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31

사라와 유라 (1)

등록 2003.01.28 13:55수정 2003.01.28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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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라와 유라

"하하하! 좋아, 좋아! 장주의 수고가 많았다."
"헤헤! 소인은 그저 소성주님께서 조금이라도 편히 쉬시라고 조그만 준비를 했을 뿐인데 너무 과찬이십니다."


"후후! 그으래…? 정말 그것뿐인가?"
"물론입니다. 그러니 편히 쉬십시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편안한 밤이 되시길 빕니다."

"후후후! 알겠다. 너의 충정을 기억해 두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모든 물산(物産)이 풍부하다는 안휘성(安徽省) 합비(合肥)에서도 가장 화려한 영빈객잔(迎賓客棧)의 너른 후원에서 호탕한 웃음소리에 이어 간사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터져 나왔다.

무림천자성의 소성주 철기린 구신혁의 앞에는 이곳 합비를 관장하는 무천장 장주인 마면호(馬面狐) 안형(安炯)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싹싹 비비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외호에서 알 수 있듯 말 대가리처럼 길었다. 그것은 유난히 긴 주걱턱 때문이었다. 마면호의 아부는 무림천자성에서도 유명하였다.

이십여 년 전, 투전판에서 은자나 뜯으며 천하를 유랑하던 그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합비에서도 고지식하기로 소문난 훈장의 일점혈육이었다.


그녀는 일 년에 딱 한번 모친의 기일에만 불공을 드리러 외출을 한다 하였다. 마침 절엘 다녀오는 그녀를 본 것이다. 마면호는 그녀를 어떻게 해보고 싶어도 집 안에만 있기에 가슴 답답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지식한 훈장이 저잣거리에 발걸음을 하자 눈에 잘 띄는 곳에서 야바위판을 벌렸다. 곧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물론 바람잡이들이었다.


탄성과 함성이 교차하는 소리에 궁금증이 생긴 훈장은 슬그머니 구경꾼들 틈에 끼어 무슨 일인가 살폈다. 야바위는 엎어놓은 세 개의 술 잔 가운데 어느 술잔 속에 주사위가 들어 있는지를 맞추는 것이었다.

마면호는 처음엔 천천히 움직이다가 차츰 빠른 속도로 주사위를 이리저리 옮겼다. 그리고는 맞춰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은자를 걸었다. 간혹 맞추는 사람도 있었지만 못 맞추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맞춘 사람에게는 건 돈의 두 배를 주었다.

사람들은 너무도 어렵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훈장의 눈에는 너무도 쉬웠다. 너무도 뻔한 것을 왜 맞추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든 훈장은 슬그머니 걸어 보았다. 그리고는 건 것의 두 배를 받았다.

이날 그의 품에는 구리돈 삼 문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집에 갈 때 그의 품에는 은자 열 냥이 있었다. 간신히 소면 한 그릇 사먹을 푼돈으로 엄청난 거금을 딴 셈이다.

다음날 그는 제 발로 야바위판으로 왔다. 그의 품에는 어제 딴 열 냥이 그대로 있었다. 이 날엔 무려 백 냥이나 딸 수 있었다.

그 날 밤, 그 훈장은 밑천이 작아 백 냥 밖에 못 딴 것이 못내 아쉬워 밤새 한 잠도 이루지 못하였다. 만일 백 냥을 걸었다면 천 냥을 땄을 것이고, 천 냥을 걸었다면 만 냥을 땄을 것이다.

그랬다면 평생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었기에 아쉬움은 너무도 컸다. 그리고 그 정도 재물이 있다면 명문 세도가와 사돈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치 제 돈을 잃은 듯 배가 아파 밤새 잠 못 이룬 것이다.

아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고지식한 성품인 훈장에게는 합비제일미녀라 불리는 몰성항아(沒星嫦娥) 유옥려(兪玉麗)라는 여식이 있었다. 별빛조차 희미해 질 정도로 아름답다는 그녀는 방년 십팔 세였다.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훈장은 전 재산을 들고 다시 야바위판을 찾았다. 이날 마면호는 훈장을 보자마자 너무 실력이 좋으니 제발 걸지 말라고 통사정을 하였다.

이에 훈장은 아무나 할 수 있다고 하고선 왜 갑자기 말을 바꾸냐며 역정을 냈다. 입씨름 끝에 마면호는 할 수 없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판을 벌였다. 이제 거부(巨富)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 생각하여 회심의 미소를 지은 훈장은 품속의 은자를 꺼냈다.

처음엔 다른 날처럼 계속해서 땄다. 그런데 한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큰판이 벌어졌다. 이날 그는 집으로 가면서 통곡을 하였다. 지니고 왔던 은자 백 냥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판에서 선택을 잘못하는 바람에 거의 이천 냥이나 땄다가 한꺼번에 잃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여전히 은자를 열 냥이나 딴 셈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산으론 그게 아니었다.

은자를 무려 이천 냥이나 따고 있었는데 그걸 모두 잃고 본전이었던 백 냥을 더 잃었으니 무려 이천백 냥이나 잃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속이 쓰려 통곡한 것이다.

다음 날 훈장은 또 야바위판을 찾았다. 그를 본 마면호는 어제는 하마터면 전 재산을 잃을 뻔했다면서 다시는 안 하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가벼운 입씨름 끝에 판은 다시 벌어졌다.

이날은 다른 날과는 전혀 달랐다. 판이 시작되면서부터 한번도 맞추지 못하는 불운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결국 훈장은 전 재산을 잃고, 하나뿐인 여식까지 잃고 말았다.

그때까지 겁먹은 표정을 짓던 마면호는 즉각 안면을 바꿨다. 그리고는 훈장의 집을 팔고 몰성항아를 잡아왔다. 훈장이 잘못 했다면서 애원을 했지만 마면호는 싸늘한 비웃음만 지었을 뿐이다.

결국 훈장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잃었다며 절망하다가 소나무에 목을 매 저승으로 향하였다.

한편, 졸지에 끌려나온 몰성항아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구나 싶어 눈물지었다. 징그러운 마면호에게 청백을 잃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날부터 무려 반년 동안이나 몰성항아는 마면호 덕에 지금껏 누려보지 못한 호강을 할 수 있었다. 매일 입에서 살살 녹는 진수성찬을 맛보았고, 향기 그윽한 꽃잎을 띄운 물에 수욕을 할 수 있었으며, 네 명의 시비가 온갖 시중을 들어 주었다.

게다가 금기서화(琴棋書畵)까지 익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웬 노인에게 보내졌다. 당시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력을 확장하던 무림천자성의 성주 화롱철신 구린탄이었다.

그 날 밤, 그녀는 파과(破瓜)의 고통에 발버둥치면서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이미 칠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절륜한 정력으로 유난히도 색을 밝히던 그가 꽃다운 그녀를 그냥 둘 리 없었던 것이다.

유옥려는 놀랍게도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명기(名器)의 소유자였다. 하여 화롱철신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한편, 마면호는 몰성항아를 바친 덕에 일약 합비 무천장의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된 이후 막강한 권력으로 은자를 긁어모은 그는 떠돌이 낭인들을 고용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몰성항아와 같은 미모를 지닌 여인이라면 은자 만 냥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 하였다.

둘째, 그 여인이 청백을 지니고 있다면 또 다시 만 냥을 지불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낭인들은 눈빛을 빛내면서 흩어졌다. 그들에게 있어 은자 만 냥이면 글자 그대로 팔자를 고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마면호는 낭인들에게 은자 육만 냥을 지불하였다. 청백을 지닌 절세미녀 셋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예절 교육을 받은 뒤 차례로 화롱철신에게 헌납되었다. 둘은 질녀라 하였고, 하나는 여식이라는 거짓말을 보탰다. 이에 화롱철신의 신임이 한 몸에 부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여 그에게는 특별히 무공비급이 하사되기도 하였다.

덕분에 제법 고강한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마면호는 절세미녀를 찾는 한편 수시로 총단을 드나들며 온갖 아부를 다하였다. 그러던 중 화롱철신이 복상사를 하는 불상사가 있었다.

이날 이후 그는 신임성주인 철룡화존에게 미녀들을 상납하는 일을 하였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이 있다.

신임 궁주인 철룡화존이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그 역시 화롱철신 못지 않게 색을 밝혔다. 덕분에 마면호는 점점 더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자식들만은 특별히 정의수호대에 차출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거들먹거릴 만도 하지만 마면호는 그러지 않았다. 신임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욱 허리를 굽히며 두 손을 마주 비볐다. 하여 일각에서는 무문마두(無紋馬頭)라는 외호로 불리기도 하였다. 어찌나 아부가 심한지 '손가락의 지문이 모두 사라진 말 대가리'라는 외호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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