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하고 존경받는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학부모님들께 드리는 호소문

등록 2002.12.09 21:06수정 2002.12.10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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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학부모 여러분!

가정에 부모와 자녀가 있듯이 학교에는 교사와 학생이 있습니다. 바른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부모의 모범이 요구되듯이 학생들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교육도 교사의 모범이 없이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친절하고 인격적인 교사를 통해 학생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와 상호 존중의 아름다운 규칙을 배우고,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는 교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정직하고 진실한 성품을 익히게 됩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학교 풍토에서는 학생들에게 친절과 인격으로 다가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학교에는 정상적인 교육과정이 있습니다. 학생들의 심리적 육체적 조건과 함께 그 시대의 요구와 정황 등을 고려하여 가장 적합한 수준의 수업시간과 과목을 정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프랑스, 미국, 캐나다 등 교육선진국들을 비롯한 세계 대다수의 나라에서는 이런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부러워하는 세계적인 수준의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이상하게도 정상적인 교육과정에 쏟아야할 정성과 노력을 게을리 하는 대신, 새 학기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보충수업(특기적성교육)과 자율학습에 병적으로 매달림으로써 교사와 학생과의 첫 만남의 설레임은 강압과 거부로, 혹은 회유와 굴욕으로 얼룩지게 되고, 그로 인해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인격적인 교사가 되겠다는 다짐도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강압과 통제가 미덕인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인격적인 교사는 곧 무능교사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교육부의 방침에 따르면, 특기적성교육은 학생 개인의 희망 의사에 따라 희망 과목을 정하여 실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특기적성교육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학생 개인의 필요와 요구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우선 순위요, 수업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도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제대로 지키는 학교가 거의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는 양식 있는 교사가 오히려 따가운 눈총을 받거나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자율학습이 학생들의 자유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압과 타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도 문제입니다. 물론,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하도록 독려하고 환경을 제공해주는 것은 교사가 해야할 일입니다. 하지만 학생에 따라 공부하는 방식과 취향이 다르고 가정환경이나 건강문제, 혹은 공부에 대한 가치 기준이 다른데도 이를 전적으로 무시하고 정규수업 시간도 아닌 방과후의 자유로운 여가 시간마저 학교가 일방적으로 정한 장소와 방법에 의해 공부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실제적인 효과를 거둘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공부를 혐오하게 만드는 역기능이 우려가 된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기도 합니다.

현재 방과후 특기적성교육은 희망 학생에 한하여 수익자 부담원칙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자율학습은 학생들의 요구가 있을 때 학교가 장소를 제공할 의무가 있을 뿐, 자율학습비 징수는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사실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공부하는데 교사가 감독을 한다는 것도 모순된 일이지만, 아직은 자율적인 훈련이 미숙한 제자를 돕는 심정으로 무보수로 자율학습지도에 나서는 교사가 있다면 그것은 권장하고 반길 일입니다.


하지만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을 할 의사가 없거나, 가정 형편이나 여러 가지 여건상 그럴 만한 사정이 아닌 학생들마저 인권을 침해하는 수준의 끈질긴 강요에 의해 밤늦도록 학교에 남아 있게 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이며, 더욱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에 의해 학교에 남아 있는 학생에게 법으로 금한 자율학습비를 징수하는 것은 건전한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 11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전남지부는 도내 일반계 공·사립 11개교에 대해 특기적성교육 및 강제적 자율학습비 징수와 집행에 있어서 공정성과 투명성 확보 여부에 대한 국민감사를 감사원에 청구한 바 있습니다. 또한, 지난 12월 2일에는 겨울방학 중 전교생을 대상으로 무리하게 강행할 것으로 보이는 강제 보충자율학습에 대하여 시정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전교조 순천지역 고등학교 분회장 이름으로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는 신성한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릇된 관행을 더 이상 용납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결국 최종 피해자가 될 학생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며, 우리의 희망인 꿈나무들의 교육을 책임 맡은 교사로서 더 이상의 방관은 교육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뼈아픈 자각과 반성과 함께, 이제라도 학생들이 본인의 선택에 따라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일념에서 학교 현장의 치부를 드러내는 아픔을 기꺼이 감내하고자 한 것입니다.

존경하는 학부모 여러분!

요즘 들어 학교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학교에 교사와 학생은 있어도 스승과 제자는 없다는 말도 들립니다. 한국 사회는 교육에 대하여 열을 내며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 말을 실천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외국인들의 뼈아픈 지적도 있습니다. 학교 밖에서 학교를 바라보는 그런 부정적인 시각들을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우리 현장교사들의 아픔이요 부끄러움입니다.

학교가 아이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하는 즐거움과 신명이 넘치는 곳이 되기 위해서는 제자들에게 친절하고 인격적인 교사가 되고 싶은 소박한 꿈이 먼저 지켜져야 합니다. 그리고 학교는 학원과 달라야 한다는 인식이 공유되어야만 합니다. 학원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과목에서 만점을 맞는 것이라면 학교의 목적은 바로 행복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에게 어느 것이 더 소중한 것인지를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자기 삶이 없는 사람을 일컬어 노예라고 합니다. 새벽 같이 일어나 잠자리에 들 때까지 모든 것을 타인에 의해서 관리되고 구속받는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입시지옥이란 말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뜻을 모으고 힘을 합치면 학교는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변해야만 합니다. 학교는 천하보다도 귀한 어린 생명들이 모여 숨쉬고 뛰놀며 인생을 배우는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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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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