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82

미친 늙은이 (2)

등록 2003.03.22 12:31수정 2003.03.22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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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어, 이 댁에서 의원을 찾으시었습니까?"
"엇! 의원…? 그래, 의원은 어디에 있느냐? 그리고 넌 누구냐?"

"예, 소생이 바로 의원입니다."
"뭐라고? 이런 쬐끄만 놈이…! 야, 임마! 이런 위급한 판에 어디서 장난질이야? 어서 썩 꺼져! 어서 가란 말이야!"


의원을 찾았느냐는 소리에 반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던 장년인은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장일정을 보고는 버럭 화를 냈다.

장일정의 나이는 분명히 열여섯이다. 하지만 겉모습은 불과 열셋이나 넷 정도로 보인다. 그렇기에 장난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저어, 아저씨! 전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저 아이는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독이 전신으로 번져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어요. 그러니 소생이 손을 쓸 수 있도록…!"
"뭐라고…? 너, 빨리 안 나가?"

"아저씨, 저 정말 의원이에요. 믿어 주세요."
"이런 빌어먹을 놈이…? 여봐라, 당장 이놈을 끌어내라:"

장한은 여전히 버티고 선 장일정을 쥐어박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 소년을 붙잡고 드잡이 질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여 하인들로 하여금 끌어내라 명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장일정은 끌려나가지 않았다.

하인들의 손길을 피해 몇 걸음 움직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껏 미약한 신음을 토하던 소년이 갑작스럽게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으으으! 으으으으…!"

상황으로 보아 독이 전신으로 번진 것이 분명하였다.

이 상태로 반각 정도만 지나면 절명(絶命)하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아악! 명, 명아야! 안 돼! 명아야, 정신을 차려. 응? 어서 정신을 차리라고… 명아야! 어미가 왔다. 어서 정신을 차려! 흐흑!"
"여, 여봐라! 의원을 부르러 간 노삼은 아직 안 왔느냐?"
"아, 아직…!"

장년인의 말에 하인들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노삼이 의원을 데려 오려면 아직 한참 더 있어야 할 것이다. 의원의 거처가 워낙 먼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인들의 얼굴에는 소년의 죽음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역력하였다.

"안 돼, 명아야! 너 없으면 이 어미가 어찌 살라고… 흐흑! 명아야! 흐흐흑! 명아야, 제발 정신 좀 차려보렴. 응? 명아야! 네가 어떻게 되면 이 어미는 죽는다. 그러니 어서 정신을 차려. 응?"
"으으으으음…!"

여인의 울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장년인의 입에서는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청색으로 물들었던 아들의 입술이 점차 시커멓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술에 문외한인 사람이 보아도 이제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도련님!"
"아아! 도련님!"

장일정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소년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일제히 소리쳤다.

이때였다!

장일정은 물을 떠오는 시비의 손에서 물그릇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한 발짝 나서며 소리쳤다.

"아저씨, 지금 비켜 주시면 아들을 살릴 수 있으나 그렇지 않으면 죽습니다. 그러니 어서 비켜주십시오."
"……!"

장일정의 소리에 고개를 돌린 장한의 얼굴에는 순간적으로 분노의 빛이 감돌았다.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천둥벌거숭이처럼 구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비켜주지도 않았다. 그저 장승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이제 불과 몇 각 후면 하나뿐인 아들이 죽게 될 것이다.

그에게 있어 아들은 희망이었으며, 기쁨이었다. 혼례를 올리고도 무려 십 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어 노심초사하던 끝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은 네 살 때 논어(論語)를 읽었다. 세상에 다시없을 신동이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년의 학문은 일취월장(日就月將)하였다. 하여 이제 불과 일곱 살이지만 학식만큼은 웬만한 서생 뺨을 칠 정도였다.

게다가 효심은 어찌나 지극한지 감탄할 때가 많았다. 소년이 아직 여섯 살인 작년 겨울, 어느 날 아침의 일이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장년인은 머리맡에 앉아 있는 아들을 보고 의아해 하였다. 그러자 아들은 빙그레 웃으면서 품에 있던 신발을 꺼내들었다.

그러면서 말하길 오늘 출타를 하신다고 들었는데 발이 시릴까봐 품에 넣어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책을 보니 어떤 효자가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장년인은 콧날이 시큰해지고 눈두덩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 자식의 기특함이 감격으로 다가와 자칫 눈물을 보일 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너무도 허망하게 죽음에 이르러 있으니 무슨 말이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장일정은 소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년인을 밀치고 갈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만 같아서였다. 하여 물그릇을 들고 잠시 서 있었다.

이 순간이었다.

카랑카랑한 노인의 음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껏 소년을 안고 오열하는 여인을 측은하다는 듯 내려다 보며 나직이 혀를 차고 있던 노인이었다.

"애비야, 무엇 하느냐? 어서 비켜서거라!"
"예? 아, 아버님!"
"어서 비켜서라고 하였다. 의원이 왔으니 비키란 말이다."

장년인은 부친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앞에 물그릇을 들고 있는 어린 소년더러 의원이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여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부친을 바라보니 정작 그의 시선은 다른데 있었다. 노인의 시선은 노삼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인물에게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노삼은 데리러 가려던 의원이 마침 부근에 왕진(往診)왔다는 소문을 듣고 황급히 수소문하여 데리고 온 것이다.

"어, 어서 오시오."

장년인이 다가오는 의원을 보고 반색하는 순간 장일정은 소년에게 다가가며 품에 있던 생사잠을 물그릇에 담가 휘휘 저었다. 이 순간, 소년은 모친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막 숨이 끊어졌는지 축 늘어지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여인은 입을 벌린 채 부들부들 떨기만 할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품안에서 죽었기에 너무도 슬퍼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한편 다가서던 의원은 소년이 축 늘어지는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다가와 그의 맥문을 짚었다. 그리고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이보시게. 왜 그냥 일어나는가? 엉? 우, 우리 명아를 살려야지… 이, 이보시게. 어디를 가는가? 응? 우리 명아를 살려야지 어디를 가느냔 말이네."

장년인의 말에도 불구하고 의원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다가 아주 작은 음성을 토해냈다.

"으음! 자제 분께서는 이미 숨졌소이다. 독이 골수에 치밀어 손을 쓸 방도가 없소이다. 죄송하외다."

말을 마친 의원은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종종 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이 순간 장년인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의원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의원은 많다. 그 가운데에는 돌팔이도 있지만 간혹 명의(名醫)도 있다. 방금 전에 왔던 의원은 자타가 공인하는 황도최고의 실력을 지닌 의원이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황궁에서 천자의 환후를 보살피던 어의(御醫)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일부러 그를 불러오라고 노삼을 보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맥을 짚어 보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함은 제아무리 현묘한 의술을 지닌 의원이 온다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제 장례 치를 일만 남은 것이다.

그렇기에 장년인은 물론 그의 부친인 노인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까지 모두 넋이 반쯤 빠진 사람들처럼 멍해 있었다. 이 순간 유일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장일정이었다.

모친이 안고 있던 팔에서 힘을 뺐는지 스르르 쓰러지는 소년을 받아 안은 그는 그릇 속의 물을 입안으로 흘려 넣고 있었다.

맹독에 중독되면 고열이 나고, 전신이 퉁퉁 부어 오르기 마련이다. 이로 인하여 겉으로는 맥이 멈춘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물론 이런 상황에 다다랐다면 독이 이미 골수까지 치밀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렇기에 잠시 후면 실제로 맥이 끊어지게 된다.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금 전 진맥을 했던 의원의 처방은 정확한 것이다.

아무튼 물이 입안에 가득 찬 것을 확인한 장일정은 가볍게 인후혈(咽喉穴)을 쳤다. 이미 숨이 끊긴 상황이었기에 환자 스스로 물을 마실 수 없기 때문이었다.

꼬르륵 소리와 함께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는 순간 이런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은 소년의 모친인 여인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 장일정은 품에서 침을 꺼내든 후 이곳저곳에 시침을 하였다.

"흐흐흑, 도련님! "
"도련님! 흐흐흐흑…!"

시비인 듯한 여인들이 일제히 곡을 시작하자 사내들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며, 명아야…!"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년인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에는 힘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아들의 죽음은 모든 희망이 사라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흑! 명아야! 흐흑! 이 어미는 어쩌라고…? 이 나쁜 놈아! 이 어미는 어쩌라고 먼저 가냐? 흐흑, 명아야! 흐흐흑! 여보 뭐해요? 우리 명아 좀 살려봐요. 흐흑! 살리란 말이에요. 흐흐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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