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서(答書)를 써 올 테니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요."
"예! 아씨."
선 채로 부친의 서찰을 읽던 추수옥녀 여옥혜가 한마디 말만 남긴 채 총총히 안으로 사라지자 왕구명은 검박한 정실 내부를 둘러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여옥혜는 산해관에 있을 때부터 몸치장보다는 세상 구경하기를 즐겨하였고, 남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헤아릴 줄 아는 보기 드문 규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제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사치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던 터였다. 그런 기대에 전혀 어긋남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산해각(山海閣)이라 이름 붙은 이곳은 남해에 도착한 이후 보아왔던 모든 전각과는 확연히 달랐다. 말이 전각이지 실상은 중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허름한 초옥(草屋)이었다. 그나마 누군가가 쓰던 것을 대충 손보아 쓰고 있다는 것이 역력하였다.
서까래에 걸려있는 오래 된 거미줄과 여기저기 쌓여 있는 묵은 먼지가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반면, 이곳에 당도하지 전까지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다른 전각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둥마다 명필(名筆)의 주련(柱聯)이 걸려 있었고, 편액 가운데에서도 예사로와 보이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오색찬란한 단청은 기본이었고, 유리 기와를 얹거나 아예 칠보로 만든 기와를 얹은 전각도 있었다. 심지어는 기둥마다 금박을 입혀 찬란한 황금빛을 발하는 전각도 있었다.
본시 보타산에는 무림의 이인(異人)인 보타신니와 그 제자들이 머무는 청정도량인 보타암(普陀庵)만이 동그마니 있던 곳이다.
이곳의 비구니들은 한결같이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특히 검법에 일절을 이루고 있었다. 하여 강호에서도 보타암 출신이라면 한 걸음 물러서곤 하였다.
소림 검법의 최고봉인 수미혜검식(須彌慧劍式)이나, 무당파의 태청검법(太淸劍法)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전혀 없는 검법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이곳에 이토록 화려한 전각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삼십여 년 전부터였다. 그러니까 무림천자성이 천하의 패권을 움켜쥐다시피 한 이후부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격한 기준으로 제자를 선발하던 보타신니는 웬일인지 무림천자성에서 보낸 여인들에게만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무공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당시 보타암에는 비구니들만 기거할 공간이 있었을 뿐이었다. 하여 새롭게 보내진 여인들을 위한 전각을 지어야 하였다. 그래서 처음에 지어진 것은 중원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허름한 초옥들이었다.
그것들은 무림의 정의를 수호한다는 정의수호대의 대원이 되기 위한 관문 돌파에 자신이 있을 때까지만 머물다 떠날 것이기 때문에 아무런 치장도 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것들이 조금씩 치장되는가 싶더니 아예 새로운 전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기와를 얹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바뀌어 갔다. 여인들이라 함은 본능적으로 치장하기를 좋아하고, 남과 견주기를 좋아한다. 이곳에 오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천하에 산재한 무천장 장주의 여식들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이 오만하고 사치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남보다 초라해 보이는 것을 참을 수 없던 그녀들은 앞 다퉈 전각을 화려하게 치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편액에 자신의 고향을 나타냈다.
그래서 이곳에 서안각(西安閣), 낙양각(洛陽閣), 금릉각(金凌閣), 곤명각(昆明閣) 등의 편액이 걸린 전각들이 즐비한 것이다.
이것도 잠시였다. 전각은 차츰 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각 전각마다 시비들이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엔 한·두 명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열두 시비를 거느린 전각도 있었다.
하루종일 무공을 익히고 피곤한 몸으로 돌아온 여인을 위한 시비뿐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겠다. 음식을 하거나 빨래를 하는 등의 잡다한 일을 하는 대신 휴식을 취하거나, 부지런히 무공을 연마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인원이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외인의 침입이 용이하지 않은 섬이다. 사면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나는 새가 아니라면 난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타암에 오르려면 인공적으로 뚫어 놓은 길고 긴 통로를 지나는 방법뿐이다. 그나마 중간 중간 기관이 설치되어 있어 안에서 열어주기 전에는 절대 들어설 수 없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절대적으로 안전함에도 불구하고 각 전각에서는 경쟁적으로 호위무사들을 데려다 놓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수효 역시 처음엔 한 둘뿐이었으나 차츰 늘어 어떤 전각에는 무려 이십여 호위무사들이 배속되어 있는 곳도 있다.
이곳에 오는 여인들은 대부분이 십사오 세 이상이다. 하지만 어떤 여인은 이십이 넘어서 오기도 한다. 처음 이곳에 온 여인들은 오 년 정도 무공을 익히고 관문에 도전하는데, 칠 할은 관문 돌파에 성공하나 나머지는 탈락된다.
그렇게 되면 일 년은 더 무공을 익혀야 한다. 이 경우 열넷의 나이에 왔다면 나이 이십이 되어야 섬을 떠날 수 있게 된다.
그 전에는 섬을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부친의 무천장주라는 직위가 즉각 박탈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관문에 돌파한 후 섬을 떠난다 하더라도 정의수호대원으로서 적어도 오 년은 근무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혼기(婚期)를 놓치게 될 것이다. 꽃다운 방년(芳年)을 오로지 무공 익히기와 정의수호대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전념하여야 하는 여인들에겐 가혹하다면 가혹한 시간일 것이다.
이런 사정을 충분히 짐작하기에 어떤 여인들은 남몰래 무공을 익히고 들어왔다. 그렇게 하면 관문 돌파에 조금 더 유리할까 싶어서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이 년이라도 시간을 번다면 어쩌면 적당한 배필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처음 그렇게 한 여인들은 남들보다 훨씬 빨리 관문 돌파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 머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요즘에는 모두가 무공을 미리 익히고 오는 바람에 정의수호대원이 되는 관문의 수준만이 강화되었을 뿐이다. 아무리 무공을 익히고 왔다 하더라도 여전히 오 년 정도 무공을 익혀야 간신히 관문을 돌파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십여 년 전, 열 일곱의 나이에 보타암에 든 여인이 있었다. 그녀에게는 남몰래 연모하는 사내가 있었다.
여인은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장문의 서찰을 썼다. 그리고 석 달 후, 처음으로 보타암에 발을 들여놓는 사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이곳 최초의 호위무사였다.
그가 정인(情人)이라는 사실은 철저한 비밀에 붙여졌다. 그렇기에 다른 여인들은 그저 호위무사인 것으로만 알았다. 그래서 다른 여인들도 앞다퉈 호위무사들을 들여놓았다.
그러던 것이 차츰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아무런 낙도 없던 여인들은 심심하면 각 전각에 배속된 호위무사들의 외모에 대한 점수를 매기기 시작하였다.
그렇기에 호위무사들은 점점 더 젊은 청년으로 바뀌어 갔고, 그들의 외모 또한 수려해졌다. 따라서 현재 이곳에 있는 호위무사 가운데에는 무공이라곤 전혀 모르는 백면서생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은 무천장 장주의 여식과 혼례를 올리면 적어도 일평생 재물 걱정은 하지 않으면서 호의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온 자들이 태반이었다. 그래서 어쩌다 학문은 익혔으나 대과에 응시하여 급제할 자신이 없는 서생들 가운데 외모에 자신이 있는 자들은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부근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항주에는 진회하(秦淮河)가 있기에 오랜 세월 동안 색향(色鄕)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그렇기에 유독 기녀들이 많은 곳이다. 하지만 요즘엔 기녀들보다 반반한 외모를 지닌 서생들이 많다고 한다.
보타암으로 들어가는 배에 승선하기 위함이었다. 그곳에 들어갔던 서생들 가운데 팔자를 고친 자들이 여럿 있다는 은밀한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무천장의 여식들과 인연을 맺지 못한다 하더라도 후한 보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어머! 저, 계집애 좀 봐!"
"흥! 글세 말이야. 하는 짓은 독오른 암고양이처럼 표독하게 굴면서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사내가 그리웠던 모양이지?"
"호호! 그러게 말이야. 뒷모습만 보면 별론 데… 저 정도 사내라면 떼로 갔다 줘도 싫다. 얘!"
"호호! 호호호! 그러게 말이야! 나도 싫어."
"어머! 모르는 소리는 하지도 마. 너희들은 돼지 잡을 때 얼굴 보고 잡니? 돼지는 못 생겼어도 고기는 맛이 좋지. 사내들은 말이야 일단 벗겨 놓고 맛을 봐야… 어머! 내가 무슨 말을…?"
"호호! 호호호! 계집애, 그러면서도 지금껏 사내 맛을 모른다고 시침을 뚝 뗐어? 에라, 요 앙큼한 계집애야!"
"호호호! 호호호호…!"
야트막한 담장 밖에서 머리만 삐죽 내민 채 지금껏 안을 들여다보던 여인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뻣뻣한 자세로 눈알만 굴리던 왕구명은 밖을 힐끔 바라보았다. 거기엔 하나같이 박색인 여인들 예닐곱이 있었다.
"어머! 어머머머!"
"허억…!"
왕구명의 진면목을 본 여인들은 일제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뒤에서 볼 때에는 별로인 듯 하던 그의 외모가 예상외로 준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여인들 가운데 하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덧붙이는 글 | [안내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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