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산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등록 2003.04.18 06:47수정 2003.04.1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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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백화산 정상에서 만난 한 후배에게 농담을 했습니다.
"태을암 아래 쪽으루 불났데잉."
"불이 나요? 언제요?"
그 후배는 더럭 의문을 머금은 눈빛으로 나를 보았습니다.


"태을암 아래, 특히 골짜기 쪽으루다가 진달래가 어찌나 많은지 마치 불이 난 것 같더먼. 완전히 불바다더라니께."
"난 또…. 진짜 불이 났다는 소린 줄 알구…."
그러며 그 후배는 실소를 머금었습니다.

백화산은 태을암 아래 쪽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가 불바다였습니다. 만발한 진달래 무리로 마치 불이 난 것만 같은 그 장관은 내 시신경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도 같았습니다. 가슴 미어지는 감격과 감탄의 반복 속에서 나는 너무도 행복한 나머지 어느 날 한 순간은 눈물이 핑 돌기도 했지요.

진달래꽃으로 불바다를 이룬 것만 같은 그 형국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불필요한 연상 작용이랄까, 내 상념의 나래가 너무 지나쳐서 나는 수많은 목숨들을 삼켜버린 불의의 화재 사건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백화산의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는 지뢰 매설 경고판을 볼 때는 사람의 몸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연상하면서 그 주변의 진달래꽃들이 한결 애처롭게 보이는 이상한 현상도 경험해야 했습니다.

만발한 진달래로 말미암아 백화산이 마치 불바다가 된 것만 형국으로부터 가지는 상념들은 요즘의 내 기도 때문에 더욱 가능하며 더욱 깊이 관련이 될 터였습니다. 매일같이 백화산을 오르고 내리며 바치는 요즘의 내 '묵주기도'의 지향은 최근 대구와 천안에서 불의의 화재 사고로 숨진 영혼들과 그 유가족들, 지난해 강원도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불행을 당한 어떤 한 소년과 가족들, 그리고 이라크 전쟁에서 죽고 다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으로 집중되어 있기에….


그런데 나로 하여금 가슴 미어질 것만 감격과 감탄의 반복 속에서도 아프고 애처로운 상념들을 가지게 했던 진달래 무리, 백화산의 도처에서 불이 난 것만 같은 형국이었던 진달래꽃들도 어느덧 절정의 시기가 지나버렸습니다. 이제는 꽃잎이 시들어 가거나 이울고 있는 모습들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선수치듯 일찍 피어났던 놈들은 어느새 일찍 져버려서 꽃의 흔적도 남지 앉아 지레 허망함을 안겨 주더니, 이제는 전체적으로 또 한 차례 한 시절이 지나는 것을 실감시켜 주는 것 같습니다.

산에서 가장 일찍 피었던 산수유 꽃의 노란색이 점차 갈색으로 변하고, 탐스럽던 하얀 목련꽃들이 거의 처참한 모습으로 떨어져 내리고, 풍성하던 개나리 꽃밭의 노란빛도 푸른색으로 바뀌고, 하늘을 눈부시게 장식했던 벚꽃도 바람 한번 불면 꽃잎들이 우수수 눈처럼 떨어지는 재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제는 진달래꽃도 시들고 이우는 것을 보아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지요.


그것을 새삼스럽게 절감하며 어제는 좀더 아쉬움과 허망함 같은 것을 삼켰지 싶습니다. 괜히 또 한번 세월의 빠름과 인생의 덧없음을 생각하며 야릇한 비감으로 한숨을 내쉬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한 순간 나도 모르게 이상한 비명 같은 신음을 토하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너무도 허무하고 슬픈 일 하나가 내 뇌리에 휘감기듯 떠오른 때문이었지요. 며칠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 잠시 본 한 사건에 대한 기억의 재생 탓이었습니다. 그것이 왜 그 순간에 갑자기 내 뇌리에 떠올랐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나는 너무도 가슴이 아픈 나머지 나도 모르게 비명 같은 신음을 토하며 걸음을 멈추었다가 바윗돌에 몸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묵주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이마에 대고 더욱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며칠 전에 우리 고장에서 가까운 서산시 음암면의 한 저수지에서 발생한 일입니다. 단란한 한 가정의 가장이 낚시를 하러 오는 길에 가족 모두가 동행을 했던 모양입니다. 가장이 낚시에 열중하는 사이 엄마와 두 어린 자녀가 고무 보트를 탔다가 그만….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은 엄마와 두 어린 자녀도 불쌍하지만, 졸지에 가족을 모두 잃은 그 가장의 처지를 생각하니, 나는 너무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가 어떻게 홀로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아, 그는 지금 어찌하고 있을까? 밥 한술이라도 제대로 먹었을까? 집에는 들어갔을까? 아내와 어린 딸과 아들이 순식간에 그 어딘지 모를 것으로 영영 가버리고 없는 그 적막한 집에서 그는 지금 홀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무슨 일인들 손에 잡힐 것이며, 지치고 고달픈 몸이 설령 한 순간 잠 속에 빠져든다 해도 그 잠인들 그를 편안하게 할 수 있을까?

세상엔 왜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 생각할수록 얄궂기만 했습니다. 어린아이가 물에 빠진 바람에 슬픔을 당한 경험은 과거 내 혈육에게도 있었던 일입니다. 어린 두 남매가 웅덩이에 빠져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일도 몇 년 전에 이웃 동네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엄마와 두 자녀가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비극이 이웃 동네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늘 하느님께 기도하고 살면서도 '하느님도 무심하시다'라는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는 가운데서도 기도를 하며, 스스로 내 기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나의 이런 기도가 그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무슨 소용일까, 내 기도가 과연 그의 슬픔과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만이 가득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오직 기도뿐이었습니다.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그 사람이 알 턱이 없고 상상도 할 수 없을 테지만, 그 슬픈 일을 내가 들었고 기억을 하는 한, 그리고 그 슬픈 일을 가슴 깊이 아파하는 한 나는 내 아픈 가슴을 위해서라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나는 나의 그런 기도가 처음이 아님을 상기했습니다. 불현듯 지난 1998년 여름의 지리산 수해 사건이 떠올랐고, 1995년의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도 떠올랐습니다.

그 사건들 때도 졸지에 가족을 모두 잃은 불행한 가장이 있었습니다. 나는 같은 남자, 같은 가장의 처지에서 참으로 가슴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인 기도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종의 '기도시'를 지었습니다.

당시에 그 시들을 활자화하면서 또 한번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도 컸습니다. 그들이 만일 지면에서 내 시를 읽는다면 어떤 마음일까? 그들이 내 시에서 위안을 받기는커녕 더욱 큰 슬픔의 재생으로 다시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은 아닐까? 회의와 갈등도 컸습니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머금고 그 시들을 발표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그 시를 지었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어쩌다 그 시들을 상기하거나 다시 읽게 되면 그때처럼 진실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되곤 합니다. 나는 그들이 혹 내 시를 보았거나 앞으로 어떤 계기로 보게 되더라도 (그럴 가능성은 아주 적지만) 슬픔의 재생으로 큰 고통을 겪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고 새로운 힘을 얻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어제 산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집에 내려온 저녁, 내 컴퓨터 안에 저장된 문서들 속에서 그 시들을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과거의 그 시들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내 시들이 가리키고 있는 실제의 인물인 분들께는 참으로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이미 예전에 활자화된 시들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남의 불행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진심으로 그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고자 함이니 큰 허물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남의 불행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희망하고 유도하는 한편, 우리네 삶의 주변에서 그런 불행한 일들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서로서로 경각심을 나누어 가지며 스스로 조심하는 마음을 갖도록 돕고자 하는 뜻도 그 시에는 담겨져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면서 오늘의 이 글 말미에 지난 1995년과 1998년에 지었던 시 두 편을 소개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관용을 빌면서….


지금 그 사람은


엊그제도 저녁 늦게 귀가하였을 때
열 시가 넘은 그 시간까지
내 아이들이 자지 않고 있다가
차 소리를 듣고 스스로 문을 열고 나와
신나게 아빠를 반겼지

어제는 웬일로 아이들이 일찍 잠이 들어서
섭섭하면서도 아이들의 잠자는 모습에서
인연의 신비, 우주의 평화, 아비의 행복을
새삼 확인하며 신에게 감사했지
나의 평범한 일상을 늘 보호해 주시길 빌며…

또 하루 찾아온 휴식의 날
하느님께 예배하고 온 평온의 오후
고창 수박과 찰옥수수로
내 가정의 단란함을 즐기다가 문득
아내의 수고에 감사하다가 불현듯
그 사람을 생각했네

삼풍백화점 지하,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속에
아내와 아이들과 처제까지 잃고
직장의 배려를 얻어
바람 따라 지향 없이 먼 곳을 떠돌고 있다는
그 사람 윤 검사

오늘은 그가 어느 하늘 밑을 떠돌고 있을까
지금쯤은 어느 산천, 어느 처마 밑에서
텅 빈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까
이제는 자기 집도 아닐 성싶은
그 적막 강산의 집으로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그에게 과연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을까

내가 만약 그런 사정이라면
과연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상상과 가정만으로도 돌연 눈물이 난다
그러나 내 눈물은 어디까지나 나의 눈물

아아, 신이여!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을 안고
평생을 슬픔 속에서 살아갈 그에게
끊임없이 내가 기도로써 위로하게 하소서
차라리 그가 자신의 슬픔에 의지하여
꿋꿋이 살게 하소서.

(1995년 가을 <시도(詩圖)> 57집)



98년 여름 지리산의 '슬픔'에게


1998년 여름
지리산의 어느 계곡에서
한밤중의 폭우로, 곤두선 계곡 물로
졸지에 가족 모두를 잃은 당신
다섯 살짜리 아들, 일곱 살짜리 딸
그리고 한창 시절의 아내를 잃고
그만 외톨이가 되고 만 당신
그 지옥 같은 칠흑의 어둠 속을 광란하는
천둥 번개 속에서 한 순간 비명을 지르며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당신의 가족
그 거짓말 같은 기억이
당신의 뇌리에 천근 만근의 고문으로
매달려 있음을 압니다
한 시 반 시도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을
그 악몽의 잔영들
하루 스물네 시간, 매일 매일
수없이 퍼내어도 마르지 않을
당신의 눈물샘과 회한
팔을 뻗으면 잡힐 듯한
멀지 않은 어제의 그 단란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텅 빈 보금자리
거실과 방들이며 주방에서
묻어나는 체취와 어른거리는 모습이며
들리는 듯한 목소리가 너무도 허망하여
당신은 끝내 집에도 못 들어가고
마냥 친척집들을 전전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엔 산을 오르며
당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서로 알지 못하는 당신이지만
당신 생각에 눈물이 났습니다
어떻게 살까, 어찌 살 수 있을까…
하염없는 당신 걱정에
산을 오르고 내리며 줄곧
당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당신을 위해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평생 겹겹의 슬픔을 끌어안고 살 당신
그러나 그 슬픔 속에서도
부디 용기를 내시고
희망의 빛을 추구하십시오
어느 모르는 곳에서라도
당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혹 어느 순간
먹장의 슬픔 속에서 용솟음하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의 빛을 느끼시게 되면
어느 모르는 사람들의 기도가
저 하늘의 별빛 속에 있었음을
깨달으십시오
당신 슬픔의 맑고 뜨거운 눈물을 위해
당신의 이승과 영혼을 위해
오늘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1998년 <가톨릭신문>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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