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운동화 한 켤레

<동화, 행복을 퍼내는 마중물>

등록 2002.12.16 02:24수정 2002.12.16 10:53
0
원고료로 응원
한적한 섬마을 학교에 아이들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려퍼졌다. 반공 웅변대회에 나갈 반별 대표를 뽑는 예선대회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고 교실에 남은 몇몇 친구들은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그중에서도 내 목소리는 유달리 울림이 컸던지 인근 반 아이들까지 유리창 너머로 흘깃흘깃 엿보고 있었다. 감히 나에게 대적할 상대는 없었다. 우리 반 웅변대표를 뽑는 예선은 치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은 나의 특출한 웅변 실력에 주눅이 들었는지 연습 시늉만 내고 있었다. 단지 성길이만은 예외였다. 이 녀석은 예선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도 무사태평이었다. 학교가 끝나는 대로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걸걸한 성길이의 목소리로 보아서 미리 포기해버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이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선생님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격려하셨다.

"우리 해등이 목소리는 우렁차고 발음까지 좋은데? 본선에 올라가면 1등은 문제없겠다. 자만하지 말고 열심히 해 알았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대답을 하면서도 어깨가 저절로 으쓱거렸다.
"네에 선생님은 참, 그래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며칠 남지 않은 예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운동장에서 전 학년을 대상으로 열리는 본선에 나갈 옷차림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가방이 귀해 책보를 둘러메고 다니던 시절, 나는 운동화 한 번 신어보지 못하고 검정 고무신에다 기계충이 흉한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다.

이번의 웅변대회가 그토록 소원이었던 운동화 한 번 신어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엄마 엄마, 나 이참에 우리 반 웅변선수로 뽑혔어."
뽑힌 거나 다름없었기에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아이고 우리 아들 장하네그랴. 진짜로 개천에서 용났단 말이 사실이네 그랴."
아궁이에다 부지깽이로 솔잎을 넣다 말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기뻐하셨다.

"그런데 엄마아... 이 참에 운동화 한 번 만 사주라. 고무신 신고 연단에 서면 챙피할텐데……."
아무 말 없이 아궁이 불빛 쪽으로 돌린 어머니의 슬픈 얼굴이 불빛에 일렁거렸다.
"글쎄다, 아빠 염전 품삯 나오려면 설 대목에나 나올 텐데…. 보리쌀 팔기도 벅찬데 어쩌지?"

여기서 고분고분 물러서면 운동화 신어볼 기회는 영영 없을 것 같았다.
"몰라 몰라. 운동화 안 사주면 나 웅변대회 안 나갈테야."
나는 갑자기 복받친 눈물을 훔치며 밖으로 뛰쳐나오고야 말았다.

며칠 뒤 수업이 끝나고 반 친구들 앞에서 예선이 열렸다. 의기양양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는 나를 어느 누구도 우리 반 웅변대표 자리를 맡지 못하리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원고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리는 아이들 차례 뒤에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그날따라 목청이 확 터진 터라 마음껏 외쳐댔다. 연습 때보다 훨씬 더 잘한 것 같았다.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를 듣고 연단에서 내려왔다. 이제 예선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이미 기권한 줄로만 알았던 성길이가 앞으로 씩씩하게 걸어나가고 있었다.

이어지는 성길이의 웅변 앞에서 모두들 깜짝 놀라고 말았다. 굵직한 목소리는 둘째치고 대사마다 이어지는 손동작 발동작은 생전 보지도 못한 것들이었다. 양손을 올렸다 내렸다하고 가슴에 얹었다 떼었다 하는 우리들 동작하고는 차원이 틀렸다. 대사에 꼭 맞는 커다란 동작들이 저절로 홀딱 빠져들게 만들었다.

앞이 캄캄하였다. 성길이의 웅변이 끝나고 쏟아지는 아이들의 환호와 선생님의 커다란 웃음만이 귓전에 맴돌았다. 붉어진 얼굴이 화끈거려 교실 바닥만 쳐다보았다.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오만했던 나의 얼굴로 쏟아져내린 것만 같았다. 찔끔찔끔 오줌까지 마려왔다.

어머니께서는 장한 아들이 내일 열리는 본선에 진출한 줄만 알았다. 동네에서 제일 똑똑한 줄만 알았기에 당당히 상장을 타와 내밀 줄만 알았다. 그런 어머니에게 본선 진출은 거짓말이고 예선에서 떨어졌다고 실토할 수가 없었다. 다행이 또래 아이들 또한 내 마음을 알았던지 고자질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등잔 불 맞은 편 구석 진 곳에서 이른 잠을 청해버렸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며칠 째 퉁퉁 볼따구가 불어 있는 아들 때문에 어머니는 내내 마음이 아팠는가 보다.

잠자리에서 어머니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하소연하였다.
"여보, 아들 녀석 내일 웅변대회 나가는데 고무신 신고 나가는 게 챙피한지 며칠을 저렇게 찡찡거리네요. 어쩌면 좋을까요?"
"휴우……."
대답 없이 긴 한숨만 내쉬는 아버지의 얼굴이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어머니는 아침에 발걸음을 겨우겨우 떼며 학교로 향하는 나를 먼발치까지 따라나왔다. 줄곧 미안했던지 머리에 얹은 손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웅변대회 예선에서 떨어졌노라고 고백하지 못하였다.

학교에 도착하자 아이들은 난리법석이었다. 당연히 성길이의 웅변 연습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안 사실이지만 성길이는 학교가 끝나는 대로 학교 근방에 사는 선생님으로부터 특별 개인지도를 받았다고 하였다.

그 말을 곁귀로 듣고서는 갑자기 부모님에 대한 미안함이 싹 가시고 말았다. 그리고 가난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가시 돋치듯 돋아나기 시작했다. 성길이 아버지는 학교 근처에서 살았고 그나마 조금 잘 살았던 터라 아들에 대한 교육열이 남달랐다.

그에 비해 나의 부모님은 삼시세끼 밥만 굶기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가난한 염전 막노동자였다. 나도 조금만 지도를 받았다면 성길이쯤은 문제 없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더욱 더 부모님이 미워졌다.

웅변대회는 시작되었지만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운동장에 널부러져 있는 잔돌만 툭툭 차며 부모님에 대한 원망만 하고 있었다. 아들이 웅변대표로 뽑혔다는데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몹시도 미웠다.

그런데 하나같이 웅변을 하고 있는 아이들은 부티 나고 똑똑해보였다. 새로 산 옷을 입고 새 운동화와 반짝거린 구두를 신고 나왔다. 그런 아이들을 보는 나는 급기야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설령 성길이를 제치고 우리 반 대표로 뽑혔다 하더라도 내 초라한 행색 때문에 창피스러움에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회가 거의 끝나가고 6학년 형들만 남겨두고 있을 때 가만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해등아, 네 아빠 왔다야. 얼른 교문으로 가봐."
뒤돌아보니 아버지께서 교문 곁에 자전거를 받쳐놓고 까만 봉지 하나를 들고 기우뚱하니 서 있었다.

"니 순서는 아직 멀었제? 얼른 이 운동화 신어라. 아빠가 끈까지 매왔다. 얼른 얼른…."
염전 주인에게 겨우겨우 선불 땡겨서 운동화를 사왔다면서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셨다.
"이제, 이딴 거 필요 없어요. 내 차례 다 지나버렸단 말예요."
"뭐어? 벌써 끝나버렸어?"

끈까지 가지런히 매져 있는 운동화를 내밀던 아버지의 손이 내려가며 힘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벌써 끝나버렸구나? 그래 우리 장한 아들 웅변은 연습한 대로 잘 했지?"

그렇지만 나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뒤돌아 달려오고 말았다.
"헌옷에다가 고무신 신고 어떻게 연단에 올라가요? 그냥 배 아파서 못하겠다고 기권해 버렸어요."
제자리로 달려와 아버지 있는 교문 쪽을 한참동안 뒤돌아보지 않았다.

고무신 발로 운동장 바닥을 긁고 있다가 발등 위로 눈물방울 떨어질 때서야 교문 쪽을 뒤돌아보았다. 교문에는 아버지의 모습도 자전거도 보이지 않았다. 텅 빈 교문이 희미하게 흐릿해지면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들고 있던 운동화 위에 흘러내리는 아버지의 눈물이 자꾸만 떠올랐다.

덧붙이는 글 | 내 주변의 작고 소중한 사연들을 동화처럼 꾸며나가고자 합니다. 묻어버리기에는 아쉬운 유년의 기억들이나, 발 끝을 스치는 하찮은 인연들일지라도 짧은 이야기로 엮어 나갈 것입니다. 사는 이야기의 <징검다리 편지>에서 보여줄 수 없는 약간의 창작과 윤색도 가미할 것입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 짧은 글에 담겨진 환하고 맑은 마음만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널리 징검다리처럼 퍼뜨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내 주변의 작고 소중한 사연들을 동화처럼 꾸며나가고자 합니다. 묻어버리기에는 아쉬운 유년의 기억들이나, 발 끝을 스치는 하찮은 인연들일지라도 짧은 이야기로 엮어 나갈 것입니다. 사는 이야기의 <징검다리 편지>에서 보여줄 수 없는 약간의 창작과 윤색도 가미할 것입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 짧은 글에 담겨진 환하고 맑은 마음만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널리 징검다리처럼 퍼뜨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모임서 눈총 받던 우리 부부, 요즘엔 '인싸' 됐습니다
  2. 2 카페 문 닫는 이상순, 언론도 외면한 제주도 '연세'의 실체
  3. 3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던 동네... 충격적인 현재
  4. 4 "4월부터 압록강을 타고 흐르는 것... 장관이에요"
  5. 5 윤 대통령 한 마디에 허망하게 끝나버린 '2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