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제와 그를 죽이려는 형가의 대결. 영화 <형가자진황> 가운데서
반면에 자객 형가를 중심으로 한 글은 <사기>의 ‘자객열전’도 있지만 최근 영화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중국 5세대 감독의 거장 첸 카이거가 일본 자본을 들여와 만든 후 흥행에 참패한 <형가자진왕(荊軻刺秦王)>이나 최근에 장이모가 만들고 있는 <영웅> 등이 이 자객 형가의 모습을 중심으로 진시황을 투영한 것이다. 과연 시황제는 어떤 삶을 살았길레 2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거리를 제공하고 있을까.
진시황의 이름은 정(政)이다. 그의 아버지는 장양왕(莊襄王) 자초(子楚)지만 그의 출생도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다. 바로 그의 생부가 당시의 거상 여불위일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다. <사기> 역시 정이 여불위의 자식이라고 쓸 만큼 이야기는 흥미롭다.
이 이야기의 생성과정은 이렇다. 당대의 거상 여불위는 볼모로 조(趙)나라에 온 자초를 보고, 그에게 엄청난 자금을 투자한다. 그 투자에는 그의 아이를 임신한 하희(夏姬)를 자초의 여자로 준 것도 포함한다. 바로 그 아이가 훗날 자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며 중원을 통일한 시황제 정이다.
여불위의 투자는 한치의 오차도 없어 태자 정은 13세에 왕위에 오르고, 과거 그와 정을 나누던 태후와 합작으로 여불위는 권력을 쌓는 한편 다양한 국가 정비사업을 벌이고, 잘못된 글자 하나를 천금에 산다고 교만을 부렸던 <여씨춘추(呂氏春秋)>도 만들어낸다.
하지만 아버지만한 자식도 나올 수 있는 법. 시황제는 서서히 권력에 눈을 떠가고 앞에서 가장 거슬리는 생부 여불위마저 자살하게 하는 한편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책을 편다.
그후 국가 정복 사업을 벌이는 그는 BC 230년부터 BC 221년까지 한(韓), 조(趙), 연(燕), 위(魏), 초(楚), 제(齊)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룬 후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고 부른다. 물론 이 통일 위업은 선대(?) 장양왕을 비롯한 많은 이가 국가의 체제를 잘 정비한 결과였다는 것이 <진시황 평전>의 저자 천징 등의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또 하나의 소설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데 바로 그가 중국 자객사의 비조(鼻祖)인 형가다. 어릴적 시황제 정과 친하게 지내던 연나라의 태자 단(丹)은 훗날 시황제가 왕위에 오른 후 섭섭하게 하는 데다 그의 호전적인 기질을 알아 그를 암살하려하는데 백방에서 찾아낸 이가 형가다.
형가는 진나라를 배반한 후 연나라로 도망간 진어기의 머리와 지도를 들고 시황제에 앞까지 접근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실수로 형가는 실패하고, 연나라는 앞서서 멸망하는 비극을 겪는다.
진시황제가 통일 후 한 가장 큰 역할은 국가의 체제를 정비한 일이었다. 그는 법령의 정비는 물론이고,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 문자·도량형·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구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 등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행한 것 가운데 하나가 사상의 통일을 위한 분서갱유(焚書坑儒)다. 또 만리장성의 축조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사후의 안녕을 위해 아방궁을 건설한다. 또 한편으로는 영원불멸을 위해 불사약을 구하러 신하를 보내기도 한다.
시황제는 현대 중국인을 이해하는 바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