니까?"
"사나흘 정도 되겠지요."
"지금도 보충수업을 특기적성이라는 이름으로 하지요?"
"그럼요. 이름이나 제대로 돌려놓았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에게 속보이지나 않게요."
"특기적성과목이 한 과목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다 입시과목이죠."

"보충수업을 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개인 사정이 있다고 빠지는 아이들은 없습니까? 예능 쪽에 관심이 있는 아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특기적성을 살려서 공부해야하잖아요?"
"담임에 따라 다르지만 거의 묵살하고 그냥 받으라고 하지요."
"그럼 그 아이는 자신의 특기적성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거 아닙니까? 더욱이 학교에서 특기적성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보충수업 때문에."
"그런 셈이지요."

"그런데 보충수업 끝나고 자율학습도 한다구요?"
"예."
"교실마다 냉방시설은 다 되어 있습니까?"
"선풍기뿐이지요."
"예? 그럼 에어콘 시설도 없이 자율학습을 한다구요?"
"그렇지 않아도 에어콘을 학급 반 아이 당 5만원씩 걷어서 사라고 해서 에어콘은 학교나 국가 예산으로 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따졌지요."

"냉방 시설이 없이 자율학습이 가능하긴 합니까? 수업은 주입식으로 하니까 그렇다 치고, 자율학습은 쾌적한 분위기에서 해야 효과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아이들이 불쌍한 거죠. 돈은 돈대로 내고."
"아니, 찜통 더위에 공부를 억지로 시키면서 자율학습비를 받는단 말씀입니까?"
"당연하죠, 수익자 부담인데요."
"아이들은 집에서 편히 공부할 수 있는 자유도 빼앗기고 돈은 돈대로 내는 셈이니 기가 막힐 일이네요."

"아이들이 도망가거나 그렇지는 않습니까?"
"날씨가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면 절반 정도는 안 나오지요. 수업만 하면 모르는데 오후 늦게까지 자율학습을 해야하니까 미리 안 나와 버리는 거죠."
"이건 거의 학대 수준이네요. 그리고 일종의 사기구요. 돈은 미리 받고 아이들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을 만들고. 그리고 특기적성이란 이름으로 실제로는 아이들이 스스로 특기를 살려 공부할 기회를 다 빼앗구요. 도대체 학교가 무슨 권리로 아이들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부나 교육관료 심지어는 우리 교사들에게마저 아이들에 대한 인권의식이 없는 것이 문제네요."
"지금 인권이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학부형들이 그런 사정을 알기나 합니까?"
"학부형들요? 학부형들이 더해요. 제 자식 죽는 줄은 모르고. 학부형들의 성화만 아니면 아이들을 생각해서 학교장에게 건의해 볼 만도 한데 그게 아닌 거예요. 학교장도 할 말이 생기는 것구요. 그런 얘기를 꺼내는 사람만 왕따가 되는 거지요."

"교육부나 교육관청에서는 이런 학교 사정을 알고 있을까요?"
"모를 리가 없지요. 그런데도 교육부는 시도 교육관청에 일임을 했다고 발을 빼고 있고, 교육청은 특기적성이 불법으로 자행되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구요."
"정말 큰 일입니다. 일반 선생님들 반응은 어떤가요?"
"글쎄요. 좌절 아니면 포기, 그런 거지요. 솔직히 돈이 더럽기도 하구요."
"……."

이것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아픈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되어 풀잎 같은 아이들이 산소 같은 학교에서 살게 될 날을 꿈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곧 질식사하고 말 것입니다. 아이들이 죽고 학교가 죽으면 이 사회의 도덕심과 정의감도 서서히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우선 자기 성찰의 능력을 지닌 교사들이 먼저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스러진 것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말입니다.

그런 아픈 소망을 안고 방학선언식이 있기 직전의 북새통 속에서도 저는 아이들에게 전할 한 통의 시와 편지를 준비했습니다. 방학이 되면 큰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잠을 자는 일로 절반은 허비할 것이 뻔한 아이들. 그것이 아이들만의 잘못은 아니기에 저는 당연히 교사로서 해야할 일을 생각하고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저에게 시와 편지를 받아도 별 감동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서 빨리 끝내주기나 했으면 하는 눈치입니다. 하지만 저는 아이들의 그런 표정에 기죽지 않습니다. 혼자라도 감동에 젖어 시를 읽고 맙니다. 진실은 진실끼리 통하고 풀잎은 풀잎끼리 만난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풀잎

거대한 포크레인이 파헤쳐 놓은
산더미 같은 황토흙 속으로
어떻게 뿌리 내릴 생각을 했을까?
처음에는 한 두 점 드문드문 보이더니
오늘 아침 녹색 천지를 이루어 놓았다

출근길 나는 생각한다
풀의 눈물, 공포, 그 속에 비친 이슬만큼의 희망
낮은 포복으로 한 올 한 올 제 다리를 엮은
뿌리의 노곤한 삶, 기나긴 노동
그 끝에 불어오는 감미로운 바람, 비
동지들을 모아 뿌리를 북돋는....

아이들아, 굳은 땅을 연약한 머리로 받아 이고
나오는 건 오기가 아니구나, 자랑도 아니구나
황폐한 땅, 초록으로 서 있어야 하는 사명이구나
내 것 버려 남 섬기려는 사랑이구나
온 대지가 숨죽이는 역사구나, 일이구나.


방학입니다. 답답한 일상과 학교의 울타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학!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을 마음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방학! 언젠가 읽고 싶었지만 학교 공부 때문에 접어두어야 했던 만만치 않은 분량의 장편소설을 겁 없이 읽을 수 있는 방학! 다음날 등교시간을 걱정하지 않고 밤을 꼬박 새워 나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는 방학! 우리에게 가장 큰 스승인 자연을 찾아 나설 수 있는 방학! 부족한 기초를 튼튼히 해서 재미없던 수업을 재미있는 수업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방학!

풀잎은 처음부터 온 대지를 파랗게 덮지는 못합니다. '처음에는 한 두 점 드문드문 보이'다가 끝내는 '녹색 천지를 이루어 놓'고 맙니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할 때는 두려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풀의 눈물, 공포, 그 속에 비친 이슬만큼의 희망'의 과정을 거쳐 '그 끝에 불어오는 감미로운 바람, 비'를 만나기도 하고 '동지들을 모아 뿌리를 북돋는.' 아름다운 일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진실한 목적이 세워지고 천천히 가더라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끝내 종착역은 눈에 보여지기 마련입니다.

중학교부터만 세어도 다섯 번째 방학입니다. 이번만은 후회없는 방학이 되었으면 합니다. 방학이 끝나면 선생님이 물어볼 것입니다. 방학 잘 지냈는지를. "잠만 잤어요" 이런 대답을 듣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름대로 의미 있게 보냈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를 원합니다. 선생님도 그런 방학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그렇다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건강에 유의하구요. 그럼, 우리 학급 등교일인 8월 9일에 만나요. 잠시 안녕!

2002. 7. 20.
사랑하는 마흔 명의 딸들에게 담임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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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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