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을 용서해 줄 수 있겠니?"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은 죄에 대하여

등록 2002.11.05 15:23수정 2002.11.09 18:59
0
원고료로 응원
1초의 시간이 가장 길게 느껴질 때가 사람의 눈을 들여볼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가끔 마음속으로 시간을 재면서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 볼 때가 있습니다. 1초, 2초, 3초... 그것이 상대편에서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것 같아서 눈싸움을 하자고 꾀를 써보기도 합니다. 제 전략을 눈치채지 못한 아이들은 의심 없이 저와 눈싸움을 시작합니다. 상대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눈싸움을 하고 있지만 저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의 눈을 가만 들여다볼 뿐이니, 매번 제가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애하고도 눈싸움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애의 눈이 너무 예뻐서 오랫동안 들여다볼 구실을 찾았던 것이지요. 아니, 눈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그 애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생명이 깜박거리고 있는 영혼의 샘에 다가가 신선한 물 한 모금 얻어 마시고 싶었는지도 모르지요. 듣기 시험에서 늘 최고점수를 맞는 아이지만, 영어 발음이 제 선생보다도 좋은 아이지만, 그런 것보다는, 정말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영혼의 신선함이 느껴지는 그 아이.

승회가 교무실로 저를 찾아온 것은 달포 전이었습니다. 담임 반 아이도 아니어서 무슨 일일까 궁금했는데 뜻밖에도 모 대학에서 주최하는 영어스피치대회에 참가하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영어경시대회를 비롯한 각종 영어대회는 인문계 학생들과 함께 실력을 겨루어야 하는 처지여서 승산이 없다는 이유로 참가를 기피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딘지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던 터였습니다.

5년 전인가는 도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영어대화대회에 참가하여 인문계 학생들을 제치고 우수상을 수상한 기억도 한몫을 하여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지만, 문제는 승희가 입시를 눈앞에 둔 3학년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거기에 교사가 원고를 써주고 그것을 달달 외우는 식의 대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애의 말 한 마디가 그런 저의 부정적인 생각을 바꿔놓고 말았습니다.

"상을 타지 못해도 좋아요. 3학년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뭔가 해보고 싶어요."

기특하게도 원고도 자신이 준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뿌듯한지 승낙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대로 원고가 잘 써지지 않았는지 날짜가 꽤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수업을 하다가 문득 문득 생각날 때마다 원고를 가져와 보라고 독촉을 하기도 했는데, 그만 포기한 것은 아닐까 싶어질 무렵 그 애가 원고를 들고 불쑥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는 분의 도움을 받았다는 말과 함께 내민 원고는 어디까지가 본인의 실력이고 어디까지가 도움을 받은 것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고등학생의 작문실력으로는 기대 이상으로 훌륭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주제에 걸맞은 토픽이나 스토리가 없이 몇 단어가 채 되지 않는 단문만으로 문장이 이루어진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야기 거리를 하나 만들어 집어넣고 문장을 다듬은 뒤에 최종적으로 외국인에게도 보여 완성된 원고를 발송하면 되겠구나 싶어 원고 마감 날짜를 물었습니다.


"내일인데요."
"내일? 그런데 왜 이제 원고를 가져온 거야?"
"예!?"
"문장은 무난한데 스토리가 없어. 그걸 만들고 영작하고 외국인에게 보여 최종 마무리하는데 까지는 아무리 못 잡아도 3일은 걸릴 거야. 내일까지는 불가능해."

승회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그 눈을 보자 마음이 한없이 약해졌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만에 원고를 완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표정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는 승회에게 저는 변명 삼아 이렇게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몇 번 말했잖아. 원고 빨리 가져오라고 말이야. 학교 차원에서 준비한 대회였다면 모든 것을 알아서 했을 텐데, 너에게 맡기고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구나. 안됐지만 포기해야할 것 같다."

그렇게 말해주고는 그 애를 충분히 설득했다고 믿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우리 사이에 뭔가 금이 가 있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우선 출석을 부를 때마다 일부러 눈을 마주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어딘지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어쩌다 보여주는 환한 웃음 속에도 앙금 같은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며칠 뒤, 저는 승회를 조용히 불러 혹시라도 대회 문제로 해서 섭섭한 점이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승회는 서럽게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야 비로소 제 입에서 발음된 가벼운 한 마디의 거절이 그 아이에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상처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승희에게 깊은 사과의 말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그때의 상황을 다시 한 번 설명해주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식의 변명을 더 많이 늘어놓았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런 변명이 승희의 마음에 자리한 상처와 앙금을 하루라도 빨리 씻어주고 아물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일로 인해 한 아이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그 무렵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평소의 습관대로 속옷바람으로 거실에 나와 소파 앞에 무릎을 끓고 앉아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 중에 문득 승회가 영어스피치 대회를 나가고 싶다고 하면서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상을 타지 못해도 좋아요. 3학년인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뭔가 해보고 싶어요."

마치 정수리에 차디찬 손길이 와 닿은 느낌이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제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상을 타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굳이 원고를 완벽하게 꾸밀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외국인의 손을 빌리면서까지. 그는 못난 선생과는 달리 상이나 성적보다는 몇 갑절은 더 소중한 생의 경험과 도전과 추억을 원했던 것입니다. 부지불식간에 저는 그 아이의 순수한 열정을 짓밟아 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제자의 아픔보다도 자신의 알량한 명예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그것에만 연연하여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전체적인 생의 경험과 가치와 아름다움과는 동떨어진 채, 오직 상과 성적에만 연연하는 단세포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목적 의식적인 입시위주 교육을 개탄해왔으면서도 어느새 거기에 함몰되어 버린 병든 지식인의 자화상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큰 잘못도 없이 제자에게 사과를 한 사실만으로도 저는 도덕적으로 우쭐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다행히도, 저는 사과 정도가 아니라 용서를 비는 일이 제가 그에게 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속옷 바람의 기도를 통해서.

"승회야, 선생님을 용서할 수 있겠니?"
이런 말을 하기 전에 저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승희는 의외라는 듯이 자꾸만 저를 바라보았지만 막상 제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자 영혼 속까지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저와 눈을 마주쳐 주었습니다. 저는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가 저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은 죄, 곧 사랑하지 않은 죄를 말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새벽 3시 편의점, 두 남자가 멱살을 잡고 들이닥쳤다
  2. 2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3. 3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휴대폰 대신 유선전화 쓰는 딸,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