삣쭉삣쭉 봉림삣죽, 아직 살고 있을까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5> 북채밭

등록 2002.09.03 13:02수정 2002.09.09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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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따가운 가을햇살을 기다리고 있는 감

따가운 가을햇살을 기다리고 있는 감 ⓒ 이종찬

"봉림삣죽이 나타났다아~"
"튀어, 얼른. 붙잡힜다카모 골로 간다 카이."
"저승사자가 따로 없다카이."


그랬다. 우리들의 중학시절을 내내 지배한 이름이 봉림삣죽과 북채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이 다니는 중학교는 반드시 그 봉림삣쭉이라는 택호를 가진 그 어르신이 주인인 그 북채밭을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북채밭을 지나지 않고 중학교에 가려면 10km 남짓한 상남시장을 돌아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겨우 사람 한 명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난 북채밭 곁의 그 길은 일종의 지름길이었던 셈이었다.

그래, 그 북채밭에는 10년생 이상 된 큰 감나무들이 많았다. 그리고 어른 주먹만한 굵은 감들이 해마다 주렁주렁 달렸다. 말하자면 북채밭은 감나무 아래 야채를 약간 심어 놓은 그런 밭이었을 뿐, 실제로는 감나무 과수원이었다.

그 북채밭의 감나무들은 원채 씨알 굵은 감들이 많이 달렸다. 그러다 보니, 울타리 곁에 위치한 감나무에서 늘어진 가지가 탱자나무 울타리 밖으로 뻗어나와 누구나 손을 대기만 하면 큼직한 감을 쉬이 따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위험한(?) 일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 감을 바라보는 순간 봉림삣쭉의 그 째진, 그 험악한 눈동자가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또한 감을 별도로 따먹지 않아도, 미리 떨어지는 감들이 많아 발에 밟힐 정도였다.


우리는 늘 그 감을 주워 먹으며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주운 그 감도 도둑고양이처럼 몰래 숨어서 급히 먹어 치워야만 했다. 왜냐하면 봉림삣쭉은 우리가 주워 먹은 그 감이 저절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미리 떨어뜨려 놓은 것이라고 아예 단정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림삣쭉의 북채밭에는 감 이외에도 울타리에 노랗게 박힌 황금빛 탱자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언뜻 보면 달디 단 감귤이 달린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감보다도 그 탱자에 관심이 더 많았다. 왜냐하면 감은 우리 마을에 있는 가구마다 대부분 한두 그루씩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그 노오란 탱자를 입으로 깨물 때 혀끝에서 느껴지는 그 쓰리한 맛을 좋아했다. 그리고 탱자를 반으로 쪼개면 마치 감귤처럼 노랗게 갈라지면서 코 끝으로 달겨들는 그 쓰리하면서도 달착지근한 그 맛, 그 노오란 속내를 한입 넣으면 양 귓볼 아래 턱에서부터 밀려오는 그 얼얼한 그 맛을 감홍시보다 더 좋아했다.

그랬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를 파하고 그 쓰리하면서도 달착지근한 탱자가 점점이 박혀 있는 북채밭을 마악 돌아나올 때였다. 봉림삣쭉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을 감시하느라 그 독사 같은 눈알을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를 뚫고 마구 굴리고 있을 때였다.

"푸다다다닥!"
갑자기 무지개빛 꼬리를 가진 장끼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와 동시에 잘 익어가고 있던 감이 몇 개 우리 머리 위로 투두둑 떨어졌다.
"아야! 아야야!"
아직 홍시가 되지 않은 딱딱한 감들은 돌멩이를 맞은 듯 아팠다. 하지만 아무도 그 감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이 일에 대한 봉림삣쭉의 눈치만 살펴볼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봉림삣쭉이 험악한 얼굴로 우리들을 째려보면서 그 감들을 모두 주워오라는 것이었다. 즉 너희들이 장끼를 놀라게 하여 감이 떨어졌으니, 너희들이 그 감도 주워오고 그 장끼도 잡아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끼를 잡는 일은 어린 너희들로서 쉬운 일이 아니니, 당분간 말미를 주겠다고 했다.

기가 찰 일이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떨어진 감과 이미 떨어져 있던 감들을 모두 주워 봉림삣쭉에게 갖다바친 뒤, 장끼를 잡겠다는 약속 아래 학교가 파하기만 하면 봉림삣쭉의 북채밭을 지켜줄 수밖에 없었다.

장끼도 봉림삣쭉의 꿩 먹고 알먹고의 속셈을 알았는지 두 번 다시 북채밭으로 날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그해 가을 내내 학교가 파하면 봉림삣쭉의 북채밭에 달린 굵은 감뿐만이 아니라 떨어진 감까지 모두 안전하게 지켜줄 수밖에 없었다. 간혹 봉림삣쭉이 한숨을 포옥 내쉬며 던져주는 그 쓰리하면서도 달착지근한 탱자를 깨물면서.

a 잘 익어가고 있는 감

잘 익어가고 있는 감 ⓒ 이종찬

하지만 우리들의 아버지, 어머니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봉림삣쭉에게 딴지를 거는 어르신이 없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한결같이 봉림삣쭉에게 말을 건다는 것, 그 자체를 아예 싫어했다. 그만큼 봉림삣쭉은 독불장군이자 마을에서 아무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외톨이였다.

하긴 오죽 했으면 봉림삣쭉이란 택호까지 지어졌었겠는가. 뒤에 어른이 되어서야 안 일이었지만 봉림삣쭉은 마산 해변가 근처 봉림이라는 마을에서 쫓겨나, 우리 마을로 이사를 왔다고 했다. 그리고 부모의 재산으로 우리 마을과 학교를 이어주는 길목에 있는 그 북채밭을 사 들였던 것이다.

삣쭉이란 택호가 붙게 된 것도 "봉림에서 삣쭉거리며 우리 마을로 들어와 우리 마을에서도 내내 삐쭉거리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삣쭉이란 예로부터 우리 마을 어르신들이 질투와 욕심이 넘치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일종의 훈장이었다. 아예 삣쭉이라고 표시를 해놓아 혹 다른 사람이 피해를 당하지 않게 하자는 그런 뜻이 숨어 있다고 했다.

북채밭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북채밭이라고 부르는 봉림삣쭉의 과수원은 북쪽이 아니라 서쪽에 있었다. 또한 과수원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북채밭이라고 마을 사람들이 이름 지었던 것은 봉림삣쭉의 행실을 보아 '북쪽 오랑캐' 같고, '그 오랑캐가 가지고 있는 밭'이라는 그런 뜻이 숨어 있다고 했다. 밭 역시도 과수원의 낮춤말이라고 했다.

"삣쭉삣쭉! 봉림삣쭉! 삣쭉뺏쭉 봉림뺏쭉!"

북채밭과 봉림삣쭉은 우리 마을에서 자라는 모든 아이들의 동의어였다. 그리고 누구나 봉림삣쭉이라는 그 이름을 떠올리면 치를 떨었다. 또 마을 아이들은 멀리서 그 봉림삣쭉이 나타나기만 하면 양 엄지손가락을 볼에 대고 빙빙 돌리며 "삣쭉삣쭉! 봉림삣쭉! 삣쭉뺏쭉 봉림뺏쭉!"이라고 놀려대다가 달아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름조차도 기억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니 아예 그 모습은 마치 연필로 썼다가 지우개로 지운 듯이 가물가물하게 지워져 버렸다. 지금 봉림삣쭉과 북채밭이 있던 그 자리에는 반듯반듯한 도로를 곁에 낀 2층 양옥집들만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아, 그 북채밭은 창원공단 조성으로 사라졌지만 그 봉림삣쭉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아직 이 세상에 살고나 있을까. 아니면 지금도 그 북채밭에서 발갛게 익어가고 있는 감들을 지켜보다가, 노오란 탱자를 던지며 그 긴 한숨을 포오옥 내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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