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충이로 겁내가꼬 우째 꼼밥을 딸끼고"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68> 송화

등록 2003.04.14 16:28수정 2003.04.14 21:2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우리들이 '꼼밥'이라고 불렀던 송화 꽃봉오리

우리들이 '꼼밥'이라고 불렀던 송화 꽃봉오리 ⓒ 우리꽃 자생화

"아빠! 이것도 먹는 거야?"
"그럼. 아빠 어릴 때는 쌀밥, 보리밥 하면서 이 꼼밥(송화)을 얼마나 많이 따먹었는데. 한번 먹어 봐! 금세 입 속이 향긋해진다니깐"
"......"
"어때?"
"향긋하긴 한데, 조금 떫어."


지난 일요일 오후에는 등산을 가자고 보채는 작은딸 빛나를 데리고 빛나의 꿈처럼 우뚝 솟아있는 비음산에 올랐다. 비음산 가는 길 곳곳에는 양지꽃과 배추 장다리꽃이 현기증이 일도록 노랗게 피어나 있었고, 논둑 곳곳에서는 분홍빛 자운영이 어서 오라는 듯 예쁘게 손짓하고 있었다.

"빛나야, 오늘은 산마루까지 올라가지 말고 지난번에 갔었던 그 골짜기에 가자."
"어디? 그때 아빠가 막걸리하고 무 먹었던 그곳?"
"그래. 그기 어때?"
"아싸! 근데 하얀 저 꽃은 이름이 뭐야?"
"탱자꽃."
"탱자꽃도 있어?"
"그래야 탱자가 열리지."

비음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진 과수원이 하나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이발을 한 듯이 반듯하게 깎인 그 탱자나무 울타리 곳곳에서는 하얀 탱자꽃이 망울망울 매달리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얀 꽃잎을 하염없이 휘날리던 그 매화나무 가지에서는 어느새 버찌만한 열매가 달려 있었다.

어느새 분홍빛 자운영 몇 송이를 꺾어든 빛나는 마치 산토끼처럼 저만치 앞질러 올라가고 있었다. 풀숲 곳곳에서는 우리들이 어린 날 '망개'라고 불렀던 청미래가 노오란 꽃을 피우고 있었고, 밥풀떼기꽃이라고도 불리는 조팝나무가 진한 꽃내음을 마구 풍기며, 진짜 밥풀처럼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꼼밥이 열릴 때가 됐는데?"
"꼼밥이 뭐야?"
"소나무꽃을 말하는 거야."
"소나무도 꽃을 피워?"
"그럼. 그래야 솔방울이 열리지."


비음산 곳곳에 장승처럼 우뚝우뚝 서 있는 소나무에서도 어김없이 송화가 입술을 뾰쫌히 내밀고 있다. 그랬다. 내가 어릴 때에는 곰솔이라 불리는 저 송화 꽃봉오리를 '꼼밥'이라고 불렀다. 그 중 색깔이 노랗고 작은 꼼밥은 '쌀밥'이라고 불렀고, 색깔이 나무색을 띤 보리쌀 만한 크기의 꼼밥은 '보리밥'이라고 불렀다.

a 송화 암꽃

송화 암꽃 ⓒ 우리꽃 자생화

해마다 4월 중순이 되면 소나무가 주종을 이루었던 우리 마을 근처의 산 곳곳에서는 맛있는 꼼밥이 수없이 열렸다. 그때가 되면 우리 마을 아이들은 누구나 산에 올라가 꼼밥을 따느라 정신이 없었다. 꼼밥은 솔잎처럼 향긋한 내음이 감돌면서 입에 넣어 씹으면 이내 달착지근한 물이 입안 가득 맴돌았다.


하지만 꼼밥을 너무 많이 따먹으면 혀끝이 까끌거리면서 가끔 헛구역질이 나오기도 했다. 또 주머니 불룩히 꼼밥을 따넣었다가 집으로 돌아와 마루 위에 꼼밥을 꺼내놓으면 주머니 속이 끈적끈적했다. 그리고 그렇게 서너 시간이 흐르고 나면 꼼밥을 딴 그 주머니에는 갈색 얼룩이 드문드문 생겼다.

"이야! 니 오데서 찹쌀꼼밥을 이리도 많이 땄노?"
"앞산가새 솔밭에 가모 쎄빌린 기(수없이 많은 것이) 꼼밥 아이가."
"그기는 송충이가 억수로 많은 데 아이가."
"송충이로 겁내가꼬 우째 꼼밥을 딸끼고."

그랬다. 꼼밥을 딸 때 가장 귀찮은 것이 바로 송충이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꼼밥을 딸 때 송충이가 있나 없나를 먼저 살핀 뒤에 꼼밥을 땄다. 또 송충이가 있으면 지게 작대기로 송충이를 땅에 떨어뜨린 뒤 발로 마구 짓이겼다. 하지만 한창 꼼밥을 따느라 정신을 팔다보면 송충이가 목덜미에 붙는 때도 더러 있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송충이가 있나 없나 확인을 한 뒤에 한창 꼼밥을 따고 있을 때였다. 근데 갑자기 솔잎이 목덜미를 스치는 것처럼 내 목덜미 주변이 근질근질했다. 열심히 꼼밥을 따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근질근질한 목덜미로 손이 갔다. 그런데 뭔가 촉감이 이상한 것이 손에 닿는 것이 아닌가.

"으~ 으아~"
"뭐꼬? 독새(독사)한테라도 물맀나. 와 그래 난리법석을 떨어쌓노?"
"소... 송충이가 내 모간치(목)에 붙어 있었다 아이가."
"보자. 아이구, 니 모간치가 벌겋게 부풀어 올랐네."
"재수 나쁜 송충이 녀석!"

그날 나는 내 목덜미에서 떨어져 나온 그 송충이를 발로 몇 번씩이나 짓이겼다. 그 송충이는 솔잎을 얼마나 많이 갉아먹었던지 짓이겨진 몸뚱이에서 솔잎 같은 시퍼런 창자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은 저마다 서로 등쪽을 들이밀며 혹시라도 제 목덜미와 등쪽에 송충이가 붙었는지 확인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에이! 오늘 재수 옴 올랐는갑다."
"그라이 인자 꼼밥은 고마(그만) 따고 솔잎이나 따가꼬 도랑에 가서 솔잎배나 띄우며 놀자."
"그라자. 가서 꼼밥내기나 하자."
"솔잎배가 더 멀리 가는 사람이 이기는 기다?"

a 송화 수꽃

송화 수꽃 ⓒ 우리꽃 자생화

그랬다. 새로 올라온 솔잎을 쑥쑥 뽑아서 거울처럼 맑은 도랑물 위에 띄우면 이내 솔잎이 뽑힌 자리에서 무지개 빛 기름띠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꼬리에 무지개를 단 솔잎이 마치 통통배처럼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달렸다. 그 무지개 빛 기름띠는 다름 아닌 송진이 내는 빛깔이었다.

"아빠! 나도 솔잎 배로 무지개를 한번 띄워볼래."
"그래. 노래를 부르면서 솔잎배를 띄우면 더 잘 달려."

꼬리에 무지개를 내뿜으며 투명한 도랑물 위로 달리는 솔잎배. 그래. 내 어린 날의 봄날 하루는 향긋한 솔내음을 풍기는 달착지근한 꼼밥과 함께, 그리고 솔잎배가 물 위에 띄우는 아름다운 무지개와 함께 그렇게 흘러갔다. 그래. '나뭇잎배'를 부르며 솔잎배를 띄웠던 작은딸 빛나의 마음속에도 내가 빛나만 할 적에 띄웠던 그 아름다운 무지개가 뜨고 있을까.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푸른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사알살 떠다니겠지

(박홍근 작사, 윤용하 작곡 '나뭇잎배' 1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