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 할머니의 퇴근 길

<행복한 동화>

등록 2003.02.07 15:27수정 2003.02.08 14:18
0
원고료로 응원
읍내 연세의원 담 모퉁이에 허름한 호떡가게가 하나 있습니다. 전봇대에다 손수레를 묶고 천막과 비닐로 지붕을 이은 낡은 포장마차입니다. 포장마차의 주인은 칠순이 다 되신 할머니입니다.

펄럭이는 비닐 문으로는 연탄불의 따뜻한 온기가 새어나오고, 사시사철 고소한 어묵과 달걀은 할머니의 후덕한 인심을 닮았습니다. 할머니가 만든 호떡은 어떻게나 맛있던지 둘이 함께 먹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빨리 먹으려 눈싸움을 하다가 사이라도 벌어지면 어떡합니까. 와삭 씹히는 땅콩과 단맛 좌르르한 '앙꼬' 때문에 십리를 달려서라도 사먹고 싶은 호떡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호떡집이 사람들 발걸음을 꼭꼭 붙잡는 이유는 정작 따로 있습니다. 할머니가 사람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따뜻한 정을 고봉으로 나누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한 번만이라도 할머니의 정에 쏘이면 밥알처럼 끈끈해져 금방 한식구가 되어버립니다. 물론 무와 어묵의 진국을 공짜로 얻어 마시기는 이유도 있습니다만.

호떡집을 지나는 아이들은 모두다 할머니의 귀한 손자요 손녀들입니다. 아이들은 장군이 되기도 하고 대통령도 되었다가 미스코리아도 됩니다. 할머니의 푸진 덕담 때문에 아이들은 저마다 꿈을 키워갑니다. 혹시나 모른 척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부리나케 뒤쫓아 가 꼬챙이 어묵을 입에 물려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정이 듬뿍듬뿍한 할머니를 어느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젊은 새댁부터 나이 지긋하신 분들까지 모두 다 좋아합니다. 장보러 가거나, 목욕탕에 가다가도 호떡집에 들러서 꼬박꼬박 인사를 하고 지나갑니다. 지체 높은 군수도, 경찰서장이나 농협조합장도 이만큼의 대접을 받기란 참말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할머니는 정작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떻게 여기 조그만 소읍까지 흘러 들어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단지 전쟁 통에 피난 왔다가 그냥 눌러 살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주변이 변변찮아서 지금까지 자식은커녕 오고가는 친척도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오고가다 만나는 사람이며, 호떡집을 들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다 가족이고 친척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할머니께서는 해질 녘 한참 장사가 잘되는 시간에 장사를 그만 둬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할머니도 먹고 살만하니까 호떡장사도 소일거리일 것이라며 쑥덕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호떡이 하도 맛있어서 일찍 파장을 본다며 시샘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팔지도 않을 호떡을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재료가 다 떨어지도록 굽고 또 구웠습니다. 그리고 몇 개씩 여러 봉지에 나누고는 어둠이 내린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동안 할머니의 퇴근 길을 유심히 지켜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맨 먼저 병원 귀퉁이에 있는 궤짝 같은 구두수선 집 앞으로 갔습니다. 인사말 대신 하얗게 웃어주는 벙어리 김씨에게 호떡 봉지 하나 건네며 검은 손을 꼭 쥐어주고 있습니다.

무슨 볼일이 있나 싶었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이내 구둣방에서 멀지 않는 버스터미널 앞 구석진 곳으로 종종걸음 쳤습니다. 거기에는 채소며 무말랭이들을 놓고 파는 시골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있습니다.

아직 파장이 아닌지 짐을 꾸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 반기듯 재수 보았느냐는 말을 건네며 또 역시 호떡 봉지를 두세 개 건네고 있습니다. 십중팔구 그깟 몇 푼이 아까워 점심을 걸렀을 또래 할머니들이 안쓰러웠는가 봅니다.

꿀맛인 호떡을 여러 번 나누어서 먹고 있는 할머니들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발 배곯지 말고 장사하라는 눈짓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호떡봉지 발걸음은 여기서 멈추질 않았습니다.

어디서 보았는지 몰라도 정류장 심부름꾼인 성용이가 잽싸게 할머니 품에 안겨들고 있습니다. 빨간 볼을 어루만지며 한 봉지의 호떡을 건네줍니다. 성용이는 한센병을 앓고 있는 장애인이라 버스정류장에서 궂은일을 돌봐주며 근근이 살아가는 아이입니다. 평소에도 성용이가 할머니를 쫄쫄쫄 따라다니는 폼이 영락없는 친손자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멀리서 이런 훈훈한 풍경을 지켜보고 있던 택시 기사들에게도 남은 호떡 봉지는 돌아가고 있습니다. 불경기인지라 시린 손만 비벼가며 속 태우는 모습이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할머니께서 한참 장사 잘되는 시간에 서둘러 장사를 마쳐버리는 이유 말입니다. 따뜻한 밥 때를 놓쳐버려 배곯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짠하고 슬펐던 것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그들의 시장기를 달래주고자 서둘러 집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호떡 몇 개 못 파는 서운함보다 불쌍한 사람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것이 더 행복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람들의 퇴근길이 이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요. 호떡 몇 개 구워 나누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묻지 마십시오. 그 보잘 것 없는 호떡 몇 개가 할머니께는 생의 밑자리고 목줄이라면 믿겠습니까. 비록 허리 굽어 침침하고 낮은 걸음이었지만 이토록 환하고 아름다운 퇴근길은 처음 보았습니다. 가슴에 눈물 한 줄 싸하게 흐르는 저녁이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 여사 접견 대기자들, 명품백 들고 서 있었다"
  2. 2 유시춘 탈탈 턴 고양지청의 경악할 특활비 오남용 실체
  3. 3 제대로 수사하면 대통령직 위험... 채 상병 사건 10가지 의문
  4. 4 미국 보고서에 담긴 한국... 이 중요한 내용 왜 외면했나
  5. 5 '김건희·윤석열 스트레스로 죽을 지경' 스님들의 경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