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스럽게 영근 수수를 거두는 마음은 저절로 풍성해집니다 이형덕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아 주인이신 햇꿈님과 망아지님이 차려 놓은 저녁상을 받으니 벌써 일로 친숙해진 터라 따로 인사를 주고 받을 일도 없어졌습니다.
저녁을 먹고나서 이야기는 '시골살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이어졌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 우리네 농사를 전업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생업을 따로 두고 여유롭게 시골생활을 누려 나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골살이의 대안을 찾을 것인지...
먼저 농과대학 교수이신 솔개님께서 유기농에 대한 제언이 있었고, 이를 토대로 생태환경자원과 관련지은 그린튜어를 생각해보자는 이유섭님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또 이에 대하여 모처럼 여유있는 삶을 살자고 들어선 시골살이가 앞도 안 보이는 농사에 휘둘려지고 싶지 않다는 반론도 제기되었고, 생업을 따로 두거나, 도시생활에서 충분한 생활 대책을 마련한 뒤 시골로 들어가자는 등의 다양한 생각들이 나왔습니다.
결론도 없고, 정답도 없는 자유로운 방담이지만 노인과 강아지만 지킨다는 우리네 시골에서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자신과 가족의 삶을 뿌리박을 생각들을 다듬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밤이 늦도록 찾아오는 분들의 발걸음은 이어지고, 그때마다 모두 반기는 모습이 마치 명절날, 타지로 떠났던 형제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 같았습니다.
밤이 깊어서 새벽 세 시가 되도록 모두 자신이 시골에 자리잡던 고생담부터 내년 농삿일, 그리고 아직 도시에서 새로운 삶터를 찾는 이의 이야기까지 한데 어우러지니 하룻밤이 짧기만 합니다.
홍천에 땅을 마련하고 일터에서 퇴근하자마자 그곳으로 달려간다는 토담지기님.
"그래도 그게 즐거운 걸 어쩝니까?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당장 병이 나고 말지요."
게시판에서는 수맥과 풍수라는 초미의 관심사를 놓고, 팽팽히 이견을 맞세우던 솔개님과 목향님도 마주앉아 정겹게 술잔을 주고 받으니 사람은 모름지기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사람 사는 맛이 나는가 봅니다.
구들을 놓고 황토로 바닥을 바른 방에는 어느 새 여성분들이 차지하여 찜질방이 되었는데 남자분들은 거실에서 한 이불을 펴고 누우니 이웃사촌이 바로 맞는 말입니다.
깜박 잠이 들었는가 했는데, 날이 밝기가 무섭게 재밌는 경상도 억양의 솔개님의 외침에 잠이 깨었습니다.
"와, 이리 춥노... 황토 찜질방이라카더니 순 사기 아잉교."
알고 보니, 간밤의 낙뢰 피해를 우려해 보일라 전기를 뽑아 놓은 탓이었습니다. 팔도 사투리가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한 이불을 덮고 잤으니 시골기차에는 그 고질적인 지역감정병도 얼씬도 못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잠에서 깨어났는데, 아침에는 결혼기념일을 맞아 여행을 떠났다가 일정을 줄이고 들르신 대화의 봄바람님과 늘보님, 그리고 애견 바다. 햇꿈님이 몸소 끓인 황태 해장국으로 속을 풀고 별꽃님과 햇꿈님이 은밀히 준비한 케이크에 불이 켜지는데, 봄바람님과 늘보님, 샘물님과 바다님의 결혼기념 축하 잔치가 펼쳐졌습니다. 웃음꽃 이야기꽃으로 1박 2일의 모임은 꿈결처럼 지나가고, 하나 둘 각자의 삶터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습니다.
간밤에 비로 발이 빠지고 수숫대가 젖어서 남아 있는 밭일을 마저 하지는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정작 아쉬웠던 것은 하룻밤 잠깐 보았던 이웃사촌들과 헤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서로 손을 붙들고, 어깨를 끌어안고, 아직도 지난 밤에 얼핏 들었던 마흔여명에 가까운 글이름들을 더듬으며, 다음 모임에 만날 날을 벌써부터 기대해 봅니다.
내년 여름에는 고성 바닷가로 오라는 은방울님의 이야기에 벌써 손가락을 꼽게 되는 이 마음이야 말로 시골기차를 달려가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10월 19일 수사모가 마련하는 수동에서의 반디 음악회에 또 만나자고 손을 흔들며 돌아서지만 그 아쉬움은 오래도록 남아 있습니다.
"요즘 기차는 디젤로 달리지만 옛날 기차는 빼액 하고, 증기로 달렸거든. 그런데 이 시골기차는 바로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좋은 이야기 나누는, 그런 힘으로 달리는 거야."
이번 수수밭 모임의 감독관을 자처하셨던 다정불심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인연도 없던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잠깐 함께 한 시간이지만, 이리도 진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아무런 이해 관계없이 시골살이라는 꿈을 함께 꾸고 있는 때문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전원생활이나 시골살이를 주제로 한 모임이 한둘은 아니지만 잡지사나 부동산업체, 건축업체 등의 상업적 모임을 비켜서서, 좌충우돌 몸으로 부딪치며 시골살이에 자리를 잡은 이들이 서투르지만 상업적으로 왜곡되지 않으며, 정말로 자신이 겪어낸 고생스런 시행착오들을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하나의 징검다리로 내주려는 시골기차의 마음은 흔치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전문적인 지식도 모자라고, 휘황찬란한 글들이 아니더라도 그 동안 우리들이 잃어 버렸던 이웃들을 되찾으려는 이 작은 모임이 아직도 도시에 머무르며, 시골살이의 꿈을 꾸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아름다운 별자리로 길잡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깊어가는 가을날, 내가 수수밭에서 만난 것은 일이 아니라 아름다운 꿈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에 관련한 좀더 많은 이야기는 <시골로 가는 마지막 기차>
http://sigool.com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