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이처럼 절뚝절뚝 걸어가 보았다

<동화, 행복을 퍼내는 마중물> 내 마음의 '주홍글씨'

등록 2002.12.13 10:00수정 2002.12.20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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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원

나에게는 잊지 못할 친구 한 명이 있다. 소아마비에다가 간질병까지 앓고 있는 기원이라는 친구였다. 28년 전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로 기억한다. 그날은 월요일이어서 운동장에서 아침조례가 있었다. 무슨 일이었는지 몰라도 교장 선생님의 훈시는 지루할 정도로 길었다.

여기저기서 참을성 없는 아이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께서 학생들 주변을 돌면서 주의를 주었으나 아이들의 지루함을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때 내 옆에서 비스듬히 서 있던 기원이가 풀썩 주저앉더니 거품을 물고 땅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갑자기 간질병 발작이 일어난 것이다. 팔과 다리가 비꼬아진 채 땅을 북북 긁으며 거품 물은 입으로 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딱히 응급처치 방법이 없는 병인지라 뺑둘러서 그 해괴한 몸짓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기원이는 푸우우 긴 숨을 토해내며 앉은 자세로 되돌아왔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듯 말똥말똥 뜨고 있는 텅 빈 눈이 아리도록 슬펐다.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 맥빠져 축 늘어져 있는 기원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다가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기원이는 땅을 뒹굴면서 그만 옷에다 오줌을 싸 버린 것이다. 우리들은 얼굴이 붉어진 기원이를 옆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였다. 아이들 틈을 비집고 다가오신 선생님은 안타까운 나머지 기원이를 집에다 데려다주라고 하셨다.

기원이 집은 학교에서 논밭을 가로질러 한참 들길을 가야 하는 먼 곳이었다. 하필이면 나한테 그런 귀찮은 일을 시키는가 싶었지만 선행이라는 명목아래 싫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때는 선행상이 유달리도 많았던 탓이기도 하였다.

기원이의 젖은 바지를 벗기고 수돗가에서 아랫도리를 대충 씻겼다. 그리고 기꺼이 내 바지를 벗어서 입혀주었다. 곁에 있던 친구들의 우러러보는 눈빛또한 싫지 않았다. 내복 대용으로 입고 있던 운동복 바지 때문에 흉이 되지 않을 거라는 구린 속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이 집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지루하고 멀었다. 처음에는 내 입장만 생각하고 앞장서서 걸었다. 한참을 걷다 뒤돌아보면 기원이는 저만치 절뚝거리며 내 빠른 걸음을 뒤쫓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다시 기원이 걸음에 맞춰 천천히 뒤를 따랐다. 몹시도 절뚝거리는 걸음걸이가 조급증이 일어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빨리 뛰면서 따라오라고 버럭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모범생이 할 소리가 아닌 것 같아 꾹 참았다.

궁리 끝에 기원이에게 제안을 하였다.
“기원아, 니 집 아직 멀었제? 심심한데 너처럼 한 번 걸어보면 안될까?”
싫은 표정이 역력하였으나 내심 미안했던지 마다하지 않았다.

기원이처럼 한 손으로 한 쪽 다리를 번갈아 짚어가며 절뚝절뚝 걸어가 보니 참 재미있었다. 끙끙대며 연방 이마의 땀방울 닦는 것 까지 똑같이 따라했다. 그러다가 둘이 눈이 마주치면 한바탕 웃어제끼기까지 하였다.

논밭이 들썩거리고 하늘이 기우뚱 흔들렸다. 지나가는 동네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혀를 끌끌 차기도 하였다. 요즘말로 하면 꼭 둘이서 듀엣을 결성하여 무대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까마득히 몰랐다. 겉으로 환하게 웃으면서도 속으로 아프게 울고 있는 기원이의 마음을.

그렇게 먼 길을 지루하지 않게 기원이와 나의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는 끝이 났다. 멀게만 느껴졌던 기원이 집에 벌써 도착한 것이다. 자초지종을 들은 기원이 엄마는 깜짝 놀라 아들을 끌어안고 안쓰러워 하였다.

온갖 맛난 것과 선행의 칭찬을 얻어들은 나는 스스로 모범생이 되어버렸다. 불편한 다리로 동구밖까지 배웅하던 기원이는 내 손을 꼭 잡고 고마움의 웃음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그가 던진 말 한 마디는 내 가슴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 글씨로’ 남고 말았다.

“친구야, 다음번에는 나도 니 걸음처럼 한 번 걸어보고 싶어.”

덧붙이는 글 | 내 주변의 작고 소중한 사연들을 동화처럼 꾸며나가고자 합니다. 묻어버리기에는 아쉬운 유년의 기억들이나, 발 끝을 스치는 하찮은 인연들일지라도 짧은 이야기로 엮어 나갈 것입니다. 사는 이야기의 <징검다리 편지>에서 보여줄 수 없는 약간의 창작과 윤색도 가미할 것입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 짧은 글에 담겨진 환하고 맑은 마음만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널리 징검다리처럼 퍼뜨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내 주변의 작고 소중한 사연들을 동화처럼 꾸며나가고자 합니다. 묻어버리기에는 아쉬운 유년의 기억들이나, 발 끝을 스치는 하찮은 인연들일지라도 짧은 이야기로 엮어 나갈 것입니다. 사는 이야기의 <징검다리 편지>에서 보여줄 수 없는 약간의 창작과 윤색도 가미할 것입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 짧은 글에 담겨진 환하고 맑은 마음만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널리 징검다리처럼 퍼뜨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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