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불놀이가 가져다준 평화

<행복한 동화>

등록 2003.02.13 11:39수정 2003.02.1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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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지나고 손가락 열서너 번을 꼽고 나자 오매불망 기다렸던 대보름이 되었다. 우리들은 몇 날 전부터 쥐불놀이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이번만큼은 아랫마을 아이들과의 불 싸움에서 지기 싫었기 때문이다.

속이 넓은 분유깡통에 구멍을 뚫고 철사를 동여 메어 불통을 만들었고, 산속을 헤집고 다니며 송진이 바짝 마른 관솔을 꺾어다 잔뜩 모아 놓았다. 이제 개전을 알리는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사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은 공중에서 발톱 날을 겨루는 수탉들처럼 앙앙거리며 살았다. 마을을 관통하는 저수지의 물 때문에 부딪치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농사가 사는 것의 전부였던지라 한 바가지의 물이라도 더 끌어오려고 심지어는 몸싸움까지 벌여야만 하였다. 그로인해 해가 갈수록 두 마을의 골은 깊어만 갔다.

대보름의 쥐불놀이 만해도 그러한 대립의 분위기가 이어졌다. 쥐불놀이라는 것이 쥐구멍에 불을 놓거나 마른 풀에 숨어있는 해충의 알을 태우려는 목적만은 아니었다. 불 싸움에서 지면 이웃마을의 해충까지 떠안게 되어 그 해 농사는 망쳐버린다는 속설을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연중에 어른들도 아이들의 불 싸움을 돕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아랫마을 아이들한테 단 한 번도 불 싸움에서 이겨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랫마을의 대장인 영삼이의 치밀한 준비와 담력 때문이었다.

드디어 둥근달이 초가지붕 위로 박 같이 떠올랐다. 우리들은 용감무쌍하게 불 깡통을 돌리면서 진격하였다. 들녘에는 동그란 불똥들이 튀고 날기 시작했다. 화력이 우세한 우리들에게 아랫마을 아이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순식간에 아랫마을 입구까지 밀고 들어갔다. 그 담력 드센 영삼이도 별수 없었는지 슬슬 뒷걸음치더니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불 깡통을 있는 힘껏 던져버렸다.

그런데 아뿔싸! 노란 관솔 불덩이가 뒤쪽의 초가지붕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불이야! 불이야!’ 만 연발하며 모두들 도망치기에 바빴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길길이 소리 지르는 집주인의 목소리만 아련하게 들려왔다.

다음날 우리들은 최고 어른인 정일이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저희들이 아랫마을 지붕에 불똥을 놔버렸당께요. 용서해 주세요... 엉엉엉.”

그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영삼이 불 깡통 때문에 불이 났다고 발뺌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는 홧김에 부지깽이로 내리치다가 힘에 부치셨는지 곧장 동네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한참 후에 어른들 몇 분이 아랫동네에 다녀오셨고, 다음날부터 봄이 다 오도록 동네 어른들은 아랫마을 집짓기에 구슬땀을 흘리셨다.

그렇게 불 전쟁이 한바탕 벌어지고 난 뒤에 윗마을 사람들과 아랫마을 사람들은 저수지 물 때문에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그 불 싸움으로 인해 오랫동안 두 마을을 갈라놓았던 전쟁이 끝나버렸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해피데이스> 3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월간 <해피데이스> 3월호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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