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흐흐흐! 수고가 많았다. 일은 실수 없이 처리했겠지?"
"이를 말씀이십니까? 어느 분의 명이시라고… 이제 중원 어디에서도 순종 대완구는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안락해 보이는 태사의에 앉아 있는 청년은 이제 약관을 갓 넘긴 듯 보였다. 다소 오만해 보이는 것이 흠이라면 흠인 그는 과년한 딸자식을 가진 부모들로부터는 천하제일 사윗감으로 지목 받고있는 철기린(鐵麒麟) 구신혁(九新赫)이었다.
올해 이십일 세인 그는 무림의 하늘이라 할 수 있으며, 천하제일거부라 할 수 있는 무림천자성 성주 철룡화존 구부시의 장자(長子)였다. 따라서 차기 성주가 될 재목이었다.
누구든 그와 혼례를 올리면 지상 최고의 호강을 하게 될 것이며, 처가는 무림천자성의 엄밀한 호위를 받게된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설사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와 무당파의 장문인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천하제일 사윗감으로 지목되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슬하를 떠나 남해의 이인(異人)으로부터 무공을 전수 받았다는 그는 추측하기 힘들 정도로 고강한 내공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다. 흔히들 말하길 재물이 있으면 귀신이라도 부릴 수 있으며, 처녀 불알이라도 살 수 있다고 한다.
무림천자성은 중원 전체를 열 번이라도 사고도 남을 엄청난 재물이 있다. 따라서 장차 천하를 다스릴 후계자를 위하여 억만금이라도 썼을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구신혁에게 복용시키기 위하여 인세에 다시 보기 힘들 영물이며 극양(極陽)의 기운을 띄고 있는 만년태양금구(萬年太陽金龜)의 내단과 반대로 극음(極陰)의 기운을 지닌 한 뿌리 자엽설란구지혈초(紫葉雪蘭九枝血草)를 구입하였다고 한다. 하여 약관의 나이이건만 초절정 고수가 된 것이라 하였다.
철기린은 그의 외호에서 알 수 있듯 임풍옥수(臨風玉樹)와 같은 준수한 외모와 높은 학문을 겸비하고 있다. 게다가 부드러운 성품의 소유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야말로 흠잡을 것이 없는 후기지수였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실상의 철기린은 소문과는 다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극소수이며 모두 무림천자성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되어야 직성이 풀리던 그의 성품은 독선적이며 오만방자 하였다. 게다가 어찌나 색을 밝히는지 자신의 손녀보다도 어린 계집의 배 위에서 복상사(腹上死)를 한 전대 성주인 구린탄보다도 한 수 위라 하였다.
지금까지 그에 의하여 신세를 망친 여인들의 수효는 부지기수였다. 그 가운데에는 일신의 영달을 바라는 무림천자성 인물들의 여식이나 누이가 수두룩하였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항의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항의를 하였다가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빼앗긴 뒤 무림천자성에서 쫓겨나 거렁뱅이가 되어 천하를 유랑하는 사람도 여럿 있다고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아예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은 쉬쉬하면서 말하길 철기린의 명에 의하여 죽었을 것이라 하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건드린 여인들의 식솔들에게는 쥐꼬리만한 재물을 내리거나, 승차를 시켜 주었다.
그렇기에 어떤 자들은 이것을 바라고 자신의 여식이나 누이를 상납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가 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하는 사람은 부친인 철룡화존 구부시뿐이다. 그의 눈밖에 나면 차기 성주가 되는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철기린에게는 여러 동생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견제를 당하는 아우는 셋째인 무언공자(無言公子) 구호광(九昊洸)이다. 그의 외호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그는 하루에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는 인물이었다.
누가 말을 걸건 그저 고개로 대답하곤 하였다. 부친인 철룡화존이 뭔가를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으로서 감히 아비의 물음에 고개 짓만으로 답변하는 것에 대하여 화를 낼 법도 하지만 철룡화존은 그러지 않았다. 의례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이러한 그는 철기린으로부터 집중적인 견제를 당하는 중이었다. 아무런 말도 없기에 그의 의중을 도통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아우들과 달리 그만은 자신이 성주가 되는 것에 대하여 찬성도, 그렇다고 반대도 표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장차 성주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 판단한 철기린은 그의 주변에 자신의 심복을 심어 둔 바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 명만 내리면 즉각 무언공자의 수급을 베기로 되어 있다. 만일 자신이 차기 성주 후보에서 밀려나면 그에 의한 음모가 거의 확실하다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좋아, 수고들 했다. 이것으로 목이나 축이거라!"
쿠쿵!
"존명!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바닥에 떨어진 묵직한 주머니를 본 철마당주와 철검당주는 이마가 깨지거나 말거나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평소 손이 크기로 이름난 철기린이기에 이번 일에 대한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적어도 은자 천 냥 정도는 하사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풀어진 것을 보니 황금빛 찬란한 금원보들이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만 냥은 족히 되었다. 그렇기에 이마가 깨지는 것도 모르고 감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후후! 그나저나 이번 길에는 쓸만한 계집이 없었더냐?"
"예? 아, 예…! 어, 없었습니다. 죄, 죄송합니다."
"후후! 아니야. 그런 궁벽한 곳에 쓸만한 계집이 있을리 만무하지. 좋아, 너희는 이만 나가보도록!"
"존명!"
쿠쿵!
이번에도 이마가 깨지도록 머리를 처박은 둘은 조심조심 뒷걸음질쳤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면해 있었다. 적어도 며칠 동안은 주색에 푹 빠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서 무림을 말살시킬 준비는 대강 끝난 셈인가? 크흐흐! 본가가 영세무궁토록 군림하려면 무림 같은 것은 진작에 없어졌어야 하지. 좋아, 그렇다면… 무영(無影)!"
"속하, 무영 대령하였습니다."
철기린이 중얼거림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앞에 한 인영이 부복하고 있었다. 현재 정실의 문이란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따라서 지금껏 실내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그런데 제법 널찍한 실내에는 은신할만한 곳이 없었다.
집기라곤 탁자 하나와 태사의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있다면 대들보 위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무영이라 불린 인영은 그곳으로부터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실내의 어두운 부분에 마치 그림자처럼 은신해 있었던 것이다. 고도의 은잠술을 익힌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좋아, 전에 지시했던 것은 어찌 되어가고 있느냐?"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요즘 들어 유대문(儒 門)의 문주 사론(史論)이 벌이는 일입니다."
"으음! 사론 그자가 또…?"
"그러하옵니다. 사론은 현재 제자들로 하여금 팔래문(叭 門)을 강하게 핍박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그으래…? 감히 본좌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말이지?"
철기린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예, 하오나 이번 공격에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명분…? 무슨 명분?"
"확인한 바에 의하면 팔래문의 제자 하나가 유대문으로 스며들어 유대문의 제자들을 척살하였다고 합니다. 그자는 현장에서 생포되었는데 곧 자진을 하였다고 합니다."
"으음! 그래도 그렇지 유대문의 문주 사론 따위가 감히 본좌의 경고를 무시했다는 말이야?"
"그, 그러하옵니다."
철기린은 유대문의 문주 따위가 감히 자신의 경고를 무시한 것에 격분한 듯 새파란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것을 본 무영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끼치는 듯 부르르 떨고 있었다.
"너는 지금 즉시 지금 즉시 사론을 잡아 들여라. 내, 그자의 목을 직접 날려 버리겠다."
"소, 소성주님! 그것은 불가(不可)하옵니다."
"불가라니? 방금 불가라 하였더냐? 오호라! 이제 보니 사론이라는 작자가 네게도 손을 쓴 모양이군. 후후! 무슨 뇌물을 받았느냐? 은자냐? 아니면 여색이냐?"
"아, 아닙니다. 뇌물 따위는 없었습니다."
싸늘한 철기린의 음성에 무영은 부르르 떨면서 뒤로 물러섰다. 소성주의 성품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으래…? 그런데 어찌 감히 본좌의 명을 어기느냐?"
"소성주님! 들어보십시오. 유대문은 본성이 유지되는데 필요한 모든 물품을 납품하는 자들의 연합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본성을 일으켜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장로들의 후인들이지요."
"그래서? 본좌에게 십이 장로 따위를 두려워하라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속하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유대문은 장로들은 물론 호법들까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판국에 사론을 제거하면 자칫 본성의 힘이 줄어드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하오니 통촉하여 주십시오."
"그깟 것이 무서워서…?"
"소성주님! 사론을 제거해서는 안 될 이유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팔 대 당주 역시 그들과 연관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를 제거하면 본성이 유지되는데 필요한 막대한 수입에 차질이 빚어질지도 모릅니다. 현재 유대문은 본성을 대신하여 고리대금업 등…"
"되었다! 그만해라. 흥! 썩어도 단단히 썩었군. 좋아, 나중에 본좌가 성주직에 오르는 날 썩은 곳은 모두 도려질 것이다."
계속되는 무영의 보고에 화가 난 철기린은 부르르 떨기까지 하였다. 듣자하니 무림천자성의 모든 수뇌부가 유대문과 연관이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하였기에 이럴 때 잘못 걸리면 박살난다는 것을 잘 아는 무영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안내말씀]
앞 부분의 설정을 안 보시면 뒷 부분이 재미없거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앞부분을 못 보신 분은 귀찮으시겠지만 앞 부분부터 봐 주십시오.
참고로 "전사의 후예"는 당분간 매일 연재됩니다.
그럼,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제갈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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