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오는 날, 장족 부잣집서 보낸 하룻밤

[까탈이의 세계여행-성도 ②] 티벳 청년 거거우주

등록 2003.03.31 17:25수정 2003.04.01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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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린 구체구 초입의 전나무길
눈이 내린 구체구 초입의 전나무길김남희
사천성으로 올 때만 해도 구체구에 갈 예정은 없었다. 가고 오는 데에만 꼬박 이틀이 소요되고, 겨울이라 춥기도 해 다음을 위해 남겨둬야지 했는데 결국 가게 됐다. 워낙에 귀가 얇은 위인인지라 만나는 사람마다 구체구 칭찬을 하는데 '솔깃'하더니 바로 넘어갔다.

숙소 로비에서 구체구로 간다는 한국인 대학생 남자 둘을 만났다. 그들은 이미 비싸기로 소문난 숙소 안 로비의 여행사에서 단체여행을 신청하고 돈을 냈다고 한다. 내가 혼자 그곳으로 간다니까 결국 20원씩의 돈을 물면서 표를 환불하고 함께 가기로 했다. 어차피 혼자라도 가려 했지만 동행이 생겨 든든하다. 동행이 있으면 아무래도 두려움도 가시고 12시간의 긴 버스여행도 지루하지 않게 할 수 있으니까.


아침 8시에 버스를 탄다. 구체구로 가는 풍경은 독특하다. 주변으로는 헐벗은 산과 옥색의 물이 흐르는 개천이 계속 이어진다. 비록 색은 옥색이지만 결코 깨끗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토양은 한눈에 보기에도 척박해 보이는데 물가 바로 옆까지 채마밭을 만드느라 밭을 일구고 자갈담을 쌓아 경계를 만들어놓았다. 갈색의 흙벽돌 집마다 지붕에는 동그란 접시 안테나가 올라가 있어 궁벽한 산촌에도 집집마다 TV가 있음을 말해준다.

입구에서 흐예마을 가는 길의 풍경
입구에서 흐예마을 가는 길의 풍경김남희

자루사 스투파
자루사 스투파김남희
오후가 되니 흐릿하던 하늘 사이로 햇살이 나온다. 1년에 100일만 해가 뜬다는 성도로 온 후 처음 보는 햇살이라 너무도 반갑다. 5시, 송판 도착. 목조 2층 건물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집집마다 가득 쌓아놓은 장작들은 어디서 가져온 걸까? 주변의 산은 온통 민둥산이던데... 혹시 이 장작들 때문에 산이 이렇게 된 건 아닐까?

송판을 벗어나니 눈발이 제법 굵게 날린다. 바람이 몹시 세찬 듯 눈발이 옆으로 흩날리며 내린다. 갑자기 잣나무 숲이 나타나고 가지들이 눈을 인 채 늘어져 있다. 길은 금세 눈으로 덮이고 안 그래도 높은 고개와 급한 커브길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던 차는 속도가 더 떨어졌다. 결국 구체구에 도착하니 저녁 9시. 꼬박 13시간이 걸렸다.

버스에서 내리니 역시나 '삐끼'(호객꾼)가 따라붙는다. 밤도 늦었고, 주변의 숙소들은 그들 말처럼 겨울이라 문을 닫은 곳이 많아 보여 따라 간다. 숙소는 더운 물이 나오는 화장실과 에어컨이 있는 방이 깍아서 세 사람에 100원. 90원에 하자니 절대 안 된다고 한다. 10원 차이라 나는 그냥 묶고 싶은데 이 대학생들이 비싸다고 다른 데 가보자고 한다.

길은 온통 젖었고, 눈발은 아직 날리는데 이 늦은 시간에 10원에 목숨을 걸다니... 순간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저 나이 땐 나도 그렇게 여행을 했던 것 같아 꾹 참고 따라나선다. 결국 40분 넘게 헤매다 그 숙소로 다시 들어선다.


로비의 주인 아저씨가 묻는다. "너희들끼리 왔느냐?"고. "그런데요." 했더니 그럼 숙박비는 90원이라고 한다. 알고 보니 10원은 삐끼들 몫이었다. 아저씨는 방 열쇠를 하나 더 주시더니 여기서도 씻으라고 한다.

비교적 새 호텔인데 관리를 제대로 안 해 여기저기 타일이 깨어지고 먼지와 때가 끼고 퀴퀴한 냄새가 난다. 그래도 침대엔 전기요도 있다. 중국제 싸구려 전기요는 고장이 잦아 자다가 등에 화상을 입었다는 얘기들이 심심지 않게 들리지만 그래도 일단은 따뜻하게 잘 수 있다니 너무도 좋다. 뜨거운 물이 24시간 나온다고 했지만 겨우 미지근한 정도이다. 게다가 수압이 약한지 샤워하다가는 얼어죽을 것 같아 포기하고 세수와 발만 씻고 침대에 눕는다.


구체구안에서 처음 나오는 마을인 흐예마을의 모습
구체구안에서 처음 나오는 마을인 흐예마을의 모습김남희

김남희
아침에 눈을 뜨니 날은 흐려 있다. 구체구 입구로 들어선다. 언제나처럼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입장료를 내야 하는 시간. 겨울이라 엄청나게 할인된 입장료가 100원. 학생증을 내면 할인 가능. 중국에서는 학생 할인을 해주는 곳이 많다.

게다가 제대로 보지도 않아 주민등록증을 내고 학생표를 샀다는 사람, 회사출입증, 심지어는 사진이 붙은 신용카드로 할인을 받았다는 등의 영웅담이 수없이 들리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학생할인은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이고, 나는 이미 학생시절에 그 혜택을 많이 받았으므로 이제는 일반인 값을 성실히 내겠다고. 이렇게 근사하게(?) 말은 하지만 사실 나라고 왜 유혹이 되지 않겠는가? 10원에 울고 웃는 가난한 배낭족 처지에.

하지만 워낙에 간덩이가 쬐끄만지라 그런 일을 하려면 심장이 벌러덩거리며 지레 얼굴이 화끈거리고 목소리가 떨리는 현상이 자동적으로 나타나기에 아예 미리 포기를 하는 것뿐이다.

표를 끊는데 공원 내를 순환하는 버스표도 70원을 주고 사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걸어서 공원을 둘러보기로 했기에 입장표만을 끊고 공원 안으로 들어선다. 이곳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자연유산 중의 한 곳이다. "계림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면 구체구는 계림보다 아름다운 곳이다"라고 자랑하는 곳이다.

아홉 개의 장족 마을이 있는 계곡이라는 이름처럼 장족 자치구가 있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도로가 나 있고 도로 옆 숲 안쪽으로 놓인 나무길은 겨울이라 산불방지의 일환으로 곳곳이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 주변은 소나무와 잣나무숲이고 옆으로 맑고 푸른 물이 흐르는 계곡이 길을 따라 계속 이어진다.

중간 중간에 그야말로 터키블루 빛깔의 호수가 나타난다. 호수물을 떠 한 모금 마셔보니 별로 맛은 없다. 자루사에 들른 후 흐예마을에 도착하니 배가 고파진다. 이 근처에 식당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한다.

구체구의 두 번째 마을인 슈정짜이(수정체)의 입구
구체구의 두 번째 마을인 슈정짜이(수정체)의 입구김남희

할머니는 배추를 넣고 국수를 끓이고 그릇에는 마늘과 소금과 간장을 담았다. 좀 짜긴 해도 허기를 달래기에는 충분하다. 국수 세 그릇에 10원.
할머니는 배추를 넣고 국수를 끓이고 그릇에는 마늘과 소금과 간장을 담았다. 좀 짜긴 해도 허기를 달래기에는 충분하다. 국수 세 그릇에 10원.김남희
마침 바깥을 내다보던 아주머님이 국수라면 끓여줄 수 있다고 들어오라고 하신다. 배추를 넣고 국수를 끓이고 그릇에는 마늘과 소금과 간장을 담았다. 좀 짜긴 해도 허기를 달래기에는 충분하다. 국수 세 그릇에 10원. 목에 힘을 주고 외친다. "얘들아. 누나가 쏠게."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받은 10원을 놀러온 손자들에게 5원씩 나눠주신다. 할머니의 마음은 어디나 같다.

4시쯤 수정체에 도착하니 다시 눈발이 날린다. 장족자치구 민속문화촌이라 쓰인 곳으로 들어서니 '이장댁'이라는 나무 표지판이 놓인 집이 보인다. 눈도 오고 숙소도 구해야 되는데 여관에 가서 자기는 싫고...

내 특기가 남의 집 문 두드리는 것 아닌가. 일단 들어가 보기로 하고 들어서서 문을 두드리니 누군지 묻지도 않고 들어오라고 한다. 집안은 어둡지만 화덕에 나무 장작이 타고 있어 훈훈하다. 장족 어머니와 딸이 우리를 맞는다. 얼른 앉으라고 하며 사과며 과자 등을 내온다.

다음으로 나오는 것은 장족 전통술인 "칭커지어우". 한모금 마시니 좀 독한 과실주 맛이 난다. 그리고 "수요우차". 보릿가루에 버터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는데 미숫가루와 비슷한 맛이 난다. 이건 전에 티벳에서 여러 번 마셔봤기에 맛있게 먹는다.

이 집 딸 거랑나머는 사천 민족대학에서 장족어와 장족문화를 전공하는 3학년이다. 이 마을의 촌장이었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식구는 엄마와 두 이모,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큰 오빠와 작은 오빠, 역시 대학생인 남동생이다. 다들 성도나 구체구 바깥에서 거주하고 이 집에는 어머니와 두 이모만 거주한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집은 대단한 부잣집이다.

거랑나머의 방 책상에는 도시바 노트북이 놓여 있고, 그녀가 보여주는 가족 앨범에는 관광지로 여행 다닌 사진이 가득하다. 심지어 어머님은 태국도 다녀왔고, 내년에는 한국으로 여행을 갈 예정이란다. 중국에서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은 정말 잘 사는 사람들이라던데... 이 집 큰 아들인 거거우주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지공이라는 곳에서 호텔을 경영한다. 단연 내가 만난 장족 중 최고의 부잣집이다.

거랑나머가 오늘은 어디서 머물 거냐고 묻는다. 앗, 기다렸던 질문이다.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폐가 되지 않는다면 이 집에서 묵어가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라고 한다. 대신 씻는 것도 불편하고 추울 텐데 괜찮겠느냐고 되묻는다. 장족집에서 잘 수 있는데 그깟 추위가 문제인가.

근무 중인 장족 여인들. 구체구 안의 장족들 중에는 구체구 관리국에 고용되어 자연보호나 산불감시 같은 일들을 하는 이들이 많다.
근무 중인 장족 여인들. 구체구 안의 장족들 중에는 구체구 관리국에 고용되어 자연보호나 산불감시 같은 일들을 하는 이들이 많다.김남희

슈정짜이 마을 물방앗간은 물의 힘으로 동력을 만드는데 동력의 본체를 마니체 모형으로 만들어놓았다. (마니체 : 원형의 통안에 불교의 경전을 적어 놓아 한 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티벳절이나 마을에 가면 반드시 입구에 이 마니체들이 놓여있어 돌리며 순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슈정짜이 마을 물방앗간은 물의 힘으로 동력을 만드는데 동력의 본체를 마니체 모형으로 만들어놓았다. (마니체 : 원형의 통안에 불교의 경전을 적어 놓아 한 번 돌릴 때마다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한다. 티벳절이나 마을에 가면 반드시 입구에 이 마니체들이 놓여있어 돌리며 순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김남희
좀 있으니 오빠와 새언니가 들어선다. 일하러 가며 이곳에 맡겨놓은 4살 난 아들 거상을 데리러 왔다. 그에게 궁금하던 여러 가지를 물어본다.

구체구가 관광지로 개방되기 시작한 것은 1982년부터라고 한다. 800년 전부터 이곳으로 이주해 살아온 장족들은 그 동안 산에서 약초를 캐다 팔아서 살았지만 아주 가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이 유명해지고 외지에서 관광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을은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여관이나 상점, 식당 등을 경영하며 돈을 만지기 시작하고, 한족문화도 따라 들어와 장족문화와 뒤섞이게 된다.

장족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나는 그런 변화가 달갑지만은 않아 물어보니 뜻밖에도 그의 대답은 명쾌하다. 예전보다 생활이 훨씬 나아졌기 때문에 아무 불만이 없단다.

"티벳의 독립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중국과 티벳은 한 나라고 우리는 중국인이다"고 대답한다. 이럴 수가... "그럼 인도에서 티벳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달라이라마와 많은 티벳인들은 뭐냐?"고 되물었더니 장족의 절반은 독립을 불필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독립을 추구할 경우 전쟁만 일어나게 되고, 티벳은 작고 가난한 나라밖에 더 되겠느냐며 중국에서 분리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장족의 입에서 중국과 티벳은 한 나라라는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다.

이곳 구체구는 원래 장족만 살았지만 지금은 한족과 더불어 사는 처지라 장족들이 한족화가 많이 되었다. 옷차림이며 음식이며 명절을 쇠는 것하며... 내가 큰 아들에게 장족 문화는 변한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없다고, 잘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무슨 소리? 내가 보기엔 엄청 변했다. 우선 당신 옷차림만 봐도 장족 옷을 안 입고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웃는다. "그건 이 옷이 편하기 때문에..." "예전에 한국에서도 그랬다. 다들 전통 옷을 입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노인들만 입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명절 때만 입는다. 결국 그런 식으로 고유의 문화는 사라지는 거다."

누어러랑 정거장에 누군가 만들어놓은 탱크 눈조각(?)
누어러랑 정거장에 누군가 만들어놓은 탱크 눈조각(?)김남희

이름처럼 거울처럼 맑은 물이 고인 징하이(경해)
이름처럼 거울처럼 맑은 물이 고인 징하이(경해)김남희

쩐주(진주)폭포를 지나 쩐주탄(진주모래톱)으로 가는 길목의 풍경
쩐주(진주)폭포를 지나 쩐주탄(진주모래톱)으로 가는 길목의 풍경김남희
이 모든 얘기들이 내 "어리버리 얼렁뚱땅 대충대충 중국어"로 통하다니 스스로 놀랍기만 하다. 이럴 때는 정말 중국어를 배워온 것이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좀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많은 것을 묻고 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기도 하다.

내가 달라이라마를 얘기하고 그를 존경한다고 했더니 어머님이 벽장 깊숙한 곳에서 달라이라마의 사진을 꺼내온다. 이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거랑나머와 그의 시누이는 저녁 준비를 하느라 바쁘다. 부엌을 들락거리며 내게 오리 고기를 꺼내 좋아하느냐고 묻기도 하고, 또 다른 산나물을 가지고 와 괜찮은지, 저녁으로는 뭘 먹고 싶은지 묻느라 정신이 없다.

제발 먹던 대로 먹자고 해도 손님접대를 걱정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부엌으로 들어가 돕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밀어낸다. 이어서 차려진 저녁상은 한상 가득이다. 이곳 산에서 나는 나물을 무치고, 무슨 나무 뿌리 같은 쓴 맛 나는 무침에 오리고기, 돼지고기 볶음, 생선찜과 국 등등... 하지만 완벽한 한족식이다. 어디에도 티벳 전통음식은 없다.

손님인 우리는 소파에 앉게 하고, 그들은 화덕 귀퉁이에서 먹는다. 제발 같이 이쪽에서 먹자고 해도 손사래를 친다. 어린 거상만 우리 곁에서 먹겠다고 건너올 뿐이다.

저녁을 먹고 오늘이 보름이라고 폭죽을 터뜨리러 나가자고 한다. 중국 대도시에서는 폭죽을 위험하다고 금지시켰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구정이나 보름에는 폭죽을 터트린다. 마을에서는 여기저기서 폭죽 터뜨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한바탕 불꽃놀이를 구경한 후 오빠 식구는 돌아가고 우리만 남는다.

대학생인 아들과 딸은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와 <친구>를 봤다고 한다. 또 TV에서 많이 들었다며 아리랑 노래를 좋아한다고 불러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갑자기 고즈넉한 구체구 마을에 울리는 아리랑 노래. 코끝이 찡해온다. 답가를 요청하니 이번에는 이 집 아들이 티벳 전통 노래를 부른다. "어머니를 그리워함"이라는 제목이니 우리로 치면 사모곡쯤 될 것 같다. 애절한 곡조이다.

장족으로 변신한 까탈이.
장족으로 변신한 까탈이.김남희

우리가 민박한 집의 안주인인 어머님과 딸 거랑나머
우리가 민박한 집의 안주인인 어머님과 딸 거랑나머김남희
잠시 후 내가 어머님이 입고 있는 장족 전통 옷을 가리키며 입어보고 싶다고 하자 어머님이 즐거워하시며 방에서 옷을 가져오신다. 어머님과 거랑나머가 양쪽에서 정성스레 머리를 만져주고 옷을 입혀주신다. 양털로 된 가운 같은 것을 입고, 허리에 은으로 장식된 벨트를 차고 머리에는 땋은 머리 가발을 쓰고 전통 모자를 쓰니 내가 봐도 완벽한 장족이다.

찬영이와 인근이는 "누님. 정말 장족 같아요. 똑같은데요." 놀린다. 이번에는 남동생의 남자옷을 찬영이와 인근이가 입어보고 사진을 찍는다. 그토록 입어보고 싶었던 장족옷을 입어볼 수 있어 기분이 너무도 좋다.

한바탕 패션쇼를 벌이고 나니 이 집 딸 거랑나머가 빗자루를 들고 온다. 아까부터 느꼈던 거지만 정말 열심히 집안 일을 거드는 착한 딸이다. 화덕 주변을 계속 쓸고 닦고 설거지를 하고... 나도 청소를 돕겠다고 나서서 빗자루를 뺏아 집안을 쓴다. 아휴, 이것도 일이라고 허리가 뻐근하다.

10시가 되어 방으로 올라가니 방에는 깨끗한 침대가 놓여 있다. 하지만 밤 내내 추위로 잠들 수가 없었다. 구체구는 전기가 저녁 6시부터 11시까지만 들어온다고 한다. 11시가 되니 전깃불이 꺼지고 전기요 역시 동시에 꺼져 방안은 냉동고에 들어와 있는 듯 싸늘하다. 두꺼운 이불 무게는 엄청 무거운데 밖으로 나온 얼굴은 어는 것처럼 차갑고... 결국 새벽까지 뒤척인다.

아침에 일어나니 방 안의 물컵에 살얼음이 끼어 있을 정도다. 더운 물에 세수를 하고 티벳식으로 아침을 먹는다. 아침은 보통 수요우차로 간단하게 먹는다고 한다. 내가 감기로 콜록거리자 어머님이 거랑나머를 시켜 약통을 꺼내더니 감기약을 꺼내 뜨거운 물에 타서 주신다. 한 컵을 다 마시자 나머지 봉지를 손에 쥐어주시더니 하루에 세 번씩 마시라고 하신다.

공짜로 점심과 간식을 대접해주신 아저씨들. 벽 뒤로는 고기들이 걸려있다.
공짜로 점심과 간식을 대접해주신 아저씨들. 벽 뒤로는 고기들이 걸려있다.김남희
어머님은 한족말을 대충 알아 들으시지만 잘 못하신다. 거랑나머는 어머니와 대화할 때 장족어를 쓴다. 아들 부부는 일상 생활에서 한족어를 거의 쓰기 때문에 어린 거상과 할머니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수요우차를 마시고 인사를 하고 일어선다. 찬영, 인근이와 얘기를 해서 100원을 모아 어머님께 드리니 한사코 사래질을 치신다. 손자 거상에게 과자를 사드리라며 어머님 손에 쥐어드리고 수정체 마을을 나선다. 아침에 거랑나머가 어머님이 일하러 가신다고 해서 무슨 일을 하시나 했는데 마을 앞에 앉아 환경보호를 명목으로 앉아 계시는 일이다. 구체구에 사는 많은 장족들은 이런 형태의 일들을 하거나 작은 상점, 식당 등을 운영한다.

어제 오후 다시 눈이 내린 구체구는 너무도 아름답다. '아름답다'라는 표현만큼 식상한 표현이 있을까. 다들 버스를 타고 다니느라 도로엔 차들만이 다닐 뿐 걸어다니는 사람은 전혀 없다. 맑고 푸른 옥색의 호수와 눈 덮인 흰 산이 끝없이 이어진다.

12시 반경. 즈차와 마을에 도착. 이곳에 하나뿐인 식당은 12시부터 2시 반까지만 영업을 한다고 들었기에 서둘러 들어선다. 요리 한 접시에 20원이다. "너무 비싸요"했더니 세 사람이 요리 두 개를 시키면 탕과 밥은 그냥 준다고 한다. 소고기 요리 하나와 돼지 고기 하나를 시키고, 배추국과 함께 밥을 먹는다. 음식 맛은 괜찮다. 점심을 먹고 숙소부터 찾는다.

지엔주하이(화살 대나무 호수)
지엔주하이(화살 대나무 호수)김남희
2001년부터 환경보호를 이유로 구체구 내에 있던 여관들은 전부 문을 닫았다고 한다. 공식적인 숙박은 구체구 바깥에서만 가능하게 되어 있다. 어쩐지 표를 사면서 숙소를 물었더니 판매원이 구체구 안에서 자는 건 안 된다고 하더니 그 뜻이었다. 표에도 유효한 날짜가 찍혀 있었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처럼 개별 여행자들이 찾아들고 그중 일부는 구체구 내에서 머무르고 싶어하기 때문에 많은 여관들이 불법적으로 영업을 한다.

그러다 보니 전혀 관리를 안 하고 그냥 둔 채 가끔씩 드는 손님만 받기 때문에 시설이 정말 형편 없다. 즈차와 마을에서 우리가 찾은 숙소도 화장대에는 먼지가 새까맣게 싸여 있고, 오랫동안 쓰지 않은 방 안에는 곰팡내가 가득하다. 숙박비는 일인당 20원. 짐을 놓고 창해 방향으로 걷는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차가 와서 서더니 창해까지는 18km라서 지금 가면 해지기 전에 못 돌아온다고 차를 타라고 한다. 거기까지 안 가도 된다고, 최소한 처음 나오는 호수까지 갈 예정이라고 했더니 그 호수는 바로 이 위인데 지금 얼어서 물도 없다고 한다.

결국 버스를 얻어 타고 다시 마을로 내려온다. 보온병에 담아다 준 물을 아껴가며 세수를 하고, 세수한 물에 발을 씻고 발 씻은 물에 다시 양말을 빤다. 한국에 있을 때 물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쓰던 날들이 부끄럽다.

숑마오하이(판다호수)
숑마오하이(판다호수)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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