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오기만 기다렸단 말이야"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43> 삼겹살

등록 2003.01.20 13:02수정 2003.01.2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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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찬

"어이구, 이게 누구신가? 오마이뉴스 12월의 뉴스게릴라로 선정된 그 유명한 기자 양반 아니신가?"
"그 거 아무나 선정되는 거 아닌데... 정말 축하하네."
"하여간 축하하네. 올해는 새해 첫 달부터 자네한테 좋은 일이 생기는 걸 보니, 이제부터 모든 것이 술술 풀릴 모양일세. 그간 고생한 보람이 있었네."


지난 토요일 오후에도 나는 어김없이 마산 부림시장 골목에 있는 '큰대포'란 간판이 붙은 허름한 그 집에 갔다. 큰대포? 그래. 나는 인근에 다닥다닥 붙은 '왕대포'란 말보다 그 큰대포란 이름이 훨씬 듣기가 좋았다. 큰대포란 이름만 떠올려도 마치 시골 아낙네의 넉넉한 인심과 갈치속젓 같은 고소한 정이 느껴지곤 했다.

매주 토요일 오후 5시쯤이면 조용하던 그 큰대포집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진다. 왜냐하면 그 맘 때쯤이면 마산의 문화재라 불리는 환경시인 이선관 선생님, 마산의 자존심이라 불릴만큼 마산을 사랑하고 마산을 지켜온 언론인이자 등산가 김호부 선생님, 한때 경남도민일보 논설위원을 맡았다가 지금은 여기저기 강의를 나가고 있는 언론인 김준형 선생님 등이 삼삼오오 몰려들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독특한 그림 세계를 펼쳐보이는 화백 현재호 선생님까지 가세했다. 현재호 선생님은 주로 물을 안주 삼아 소주를 즐겨 마셨다. 이선관 선생님과 김호부 선생님은 늘 맥주를 마셨고, 김준형 선생님과 나는 늘 막걸리를 마셨다. 이곳 막걸리, 그러니까 큰대포는 인근 중리에서 재래식 방법 그대로 빚은 아주 맛이 좋은 툭사발 막거리다.

"선생님! 안주 좀 드세요?"
"아니, 나는 술안주로는 물이 제일 좋아."
"어이~ 저거 자네 줄라고 산청에서 가져온 무공해 쌀이거든. 나중에 가져가게."
"이 선생님은요?"
"선관이 거는 새로 쩌어가(찧어가지고) 줄 끼니까 걱정 하지 말고."
"어어~ 분위기가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네. 축하선물로 농약을 하나도 안 친 무공해 쌀이라~ 그러면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지. 오늘 술값은 내 차지네."

우리들은 그렇게 저녁 9시까지 여러 가지 살아가는 이야기와 함께 이 지역의 문학예술에 대한 이야기, 지역 언론에 대한 이야기, 새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 등에 관해서 때로는 콧방귀를 뀌어가면서 제법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날 술값은 '술값을 받으면 저 분한테 혼납니더'라는 큰대포집 아주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김준형 선생님께서 냈다.


"이 쌀로 밥을 한번 해 먹어보라니까. 기름기가 쫘르르하게 흐르는 기 밥맛이 끝내 줄 끼라."
"하여간 고맙습니다"

그날 밤, 나는 김호부 선생님께서 택시 속에 넣어주신 한 말 가량의 그 산청 무공해쌀을 들고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내는 그때까지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귀여운 두 딸들이 '아빠~' '아빠~ 근데 그게 뭐야?' 하면서 쌀을 들고 들어오는 나를 반겼다. 나는 '이게 산청에서 난 무공해 쌀이란다' 하면서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 쌀을 씻어 즉시 밥을 했다.


"아빠! 내일은 일요일인데 왜 가?"
"월요일 아침 일찍 무슨 회의가 있단다. 그래서 내일 오후에 가봐야 돼."
"그럼 삽겹살은?"
"할머니께 구워달라고 그래라."
"할머니께서 구워주시는 삼겹살은 맛이 없단 말이야."
"똑 같은 삼겹살인데 뭐가 맛이 없어?"
"아빠가 해주시는 것이 제일 맛있단 말이야. 밥도 그렇고."
"그래. 아빠가 해주시는 밥은 반찬 없이 그냥 먹어도 정말 맛있어."

그날 밤, 나와 두 딸들이 기름기가 쫘르르 흐르는 그 달콤한 산청밥을 마악 먹고 있을 때 아내가 들어왔다. 아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한밤중에 갑자기 이게 무슨 난리냐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너거들은 아까 할머니집에서 밥 먹었잖아' 라며 맛있게 밥을 먹고 있는 두 딸들을 힐난했다.

"엄마, 쌀통 한 번 열어 봐. 아빠가 쌀 가져왔어."
"아빠가 무슨 쌀을?"
"산청에서 가져온 무공해 쌀이래."
"밥이 정말 맛있어. 엄마도 이 밥 좀 먹어봐."

다음날 아침, 두 딸들이 일찍 일어나 나를 흔들어 깨웠다. 겨울방학을 한 뒤부터 늘 늦잠을 잔다는 그 딸들이 웬일로?

"왜에~"
"아빠! 나중에 점심 때 삼겹살 해주면 안돼?"
"대낮부터 무슨 삼겹살?"
"일주일 내내 아빠 오기만 기다렸단 말이야."
"왜 삼겹살 때문에?"
"......"

어쩌지? 나는 이불 속에서도 오늘 일정을 꼼꼼히 따져봤다. 회의는 내일 아침이다. 하지만 내일 아침에 창원을 출발하면 거리가 멀어 아무리 서둘러도 회의에 참석할 수가 없다. 어쩌지? 그래. 일단 오늘 중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래. 저리도 성화를 부리는 딸들을 그냥 외면할 수가 없다. 오늘 저녁에 딸들에게 삼겹살을 구워주고 심야버스를 타고 넘어가자.

"아직 안 올라갔어요?"
"애들 저녁 해주고 올라가지 뭐."
"그래도 돼요?"
"조금 피곤하기는 해도 심야버스 타고 가지 뭐."
"하여튼 딸들한테는 지극 정성이라니까. 나한테 그 반 만큼만이라도 해봐요."
"아빠~ 최고~"
"아싸아~ 아빠 어제 먹은 그 쌀로 밥을 해야 돼."
"알았어."

점심 때, 나는 으레 딸들이 좋아하는 그 국밥을 끓여먹었다. 그리고 마악 설겆이를 하려 할 때였다. 둘째 딸 빛나가 생긋 웃으며 씽크대 가까이 다가왔다.

"왜?"
"아빠! 내가 설겆이 할까?"
"설겆이 할 줄 알아?"
"엄마 없을 때 내가 설겆이를 다 해"
"그으래? 이제 우리 빛나도 다 컸네"

삼겹살? 그래. 두 딸들이 내가 구워주는 삼겹살을 좋아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나는 삼겹살을 살 때 아주 얇게 썰어달라고 주문을 한다. 그리고 방앗간에서 막 짜 낸 참기름에 소금을 약간 넣고 기름장을 만든다. 연이어 대파를 얇게 송송 썰어 파저리를 만든 뒤 송송 썬 마늘과 풋고추를 준비한다.

삼겹살을 구울 때에도 센 불에 즉시 구워낸다. 이 때 고기를 대충 익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세게 굽는 편이다. 과자처럼 약간 노릇노릇할 정도로. 그리고 밥을 할 때에는 찹쌀을 약간 섞은 뒤 식용유를 한두 방울 떨어뜨린다. 그래야 밥에 기름기가 쫘르르 흐르면서 찰지고 맛이 난다.

"자, 밥 먹기 싫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된다."
"우와! 근데 언제 이 많은 걸 다 준비했어? 아빠."
"금방."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날 저녁, 삼겹살이 놓인 저녁을 먹는 두 딸들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높고 맑았다. 근데 둘째 딸 빛나가 갑자기 숟가락을 들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내가 '빛나 왜?' 하니까 아빠가 수저를 먼저 들 때까지 기다린다는 거였다. 빛나의 목에서는 연방 침이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수저를 들었다. 그날 나는 볼이 미어터져라 삼겹살을 먹고 있는 두 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배가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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