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수밭에서 꿈을 꾸었다

가을날, '시골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탄 사람들

등록 2002.09.30 20:51수정 2002.10.0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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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밭에 가 본 적이 있습니까.


내가 지니고 있는 수수밭의 기억이라면, 수수밭에 떨어진 호랑이가 엉덩이를 찔려 빨갛게 핏물이 들었다는 전설과, 초등학교 때 수수깡으로 목마나 안경 같은 걸 여름방학 과제로 만든 게 고작이었습니다.

물론 수수팥떡이란 걸 먹어보긴 했지만 그게 수수를 갈아서 만든 경단이란 건 들어서 알고만 있었지요.

a 호랑이 엉덩이를 찔러 빨갛게 물든 수숫대

호랑이 엉덩이를 찔러 빨갛게 물든 수숫대 ⓒ 이형덕

도시생활을 하다가 뜻한 바 있어 시골로 내려와 살거나, 아직 도시에 붙들려 있지만 시골살이에 뜻을 둔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웃 삼아 지내자는 모임인 '시골로 가는 마지막 기차'가 9월 28일 치악산 기슭의 소토골에서 1박 2일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사이버 상에서 글만 주고 받던 전국의 시골기차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이는 일이지요. 5월에 고추 심는 일을 마련하여 회원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해준 햇꿈님의 주선으로 이번엔 수수를 거두는 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말이 일이지, 마을 사람들 몇 사서 거두면 단박에 할 일을 웬간한 집 큰잔치 차림만큼한 일을 준비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고생에 비하면 그건 순전히 그리운 얼굴들 한자리에서 보자는 심상찮은 복안이 숨어 있었음이라.

'붉은 수수밭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알림글이 걸리고, 그 동안 얼굴도 모른 채 글만 주고 받던 시골기차 가족들이 여기저기서 호응의 답글들이 올라오며, 그 기다림의 날들은 소풍 가기 전의 설레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일흔 살을 넘기신 다정불심님께서 오시고는 싶은데 차편이 없어 고심하시자, 마침 같은 인천에 사시던 뜰님께서 함께 동행을 해주셨습니다.

"어찌나 설레던지, 전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애 먹었다구."
수수밭 일을 진두지휘하신 다정불심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동안 집 짓기에 대한 도움글을 들려주던 목향님께서는 동해에서 싱싱한 한치회를 잔뜩 싸들고 오시고, 인천 쪽의 다정불심님께서는 밴댕이젓을, 경남 고성의 은방울님께서는 알토란 같은 밤들을 싸들고 오셨으니, 일이 아니라 팔도잔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전국을 둘러보시며 5년 동안 집터를 찾고 있다는 산마루님께서는 부천서부터 버스로 달려 오셨고, 친구분을 만나러 오셨다가 좋은 데 가자고 엉겁결에 따라온 분도 계셨습니다.

글로만 대하던 분들이 하나, 둘 꼬리를 물고 찾아오시는 걸 볼 때마다 나라 안에 흩어져 있던 보부상들이 사발통문을 받고 한 자리로 모이던 옛 이야기를 머릿속에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좀 이르다 싶게 왔는데 막상 대여섯 분이 먼저 오셔서 부지런히 집 주변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노장이신 다정불심님의 지휘로 집 뒤편에 널려 있던 목재들과 잡초들을 정리하더니 당장 수수밭으로 올라갑니다. 원래는 막걸리부터 마시고 내일 밭일을 하려 했는데, 나이 지긋하신 분들부터 낫을 잡고 오르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a 말없이 손발이 척척맞는 농삿일은 우리의 뿌리를 일러줍니다

말없이 손발이 척척맞는 농삿일은 우리의 뿌리를 일러줍니다 ⓒ 이형덕

잘 익은 수수를 베어 모아두면, 뒤에 오는 분은 밑둥을 자르고, 또 그 뒤의 분들은 모아둔 수수를 한곳으로 쌓는 일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척척 손이 맞습니다.

천 평에 이르는 두 배미의 밭을 언제나 거두나 그저 사람 기다리면서 조금 하는 척만 하자던 일이 금세 진도가 나갑니다. 뒤늦게 오는 분들마다 낫을 들고 밭에 들어서니 수수밭의 긴 사래가 말끔히 벗겨져 나갑니다.

혼자서라면 힘든 건 둘째치고, 제 풀에 지겨워 지쳐 버릴 일이 여러 손으로 거드니 즐겁기만 합니다.

a 엄마와 함께 하는 수수밭을 아이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엄마와 함께 하는 수수밭을 아이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입니다 ⓒ 이형덕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 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새참으로 올라온 동동주 한 잔을 걸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옛날 유행가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습니다. 고개가 숙여지도록 잘 영근 수수알들을 거두며 저절로 풍성해지는 마음이야 말로 시골살이의 여유라는 걸 새삼 알게 됩니다. 한 알의 수수알이 수십, 수백의 알곡으로 거두어지는 여유와 풍성함을 바라보는 삶이 그를 닮을 건 당연한 일일 겝니다.

a 농삿일의 즐거움은 절반이 새참입니다

농삿일의 즐거움은 절반이 새참입니다 ⓒ 이형덕

잘 자란 수숫대는 일부러 남겨 놓으니 파란 하늘에 깃대처럼 우뚝 선 그걸 보며, 사람이든 곡식이든 옹골지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베어낸 수수를 비닐 하우스에 옮겨 놓고서야 일이 끝났는데, 날이 어두워지고 모기가 꾀어 한 배미 수수밭을 남겨 놓았습니다.

a 탐스럽게 영근 수수를 거두는 마음은 저절로 풍성해집니다

탐스럽게 영근 수수를 거두는 마음은 저절로 풍성해집니다 ⓒ 이형덕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아 주인이신 햇꿈님과 망아지님이 차려 놓은 저녁상을 받으니 벌써 일로 친숙해진 터라 따로 인사를 주고 받을 일도 없어졌습니다.

저녁을 먹고나서 이야기는 '시골살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이어졌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우리네 농사를 전업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생업을 따로 두고 여유롭게 시골생활을 누려 나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골살이의 대안을 찾을 것인지...

먼저 농과대학 교수이신 솔개님께서 유기농에 대한 제언이 있었고, 이를 토대로 생태환경자원과 관련지은 그린튜어를 생각해보자는 이유섭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또 이에 대하여 모처럼 여유있는 삶을 살자고 들어선 시골살이가 앞도 안 보이는 농사에 휘둘려지고 싶지 않다는 반론도 제기되었고, 생업을 따로 두거나, 도시생활에서 충분한 생활 대책을 마련한 뒤 시골로 들어가자는 등의 다양한 생각들이 나왔습니다.

결론도 없고, 정답도 없는 자유로운 방담이지만 노인과 강아지만 지킨다는 우리네 시골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자신과 가족의 삶을 뿌리박을 생각들을 다듬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밤이 늦도록 찾아오는 분들의 발걸음은 이어지고, 그때마다 모두 반기는 모습이 마치 명절날, 타지로 떠났던 형제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 같았습니다.

밤이 깊어서 새벽 세 시가 되도록 모두 자신이 시골에 자리잡던 고생담부터 내년 농삿일, 그리고 아직 도시에서 새로운 삶터를 찾는 이의 이야기까지 한데 어우러지니 하룻밤이 짧기만 합니다.

홍천에 땅을 마련하고 일터에서 퇴근하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간다는 토담지기님.
"그래도 그게 즐거운 걸 어쩝니까?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당장 병이 나고 말지요."

게시판에서는 수맥과 풍수라는 초미의 관심사를 놓고, 팽팽히 이견을 맞세우던 솔개님과 목향님도 마주앉아 정겹게 술잔을 주고 받으니 사람은 모름지기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사람 사는 맛이 나는가 봅니다.

구들을 놓고 황토로 바닥을 바른 방에는 어느 새 여성분들이 차지하여 찜질방이 되었는데 남자분들은 거실에서 한 이불을 펴고 누우니 이웃사촌이 바로 맞는 말입니다.

깜박 잠이 들었는가 했는데, 날이 밝기가 무섭게 재밌는 경상도 억양의 솔개님의 외침에 잠이 깨었습니다.

"와, 이리 춥노... 황토 찜질방이라카더니 순 사기 아잉교."
알고 보니, 간밤의 낙뢰 피해를 우려해 보일라 전기를 뽑아 놓은 탓이었습니다. 팔도 사투리가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한 이불을 덮고 잤으니 시골기차에는 그 고질적인 지역감정병도 얼씬도 못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잠에서 깨어났는데, 아침에는 결혼기념일을 맞아 여행을 떠났다가 일정을 줄이고 들르신 대화의 봄바람님과 늘보님, 그리고 애견 바다. 햇꿈님이 몸소 끓인 황태 해장국으로 속을 풀고 별꽃님과 햇꿈님이 은밀히 준비한 케이크에 불이 켜지는데, 봄바람님과 늘보님, 샘물님과 바다님의 결혼기념 축하 잔치가 펼쳐졌습니다. 웃음꽃 이야기꽃으로 1박 2일의 모임은 꿈결처럼 지나가고, 하나 둘 각자의 삶터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간밤에 비로 발이 빠지고 수숫대가 젖어서 남아 있는 밭일을 마저 하지는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정작 아쉬웠던 것은 하룻밤 잠깐 보았던 이웃사촌들과 헤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서로 손을 붙들고, 어깨를 끌어안고, 아직도 지난 밤에 얼핏 들었던 마흔여명에 가까운 글이름들을 더듬으며, 다음 모임에 만날 날을 벌써부터 기대해 봅니다.

내년 여름에는 고성 바닷가로 오라는 은방울님의 이야기에 벌써 손가락을 꼽게 되는 이 마음이야 말로 시골기차를 달려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10월 19일 수사모가 마련하는 수동에서의 반디 음악회에 또 만나자고 손을 흔들며 돌아서지만 그 아쉬움은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요즘 기차는 디젤로 달리지만 옛날 기차는 빼액 하고, 증기로 달렸거든. 그런데 이 시골기차는 바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좋은 이야기 나누는, 그런 힘으로 달리는 거야."

이번 수수밭 모임의 감독관을 자처하셨던 다정불심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인연도 없던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잠깐 함께 한 시간이지만, 이리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무런 이해 관계없이 시골살이라는 꿈을 함께 꾸고 있는 때문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전원생활이나 시골살이를 주제로 한 모임이 한둘은 아니지만 잡지사나 부동산업체, 건축업체 등의 상업적 모임을 비켜서서, 좌충우돌 몸으로 부딪치며 시골살이에 자리를 잡은 이들이 서투르지만 상업적으로 왜곡되지 않으며, 정말로 자신이 겪어낸 고생스런 시행착오들을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하나의 징검다리로 내주려는 시골기차의 마음은 흔치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지식도 모자라고, 휘황찬란한 글들이 아니더라도 그 동안 우리들이 잃어 버렸던 이웃들을 되찾으려는 이 작은 모임이 아직도 도시에 머무르며, 시골살이의 꿈을 꾸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아름다운 별자리로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깊어가는 가을날, 내가 수수밭에서 만난 것은 일이 아니라 아름다운 꿈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에 관련한 좀더 많은 이야기는 <시골로 가는 마지막 기차>
http://sigool.com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에 관련한 좀더 많은 이야기는 <시골로 가는 마지막 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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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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