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붕대 감긴 손

<행복한 동화>

등록 2003.03.10 09:11수정 2003.03.1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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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대중목욕탕에 가는 게 왜 그리 싫었을까요? 1년에 서너 번 가는 목욕탕인데도 코뚜레에 끼인 소처럼 질질 끌려가곤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아내의 잔소리에 못내 쫓기듯 읍내 농협마트 앞에 있는 대중목욕탕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날부터 꼭, 5일에 한 번은 대중목욕탕에 가는 습관이 생겨버렸다면 믿겠습니까? 그것도 목욕탕 가는 길은 사통오달인데, 반드시 가장 번잡한 농협마트 앞길을 지나는 습관 말입니다. 참 우스운 일입니다. 남세스러워 남들 앞에서 발가벗고 목욕하기를 꺼려했던 사람이 일부러 날을 받아 대중목욕탕을 찾는다니...

그날, 농협마트 앞길을 지나치다 참으로 가슴 떨린 광경을 보았습니다.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앵벌이 소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열한두 살 먹었음직한 남자 아이가 몸뚱이 낡은 트럭 위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얼굴은 얼음이 들었는 듯 검붉은 빛을 띠고, 입술은 새파래져 달달 떨고 있습니다. 굴 껍질 같이 상처투성이인 손으로는 생굴을 조리에 걸러 비닐봉지에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 뒷전에는 두꺼운 담요를 두르고 마른 담배만 뻐금뻐금 피우고 있는 어른이 보였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다 혀를 끌끌 차며 한 마디씩 하고 지나갔습니다.

“오메, 저게 뭔 모진 짓거리당가? 아들은 추위에 오그라들고 있는데, 애비라는 사람이 저렇게 뒷짐 지고 있네... 저 어린 것이 불쌍해서 어쩌까잉...”

지나가는 사람들의 볼멘소리를 듣는지 못 듣는지, 아이는 시린 손을 호호 비벼가며 조리를 연방 후벼가며 굴을 떠 놓고 있습니다. 그 뒤에서 매정한 아버지는 간혹 가다 한 마디만 내던질 뿐이었지 아무것도 거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갯가에서 금방 따 온 것이니 싱싱합니다요...한 바가지 얼른 사가쇼잉?”

사람들은 무언가 짠한 마음이 발동했던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굴을 사갑니다. 그러면서 그 아이의 볼을 비벼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갔습니다.

이 가슴 시린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죠. 딸랑 목욕 값으로 가져온 만 원짜리를 내밀고 생굴 한 봉지를 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매정한 아버지 좀 들으랍시고 한 마디 하였습니다.

“아이고, 요 녀석아 춥겠다. 저 분은 네 친아버지 아니더냐? 쯧쯧...부지깽이라도 엄동설한에는 저렇게 내놓지 않겠다.”

지금까지 그저 사람들끼리 쑥덕거리는 말만 듣다가,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남부끄러운 소리를 해대자 갑자기 그 아이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거 보쇼, 당신 아들 눈물 보니까 어찌 가슴이 찔리지 않소?’
마음속에서나마 좀 뉘우치기라도 하라는 듯이 그 아버지의 얼굴을 곁눈으로 흘겨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요? 뒷전에 있던 아이 아버지 눈에서도 갑자기 복받쳐 흐르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그만 당황한 나머지 나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기에 바빴습니다.

“애야, 그만 울어라...이 아저씨가 괜한 소리를 했나보구나.”
애써 달래려고 아이의 어깨를 토닥거리자, 애 아버지는 앞이 흐릿한 채로 담요에서 손을 빼들고 아이의 눈물을 훔쳐 주려고 하였습니다.

아아, 하얀 붕대 감긴 손. 그 순간 쥐구멍이라도 헐레벌떡 찾고 싶어졌습니다. 애 아버지는 두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하얀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있었습니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붕대 손으로 아들의 눈물을 훔쳐 주던 아이의 아버지가 다소 멋쩍은 듯 말을 꺼냈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괜한 걱정을 끼쳤나 보네요. 며칠 전 사고로 그만 손을 다쳤지 뭐예요. 따 놓은 굴이 너무 많아서 상할까봐 하는 수 없이 아들하고 이렇게 팔러 나왔네요. 아이 엄마만 집에 있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또랑또랑한 아이의 눈에서 말간 눈물방울 떨어진 것만 봐도 다 알겠습니다. 아버지가 억지로 아이를 장터로 내몬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붕대 감긴 손으로 안타까워하는 아버지를, 일부러 떠밀며 장터로 나온 아이란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날, 한참동안 목욕탕을 앞에다 두고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여곡절을 들어보지도 않고 앵벌이 취급한 못된 성미를 두 손 싹싹 문지르며 빌어야 했습니다. 이런 나를 보고 오해할 수도 있는 문제라며 되레 위로하는 그 사람의 마음이 정말 따뜻하고 환했습니다.

가져온 생굴이 다 팔리기만을 기다렸다가 가기 싫다는 그 아이와 아버지를 이끌고 대중목욕탕에 들어갔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내 맘이 편해질 것 같았습니다. 평소에 조금 안면이 있는 목욕탕 주인에게 찡긋 외상을 긋고 참말로 개운하게 목욕을 하였습니다. 꼭 내 아들 녀석 때를 닦아주듯 그 아이의 등을 밀어주었습니다. 멀리서 보고만 있던 아이 아버지의 눈빛이 오래도록 따뜻하였습니다.

그렇게 대여섯 번 농협마트 앞에서 그 아버지와 아들을 만나곤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극구 말려도 소용없다는 듯 아이가 서둘러 굴을 따오는 지라 하는 수 없이 장터에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마다 굴이 다 팔리기만 기다렸다가 목욕탕에 가기도 하고, 점심으로 자장면 시켜 먹고 같이 생굴을 까기도 하면서 나의 오일장은 저물어 갔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그 후부터 한 달이 넘도록 그 아이와 아버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BYC사외보' 3-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BYC사외보' 3-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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