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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멈춰요."
화려하게 치장된 사인교(四人轎)의 지붕에는 안에 무천장의 주요인물이 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두 개의 금원보(金元寶)를 수놓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대행수(大行首)급 이상이 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짤랑짤랑한 여인의 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가마는 멈췄다. 그리고는 보옥으로 만든 주렴이 살짝 벌어지는가 싶더니 영롱한 눈빛이 밖을 살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가마를 호위하려 따라 온 듯한 호위무사들이 예리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강호 전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모든 무천장에는 두 가지 조직이 있었다. 하나는 정의수호대 소속 무사들이고, 다른 하나는 무천상단(武天商團)이라는 상인 조직이었다.
정의수호대는 가마보다는 말을 주로 이용한다. 만일 가마를 이용할 경우 무적검이 수놓아진 깃발을 달고 다닌다. 대주는 두 개의 무적검을, 그 이하는 한 개의 무적검을 달고 다닌다.
중원의 모든 정의수호대를 총괄하는 총대주는 세 개의 무적검이 삼각형으로 눌어서 있고 그 안에 다섯 개의 별을 수놓은 깃발은 단다.
상인 집단인 무천상단은 금원보를 수놓은 깃발을 단다. 대행수급은 두 개의 금원보를, 그 아래 직급인 행수(行首)는 한 개의 금원보를 수놓은 깃발을 단다.
그보다 하위 직급인 도령위(都領位), 수령위(首領位), 부령위(副領位), 차지령위(次知領位), 별임령위(別任領位)와 그보다 더 밑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실임(實任), 의임(矣任), 서기(書記) 등은 아예 가마는 꿈도 꿀 수 없다.
천하의 상계를 장악한 무림천자성의 하위 조직인 무천장은 각 시진에 생필품을 조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관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관수품(官需品)을 독점 납품하였다. 그리고 황궁에 바쳐지는 진헌물(進獻物)과 공물(供物)도 조달하였다.
그렇기에 무천상단 역시 나름대로 엄격한 위계질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도령위와 수령위까지만 가마를 사용할 수 있고 나머지는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못 꾸는 것이 가마였다.
아무튼 금원보 두 개가 그려진 깃발을 달고 있으니 가마 안의 여인은 무천장의 고위 인물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주렴이 살며시 벌어지는가 싶더니 안에서 묘령의 소녀가 나왔다. 취록색 궁장을 걸친 그녀는 오랫동안 앉아 있다 일어서서 그런지 현기증을 느끼는 듯 잠시 교구를 휘청였다.
잠시 후 낙락장송을 한 손으로 짚은 소녀는 언덕 아래로 보이는 산해관의 정겨운 풍광을 뇌리에 담고 있었다. 십사 년 전,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껏 단 한번도 외지로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드넓은 중원 유람을 가는 것을 소원하던 그녀였다. 하지만 막상 떠나려니까 왠지 섭섭한 느낌에 마지막으로 풍광이라도 뇌리에 담으려고 이곳에 온 것이다.
소녀는 적어도 이곳 산해관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무천장 장주의 일점혈육이었다. 산해관을 총괄하는 관주조차 그의 말이라면 한 수 양보하는 처지였다. 그에게서 얻는 재물로 관주직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아,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소녀는 봉목에 맺힌 이슬을 닦아냈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남해(南海)까지 가야 한다. 무림 기인으로 알려진 보타암(普陀庵)의 암주 보타신니(寶陀神尼)에게서 무공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얼마 전 무림천자성에서는 한 통의 서찰을 보내왔다. 장주의 여식인 추수옥녀(秋水玉女) 여옥혜(呂玉慧)를 보타암으로 보내라는 것이다. 그곳에서 무공을 익힌 후 웬만한 수준이 되면 정의수호대의 일원이 될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무공 익히기를 게을리 한다면 정의수호대원이 될 자격을 얻지 못하게 된다 하였다. 그렇게 되면 부친인 사면호협(獅面豪俠) 여광(呂廣)은 장주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무천장의 장주라는 직위는 적어도 한 곳에서는 패자(覇者)나 다름없다. 따라서 엄청난 권력이 있기에 장주가 되기를 열망하는 자들은 많았다. 그런 그들에게 기회도 부여하고, 현 장주들의 충성심도 유발시키기 위한 조치가 바로 자제들로 하여금 정의수호대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일종의 인질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인들이 보내는 흠모의 눈초리와 행협(行俠)을 함으로서 무림의 정의를 구현한다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젊은 남녀라면 누구나 정의수호대원이 되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각 지역의 장주는 의무적으로 자식들 가운데 하나를 보내게 되어 있다. 그들 가운데 사내는 태산으로 보냈고, 계집들은 남해로 보냈다. 남해에는 보타암이 있기 때문이고, 태산에는 전대 기인인 한운거사(閑雲巨士) 초지악(楚志岳)이 있기 때문이다. 보타신니는 검법에 한운거사는 도법에 일가견이 있는 고수들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무림천자성에서 파견한 무공교두들이 있다. 그들은 보타신니와 한운거사를 도와 무천장 장주의 자제들이 무공을 제대로 연마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였다.
일단 무공을 익힌 후 누구든 원하면 정의수호대원이 될 관문에 도전할 수 있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무공을 익히는 속도가 달랐지만 대략 오 년 정도 수련을 하면 관문을 돌파하였다.
한번 관문에 도전하였다가 실패하면 일 년 후에 다시 도전하게 된다. 그래도 실패하면 한 번 더 기회를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문을 돌파하지 못하면 즉각 귀가시켰다. 그리고 그의 부친은 장주직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다. 지금껏 이렇게 하여 장주에서 물러난 자들이 여럿 있었다.
며칠 전, 추수옥녀 여옥혜는 부친이 말 없이 건네는 서찰을 받았다. 그리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생각하였다. 부친에게는 자식이라곤 자신 하나뿐이기 때문에 언제고 올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아들이 있다면 아들이 우선이었다. 그러나 아들이 없다면 딸이라도 가야하였다. 만일 자식이 없다면 가장 가까운 인척의 자식을 양자로 입적하여야 하였다. 이마저도 없다면 장주직을 내놓아야 하였다.
하여 모친과 함께 매달 보름이면 산해관 외곽에 위치한 대덕사(大德寺)에 들러 불공을 드리곤 하였다. 모친이 아들을 낳기만 하면 자신은 남해까지 갈 필요도 없고, 동생이 성장 할 때까지 부친은 장주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친은 끝내 회임을 하지 못하였다. 자신을 낳으면서 워낙 난산을 하였기에 더 이상 자식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의원의 말이 있었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불공을 다녔던 것이다. 그러던 중 서찰이 당도한 것이다.
이제는 모친이 아들을 수태하였다 하더라도 꼼짝없이 가야하는 상황이었다. 하여 모녀는 밤새 눈물을 흘렸다. 오 년 동안 무공을 익히면 열아홉이 된다. 그때는 이미 혼기를 놓친 과년한 나이가 된다.
이후 정의수호대원이 되어 활동을 시작하면 언제 혼례를 올릴 수 있을지 기약이 없어진다. 그리고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하여 밤새 눈물로 지새운 것이다.
지난 며칠 간 무천장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주 일가를 본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동을 조심하였다. 재수 없으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휴우…!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쉰 추수옥녀는 천천히 면사(面紗)를 걷어 올렸다. 일 년이나 쓰고 다닌 면사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좀더 자세히 고향의 정경을 뇌리에 담으려는 것이다.
그런 그녀의 눈빛은 너무도 신비로웠다. 마치 억겁의 세월 동안 침잠해 있던 가을 호수의 그윽한 물빛처럼 너무도 요요(妖妖)한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눈빛 때문에 그녀의 외호에 추수(秋水)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것이다.
성숙해 가는 소녀라면 누구나 경험해야하는 달거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이런 눈빛을 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첫 달거리가 끝난 후부터 이 눈빛과 마주친 사내들은 갑작스럽게 오금이 저려드는 느낌에 전율하여야만 하였다. 그것은 욕정이 아니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무력감이었다. 하여 일 년 전부터 면사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윽한 눈빛으로 사방을 훑어보던 추수옥녀의 봉목에 쓸쓸한 기운이 감돌 즈음이었다. 갑작스럽게 호위무사 하나가 벼락같이 소리치면서 수풀 속으로 뛰어 들었다.
"네 이놈! 웬놈이냣?"
"어엇! 왜, 왜 이러세요? 으윽!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어느새 호위무사의 솥뚜껑 같은 손에는 소년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팔척 장신인 호위무사가 수풀 속에 있던 소년의 목덜미를 잡아 챈 것이다.
소년은 바로 이회옥이었다. 그는 오늘도 여느 날처럼 훈련을 하기 위하여 산해관 북쪽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길게 뻗은 천마산(天馬山)의 끝자락을 올랐다.
이곳은 비룡이 달리기 좋은 너른 초지와 더불어 산세가 제법 가파른 비탈이 있기에 체력 단련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발목과 허리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가죽끈이 달린 것을 착용한 채 봉을 휘두르면서 이곳을 오르내리는 것이 요즘의 일과였다.
청룡무관의 연무장에서 그토록 달리는 연습을 하였건만 처음엔 언덕을 오르는 것이 무척이나 힘겨웠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도전한 끝에 요즘엔 평지처럼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회옥은 산해관이 한 눈에 잡히는 이곳을 가장 좋아하였다. 이곳에서 보면 거대한 장원들도 손가락 만하게 보였고, 사람들은 개미처럼 작아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 괜스레 자신이 위대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이곳으로 오르는 것이다.
그리곤 비룡이 널찍한 초지를 마음껏 달리는 동안 이곳에서 독서를 하곤 하였다. 하여 오늘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화려한 가마가 보였고, 취록색 궁장을 걸친 소녀가 보였다.
늘 혼자 지내는 이회옥으로서는 오랜만에 보는 같은 또래 소녀였다. 하여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가 졸지에 호위무사에게 잡혀 올려진 것이다.
"이놈! 네놈은 누구냐? 무슨 의도로 이곳에 올라왔느냐?"
"으윽! 아, 아파요. 이거부터 놔주세요."
"흥! 어림도 없는 수작! 네놈은 아씨를 해하려고 왔지?"
"아악! 아씨라니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이놈! 네놈의 손에 들린 것은 무엇이냐? 보아하니 봉인 모양인데, 그것으로 아씨를 어쩌려 하였느냐? 어서 말하지 못할까?"
호위무사는 엄한 표정을 지으며 더욱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의복 때문에 숨이 막힌 이회옥은 손발을 버둥거렸다. 웬일인가 싶어 잠시 어리둥절하였던 소녀는 이 모습을 보고 실소를 머금었다. 버둥거리는 모습이 너무도 웃겨 보였던 것이다.
"킥! 그냥 놓아줘요!"
"안 됩니다. 아씨! 이놈이 어떤 의도로…"
"놔줘도 상관없잖아요. 그냥 놔줘요."
"으윽! 아, 아저씨 아파요. 먼저 이것부터 놓고… 캑캑!"
추수옥녀의 말에 슬그머니 이회옥을 내려놓던 호위무사는 그래도 정체 파악을 해야겠다는 듯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네 이놈! 이실직고하지 못할까? 왜 봉을 들고 수풀 속에 숨어 있었느냐? 무슨 이유로 아씨를 해하려 하였느냐?"
"캑캑! 아저씨, 대체 무슨 소리예요? 저는 여기서 책을 보다가 무슨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린 것뿐이에요."
이회옥은 갑자기 당한 것이 억울하다는 듯 자신이 있던 수풀을 가리켰다. 그곳은 사방이 잡초로 우거져 있어 안에 모아 놓은 건초가 바람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는 곳이다.
덧붙이는 글 | [알리는 말씀]
드디어 "<풍자무협소설>전사의 후예"가 오마이뉴스로부터 고정 연재실을 배정 받았습니다.
현재 "문화면" 좌측 연재 목록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잉걸"이나 "생나무 목록"에서 찾는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어 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연재의 성실도, 독자의 반응, 기사의 수준을 고려하여 메인 화면 좌측에 있는 "오마이뉴스 시리즈"로 배치되기도 한다는군요.
한시바삐 그곳에 자리를 배정 받아 여러분들의 수고를 조금 더 덜어드렸으면 하는 것에 제 소망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앞부분을 못 보신 분은 죄송하지만 앞부터 읽어 주십시오.
나중에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기원하면서...
제갈천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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