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 그때 총알 뺀 자리 아이가"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64> 아버지의 전쟁

등록 2003.03.31 15:37수정 2003.03.31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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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찾아낸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우연히 찾아낸 젊은 시절 아버지의 모습 ⓒ 이종찬

오늘도 미국은 초조하다. 특히 전쟁을 지시한 부시 대통령의 속은 지금쯤 이라크 전역을 태우는 화약연기처럼 꺼멓게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한가지 우스운 것은 그들이 벌인 전쟁을 어쨌거나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그 전쟁에 참가한 미·영 부대를 연합군이라고 부른단다.


어째서 그들이 연합군인가. 연합군이라면 최소한 유엔의 동의를 얻어 유엔 산하의 여러 나라에서 파병된 부대를 통틀어 연합군으로 불러야 옳은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 방송사들도 마찬가지다. 연일 이라크 전쟁에 대한 속보를 전하고 있는 방송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전 세계의 군인들이 이라크에 파병되어 연합작전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그 와중에 일부 미군들은 이라크의 게릴라 전술과 모래폭풍 등에 지쳐 벌써 귀국하고 싶어한다고 영국 BBC방송에서 보도했다고 한다. 미국이 바그다드 공격을 더욱 강하게 밀어 붙힌다는 방침을 거듭 밝히고 있는데도 말이다. 또 곪은 부위의 살점만 정밀하게 도려내듯이 정확하게 폭격한다는 미국의 그 대단한 미사일이 이라크의 민간인 마을을 폭격해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냈다고 한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이번 전쟁은 아무리 짧은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보아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런 전쟁을 두고 아마도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일게다. 연일 마치 전쟁영화를 보는 것 같은 이라크 전쟁을 지켜보면 지난 해 가을, 끝내 치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자꾸 떠오른다.

내가 어릴 적, 우리 아버지는 들판에서 허리가 부서져라 일을 하신 뒤 노을이 뉘엿뉘엿 질 때면 으레 소풀을 한짐 가득 지고 긴 그림자를 끌며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간혹 마을에서 절친한 용술이 아저씨와 술상이라도 마주하게 되면 한국전쟁 이야기를 꺼내셨다. 아버지께서 직접 참전했던 그 참혹했던 전쟁이야기를 말이다.

"신작로가 박산도 내 아니었으모 그때 벌써 죽었다카이"
"그래. 내도 그 이야기로 니한테 몇번이나 들었다 아이가. 아마도 오늘 들은 거까지 합치모 대략 백번쯤은 될끼거마는"
"그날도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난 뒤였다 아이가. 우리 의무병들은 원래 그 틈을 타서 잽싸게 아군 진지를 돌아다니며 사상자들을 파악하고, 부상이 심한 사람들은 후송을 시키곤 했거든"


한국전쟁 때 우리 아버지는 의무하사였다.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아버지께서 의무하사가 된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에는 의무병들도 일선에 서서 적을 막아야만 했단다. 그러나 대부분 후방에서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고 하셨다.

그날도 적과 아군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다가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있었을 때였다. 그 틈을 타서 아버지와 의무병 몇몇은 아군 진지를 돌아다니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부상이 심한 군인들은 들것에 실어 일단 천막으로 만든 간이병원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진지 곳곳에서는 살려달라는 아우성과 비명소리가 뒤범벅이었다. 특히 가장 괴로운 일은 팔다리가 다 날라가고 없는 처참한 상태에서도, 그러니까 살 가망이 전혀 없는 그런 군인들이 제발 살려달라고 하면서 애처로운 눈빛을 보낼 때였다. 상급관의 지시에 따르자면 그런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사살을 시켜야만 했다. 다시 말하자면 안락사를 시키라는 그런 명령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랬다. 아버지의 전쟁이야기가 그쯤 흐를 때면 으레 용술이 아저씨는 그래서 그런 때는 총을 쏘았어? 라며 호기심 어린 눈빛을 빛내곤 했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 아버지께서는 늘 결론을 내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어느새 박산 이야기로 화제를 슬며시 돌리곤 하셨다.

참, '박산'이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당시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마을 아버지들을 부를 때 성 뒤에 '산' 이라는 말을 붙혀 택호처럼 사용했다. 박산, 김산, 이산, 최산, 서산 등.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산'이라는 말은 아마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사용했던 '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아따! 이 양반은 와 이래 무겁노?"
"키가 전봇대 만하이 뼈다구 무게라도 안 있것나"
"이런 말로 하모 죄 받는 일이 될랑가는 몰라도 우쨌거나 이 양반은 행운아다, 행운아"
"와?"
"다리에 총상을 입었으이 일단은 후방조치가 떨어질 끼 아이가"

그때였다. 갑자기 들것에 누워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 아버지 더러 니 이산 아이가, 라며 아는 척을 하더란다. 당시 깜짝 놀란 아버지께서 그 부상자를 자세히 살펴보니, 그 부상자는 바로 같은 동네에 사는 박산이었단다. 당시 박산은 너무나 끼쁜 나머지 아버지를 부여안고 이젠 살았다, 이젠 살았다, 라며 한동안 꺼이꺼이 울더란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제? 그런 거로 보고 바로 기적이라 캐야 안 되것나"
"하여튼 너거는 전생에 머슨 깊은 인연이 있었꺼마는. 안 그라모 우째 그 넓은 전쟁터에서 니로 만났을끼고"
"그래가꼬 내가 퍼뜩 박산을 후방조치해야 된다꼬 소견서를 올렸다 아이가. 결국 내 소견서 때문에 박산은 바로 부산으로 후송조치 됐고. 그라이 지금도 박산이 내만 보면 생명의 은인이라 안 카나"

당시 박산을 후송조치한 아버지께서는 전투부대를 따라 신의주까지 올라가셨다. 하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아버지께서는 소속된 그 사단과 함께 중공군들에게 포위되었다가 원산항을 통해 부산으로 탈출하셨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도 결국 그 전쟁에서 허벅지에 총을 맞고 말았다.

"희한한 넘들이제. 쏘아도 쏘아도 여기저기서 산토까이(산토끼)처럼 끝없이 툭 툭 튀어나오는데, 환장하겠더마는. 그라고 더 환장하는 일은 달밤에 피리로 불고, 괭과리까지 치면서 사람들을 마구 홀린다 아이가"
"니도 장구카모 안 알아주나. 글마들이 그랄 때 니도 같이 치뿌지?"
"택도 없는 소리. 그때 우리 사단이 사방팔방으로 포위되어 있었는데, 그라다가 바로 아군들한테 총살 당할라꼬"

평소 아버지는 말이 없으셨다. 하지만 용술이 아저씨와 술상을 마주하고, 술이 서너 잔 돌 때면 전쟁이야기를 생중계하듯이 생생하게 말씀하시곤 하셨다. 그리고 그쯤에서 바지를 허벅지까지 끌어올리시며 이기 그때 총알 뺀 자리 아이가, 하시면서 허벅지에 난 그 총상흉터를 보여주시곤 하셨다.

나는 어릴 때 아버지의 전쟁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한국전쟁 때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일기장도 보았다. 당시 노랗게 변색된 그 일기장 사이 사이에는 어머니께서 예쁜 오색실을 보관하곤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그 와중에 어떻게 그때 상황을 그렇게 일일이 기록을 하셨는지, 일기장 곳곳에는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처럼 그 일기장도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다보면 안타까운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이던가. 그렇게 힘겨운 삶을 살아오신 아버지께서는 말년에 결국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 게다가 당시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기에 치매가 걸린 상태에서도 자식들만 바라보면 전쟁 우째됐노? 전쟁이 빨리 끝나야 될낀데, 라며 입버릇처럼 중얼거리셨다.

연일 이라크 곳곳이 불타는 장면을 바라보는 요즈음에는 자꾸만 아버지의 허벅지에 나 있던 그 흉터가 떠오른다. 그와 동시에 용술이 아저씨와 전쟁이야기를 하시며 긴 한숨을 포옥 내쉬던 아버지의 얼굴이 더욱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래. 이제 전쟁이 끝나더라도 우리 아버지처럼 이라크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그 전쟁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처참한 기억으로 영원히 남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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