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현실에서 만들어진 문학 작품

<차이나소프트-문학 2> 중국 문학의 '수도' 창지앙

등록 2002.10.04 14:24수정 2002.10.0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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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가 청두시절을 보낸 초당
두보가 청두시절을 보낸 초당조창완
중년 여성의 부조리한 삶을 다룬 문제작 <여인 사십>(1995)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쉬안화(許鞍華) 감독의 작품인 <남자 사십>(2001)은 영화의 전면에 창지앙(長江)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물론 단순한 강만이 아닌 창지앙의 역사와 그 창지앙이 안고 있는 한시들이 가장 주된 소재로 사용된다. 하지만 한시가 사용된 배경이 중국으로 반환되어 삶의 정체성이 흔들리는 홍콩인들의 정신적 고향을 찾아가는 데 사용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여인사십>(女人四十)과 대구를 이룬 이 영화는 중년남자로 살아가는 것의 애련과 갈등을 잘 풀어냈다. 아무 것에도 혹하지 않아야 한다는(不惑) 나이인 그에게 모든 것에 순종하면서 살아온 그의 인생은 근대이후 서구 제국주의 국가와 중국이라는 거대한 굴레에 끼여서 지내온 홍콩의 현상을 잘 설명한다.

그런 그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질 선으로 창지앙과 한시로 삼았다는 점은 쉬안화의 낭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의 전반은 주인공 린야오궈(林耀國)의 상상 속에서 전개되는 창지앙(長江 양쯔강)의 유장한 모습과 더불어 이백, 두보의 시가 유연하게 전개되면서 관객의 지나친 몰입을 막는 한편 시간과 공간에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왜 그녀가 창지앙을 영화의 뿌리에 두고, 마음을 대입했을까. 그 답은 창지앙이 중국 시의 고향이라는 데 있다.

정치적 수도는 장안, 문학의 수도는 창지앙


누런 강물이 인상적인 산샤
누런 강물이 인상적인 산샤조창완
깊은 황토빛 협곡과 중국의 젓줄인 황허(黃河)가 인상적인 섬베이(陝北)는 사실 사람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땅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바로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秦)왕조가 탄생했고, 중국 문화를 가장 번성시켰다는 당(唐)왕조도 이곳에 기반을 두고 있다.

626년 권좌에 오른 당 태종 이세민은 주변 국가를 통합시키며 20년 동안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뤘다. 당태종이 세운 기반은 중국 역사상 가장 빼어난 문화라는 당문화의 기초가 됐다.


태종 이후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지배하던 혼란의 시기를 지나고 현종(玄宗)이 즉위하면서 당 문화는 더욱 발전한다. 45년(712∼756)에 이르는 현종의 치세는 뒤에 양귀비로 인한 혼란과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면서 위기를 맞는다.

가을은 시안 쪽에서도 드물게 맑게 갠 날을 볼 수 있는 계절이다. 특히 중국의 대표적인 사과의 산지이자 어른 주먹보다 큰 석류가 맛있게 익은 초가을은 시안 등 당나라의 고도인 장안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금은 시안에 편입된 장안(長安 현재는 셴양(咸陽)은 사실 거대한 규모의 빙마용 등을 제외하고 나에게 그리 인상적인 여행지가 아니다. 하지만 빙마용과 더불어 당나라 문인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이곳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하는 가장 큰 매력이다.

당나라 수도는 장안이었지만 그곳에서 당대의 문학과 문화를 느끼기는 쉽지 않다. 양귀비가 목욕했던 화칭츠(華淸池) 정도만이 빼어난 당대문학의 흔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시안에서 벗어나 서남향인 쓰촨으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행자는 당대 문인들의 풍모를 느낄 수 있다. 가장 먼저 만나야 하는 것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양귀비의 무덤이다.

시안에서 60k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양귀비의 무덤은 당시의 불안한 상황을 말해준다. 그녀에게는 "청초 우거진 곳에 자는 듯 누엇는다"라고 읊어줄 임제 같은 친구가 없었는지, 주변에는 잡문만 빛나 황량한 느낌을 준다.

고통을 '진주'로 바꾼 문인 두보

쿠이먼. 두보가 머문 쿠이저우의 표식이다
쿠이먼. 두보가 머문 쿠이저우의 표식이다조창완
양귀비 묘를 지나 청두를 가면 행자들은 창지앙의 윗 물줄기들과 더불어 문인들의 흔적을 만난다. 이곳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길을 나서면 창지앙을 타고서 스무날 이상은 옛 문인과 만날 수 있다. 바로 창지앙이 당나라는 물론이고 중국 문학의 수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지 지형으로 인해 많은 날이 짙은 안개 속에 묻혀 있는 쓰촨의 성도 청두(成都)를 가로지르는 깐허(干河)의 한쪽에는 시성(詩聖) 두보(杜甫 712~770)의 옛집이 있다. 두보는 말년 열두 해 동안 쓰촨을 중심으로 방랑하면서 고통 속에서 진주를 만들어내는 삶을 살았다.

그런 그에게 가장 안정적인 시간은 마흔 여덟부터 쉰까지 청두의 서쪽 교외인 완화계(浣花溪)에 초당을 짓고 살았던 시절이다. 지금도 두보초당으로 남아 있는 이곳에서 두보는 "따스한 강 정자에 편히 누워 / 길게 읊조리며 들을 바라보는 시절 / 물은 흘러가도 마음은 다투지 않고, 구름 머무르니 내 마음도 느긋하지"(坦腹江亭暖 長吟野望時 水流心不競 雲在意俱遲 '江亭' 중에서)라며 여유를 즐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이곳에서 유유자적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가 머물던 쓰촨에 765년에 내란이 일어나고 그는 배를 타고, 창지앙을 따라 길을 나선다.

그의 배는 과거 쓰촨의 일부였던 충칭(重慶)을 지나서 쿠이저우(夔州)라는 협곡에 멈춘다.

산샤댐의 건설로 상당 부분이 잠길 샤오산샤의 입구
산샤댐의 건설로 상당 부분이 잠길 샤오산샤의 입구조창완
지금은 충칭에서 출발한 고속정으로 5시간 정도면 닿지만 당시에는 거대한 물의 흐름에 배를 맡기고, 다시는 이 강을 거슬러 오르지 못할 거라는 불안한 상상 속에서 정처없는 길을 떠났을 것이다.

그가 '석양'(返照)이라는 시에서 "초왕궁 북쪽은 바야흐로 황혼 / 백제성 서쪽에 지나는 비의 흔적"이라고 시작해 전란의 상황을 묘사했던 시의 배경의 된 백제성은 지금은 강을 굽어보는 위치에서 지나는 배들을 굽어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여유도 머잖아 없어진다.

삼협댐이 건설되면 지금은 연결된 골짜기까지 물이 차고 백제성의 중반부 이상까지 물이 차서 어떤 곳은 배를 타야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백제성의 변화와 더불어 초나라 양왕(襄王)의 아름다운 로맨스도 그 깊이를 잃을 것이다.

양왕은 꿈속에 미녀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다. 그녀는 "나는 아침에 구름, 저녁에는 비"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 다음날 아침 양왕은 우산을 돌아보는데, 우산(巫山)의 산마루에 구름이 감돌아 그녀가 산의 정령임을 알았다.

전설과 역사가 살아있는 바이티청
전설과 역사가 살아있는 바이티청조창완
바이티청(白帝城) 아래 창지앙과 접안하는 곳에서 호객하는 배든, 여객선이든 아무 배나 잡아타면 1시간반여만에 양왕이 들렀다는 우산에 닿는다. 그 가는 길에 양옆에 거대하게 펼쳐진 이곳이 산샤의 북쪽 관문인 취탕샤(瞿塘峽)다.

우산은 역시 산샤(三峽)댐의 건설로 인해 머잖아 그 아름다움이 반감될 샤오산샤(小三峽)의 입구 마을이다. 이곳은 양왕의 전설뿐만 아니라 굴원의 '구가'(九歌) '산귀'(山鬼)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산귀에는 깊고 험준하기 그지없는 우산이 다정다감한 아가씨로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산샤 여행의 중심지였던 우산은 댐의 건설로 인해 도시를 지금보다 200m 가량 높은 산정상 부근으로 옮겼다. 안쪽 작은 마을 사람들은 후난이나 광둥, 안후이 등지로 뿔뿔이 이주했다. 전설 때문이 아니라도 이곳의 여인들은 전혀 꾸미지 않아도 눈에 띌 만한 미인이 많다. 전설은 결코 허무맹랑하게 생겨나지 않았다. 다만 그 아름다운을 돈 얼마에 여행객에 팔려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

두보는 쿠이저우에서의 생활을 1년만에 접고, 다시 창지앙 물에 몸을 맡긴다. 우산에서 조금 가다보면 파둥(巴東)에 닿는다. 중국 3대 미인 가운데 하나인 왕소군의 고향이자 후베이성 선농지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조금 더 가면 이제는 텅빈 굴원의 고향 즈구이(?歸)를 지난다. 두보는 이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병을 얻어 둥띵후(洞庭湖)에서 59세의 나이로 영면한다. 시성 두보를 만든 것은 성실한 그의 삶이었다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말한다.

그의 천성은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가련함을 표현하는 성실한 노력과 더불어 어느 곳이나 갖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문학적 텍스트로 변모시키는 힘이다. 거기에 그는 미물의 변화에서 계절의 변화는 물론이고 생명의 변화를 읽어내는 힘을 시속에 부여했다.

영원한 방랑객 시인 이백

최호의 시와 이백 등으로 유명한 우한 황학루
최호의 시와 이백 등으로 유명한 우한 황학루조창완
두보의 대구에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당연히 시선(詩仙) 이백(李白)을 꼽는다. 두보의 삶의 괘적이 장안에서 쓰촨을 거쳐서 창지앙의 중류까지 내려왔다면, 이백의 삶의 괘적은 상당부분 창지앙의 중하류에 머물고 있다. 물론 그는 출사를 위해 장안에 머물렀던 시간도 있고, 중국 전역이라고 할 만큼 많은 지역에 머물렀다. 하지만 창지앙과 중하류는 그의 흔적이 거쳐가지 않은 곳이 없다 할 만큼 그의 문학적 소재가 되어주었다.

창지앙 중류의 중심도시인 우한(武漢)에서 이백이 격찬한 최호(崔顥)의 시 '황학루'(黃鶴樓)의 무대가 된 곳이다.

"옛 사람 황학 타고 이미 가버려/ 땅에는 쓸쓸히 황학루만 남았네/ 한번 간 황학은 다시 오지 않고/ 흰 구름 천 년을 유유히 떠 있네"('황학루' 중에서)라는 시구에 이백이 동의한 것은 그가 쫓는 이상과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그는 도가(道家)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비해,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라고 보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우한에서 이제는 밋밋한 강줄기밖에 보이지 않는 창지앙 물길을 타고 한참 가면, 지우지앙(九江)에 닿는다. 이곳은 이백이 정치적인 이유로 가장 큰 위기를 맞았던 곳이다. 정치적 입신의 기대가 있을 때, 적극적이었던 그는 안록산의 난 이후 벌어진 왕자들간의 쟁투에서 배배한 영왕의 쪽에 섰다가 지우지앙에서 옥중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은 비극의 땅이기도 하지만 천하의 절경을 흠모한 이백에게는 여산(廬山)이 있어서 즐거운 곳이기도 했다.

그는 여산에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등의 걸작을 남긴다. "날 듯이 흘러 수직으로 삼천 척을 떨어지니 / 이는 아마도 은하수가 구천에서 떨어지는 듯하구나"(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망여산폭포' 중에서)라고 읊었던 그의 호방한 기상을 대표하는 시기도 하다.

마저 길을 재촉해 창지앙의 하류로 향해도 곳곳에서 이백의 유산을 만날 수 있다. 난징(南京)에 약간 못 미쳐 있는 헝지앙(橫江) 등은 물론이고 저지앙성 샤오싱(紹興) 등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도 이백의 마음에는 항상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었다. 이백의 시 가운데 가장 애송되는 '정야사'(靜夜思)일 것이다.

"침상 앞에 비치는 달빛을 보고 / 땅 위에 내린 서리인가 의심한다 / 머리를 들어 산의 달을 바라보고 / 머리를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牀前看月光 疑是地上霜 擧頭望山月 低頭思故鄕)

도인을 꿈꾸고 때로는 권력에 욕심도 내어보지만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고향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고향은 5살까지 산 구소련 키르키즈공화국 토크마크시일 수도 있고, 이후에 산 쓰촨성 지앙요(江油)일 수도 있다.

낭만의 산물만이 아닌 당시

이백은 물론이고 많은 문인들이 들러 작품을 남긴 루산
이백은 물론이고 많은 문인들이 들러 작품을 남긴 루산조창완
이백이나 두보와 같은 성당(盛唐:대략 8세기 전반) 시기의 걸출한 시인도 있었지만 당시는 초당(初唐:거의 7세기)부터 중당(中唐:8세기 후반∼9세기 전반), 만당(晩唐:9세기 후반∼10세기 초기)에 이르는 시간에 형성된 문학적 성취였다. 또 이 시기의 성취도 이전에 만들어진 신화나 굴원의 작품 등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또 중국문학을 봄에 있어서 지나치게 당대를 높게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당태종 이후 현종 등의 시기에 국가의 기반이 강해지고, 창조적 역량에 도움을 주는 도가(道家)가 넓게 퍼지면서 고급 문화가 형성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또 빙심(氷心) 등이 저술한 '중국문학사'에서는 정치적으로 북방의 당왕조가 남방의 수(隋)왕조를 통일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남방의 문풍이 북방의 시단에 스며들면서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풍이 형성됐다고 본다.

이런 기반에 안록산의 난과 그 이후 벌어진 토호들간의 전쟁은 일반인들의 생활을 궁핍하게 했고, 오랫동안 문학적 감상에 빠져들었던 문인들을 각성시키면서 다양한 문학적 기반이 형성됐다. 전쟁이 그들에게는 진주를 만들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이다. 사실 빼어난 문학적 성취의 대부분은 태평성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혼란과 이로 인한 정신적 혼돈 속에서 탄생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 문학의 거봉으로 우뚝 솟은 당시는 단순한 낭만의 산물이 아닌 시대와 그속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이들이 만들어준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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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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