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의 시와 이백 등으로 유명한 우한 황학루조창완
두보의 대구에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당연히 시선(詩仙) 이백(李白)을 꼽는다. 두보의 삶의 괘적이 장안에서 쓰촨을 거쳐서 창지앙의 중류까지 내려왔다면, 이백의 삶의 괘적은 상당부분 창지앙의 중하류에 머물고 있다. 물론 그는 출사를 위해 장안에 머물렀던 시간도 있고, 중국 전역이라고 할 만큼 많은 지역에 머물렀다. 하지만 창지앙과 중하류는 그의 흔적이 거쳐가지 않은 곳이 없다 할 만큼 그의 문학적 소재가 되어주었다.
창지앙 중류의 중심도시인 우한(武漢)에서 이백이 격찬한 최호(崔顥)의 시 '황학루'(黃鶴樓)의 무대가 된 곳이다.
"옛 사람 황학 타고 이미 가버려/ 땅에는 쓸쓸히 황학루만 남았네/ 한번 간 황학은 다시 오지 않고/ 흰 구름 천 년을 유유히 떠 있네"('황학루' 중에서)라는 시구에 이백이 동의한 것은 그가 쫓는 이상과 가까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백의 생애는 방랑으로 시작하여 방랑으로 끝났다. 그는 도가(道家)에 깊은 관심이 있었다. 두보가 언제나 인간으로서 성실하게 살고 인간 속에 침잠하는 방향을 취한 데 비해, 이백은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의 자유를 비상하는 방향을 취하였다.
그는 인생의 고통이나 비수(悲愁)까지도 그것을 혼돈화(混沌化)하여, 그 곳으로부터 비상하려 하였다. 술이 그 혼돈화와 비상의 실천수단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백의 시를 밑바닥에서 지탱하고 있는 것은 협기(俠氣)와 신선(神仙)과 술이라고 보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협기가 많았고, 만년에는 신선이 보다 많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술은 생애를 통하여 그의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었다.
우한에서 이제는 밋밋한 강줄기밖에 보이지 않는 창지앙 물길을 타고 한참 가면, 지우지앙(九江)에 닿는다. 이곳은 이백이 정치적인 이유로 가장 큰 위기를 맞았던 곳이다. 정치적 입신의 기대가 있을 때, 적극적이었던 그는 안록산의 난 이후 벌어진 왕자들간의 쟁투에서 배배한 영왕의 쪽에 섰다가 지우지앙에서 옥중에 갇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은 비극의 땅이기도 하지만 천하의 절경을 흠모한 이백에게는 여산(廬山)이 있어서 즐거운 곳이기도 했다.
그는 여산에서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등의 걸작을 남긴다. "날 듯이 흘러 수직으로 삼천 척을 떨어지니 / 이는 아마도 은하수가 구천에서 떨어지는 듯하구나"(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망여산폭포' 중에서)라고 읊었던 그의 호방한 기상을 대표하는 시기도 하다.
마저 길을 재촉해 창지앙의 하류로 향해도 곳곳에서 이백의 유산을 만날 수 있다. 난징(南京)에 약간 못 미쳐 있는 헝지앙(橫江) 등은 물론이고 저지앙성 샤오싱(紹興) 등 곳곳에 그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도 이백의 마음에는 항상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었다. 이백의 시 가운데 가장 애송되는 '정야사'(靜夜思)일 것이다.
"침상 앞에 비치는 달빛을 보고 / 땅 위에 내린 서리인가 의심한다 / 머리를 들어 산의 달을 바라보고 / 머리를 숙여 고향을 생각하네"(牀前看月光 疑是地上霜 擧頭望山月 低頭思故鄕)
도인을 꿈꾸고 때로는 권력에 욕심도 내어보지만 그의 마음에는 언제나 고향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의 고향은 5살까지 산 구소련 키르키즈공화국 토크마크시일 수도 있고, 이후에 산 쓰촨성 지앙요(江油)일 수도 있다.
낭만의 산물만이 아닌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