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오고 다리는 돌아눕는다

[중국 운남성 다리 여행기 ①] 작은 섬이 품고 있는 밤의 비밀

등록 2003.04.21 01:07수정 2003.04.2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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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산 중화사에서 내려다보는 다리고성과 얼하이 호수
창산 중화사에서 내려다보는 다리고성과 얼하이 호수김남희
창산 중화사에서 점심을 함께 먹은 백족 아줌마. 화통한 성격과 뛰어난 유머감각을 자랑하는 아줌마의 표정이 재밌다.
창산 중화사에서 점심을 함께 먹은 백족 아줌마. 화통한 성격과 뛰어난 유머감각을 자랑하는 아줌마의 표정이 재밌다.김남희
바람이 불어온다.
고요하던 공기의 흐름이 빠르게 흔들리고, 바람은 모든 것을 날려버릴 듯 거세게 돌진해온다. 기세를 높인 바람은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처럼 맹렬하고 급박하게 마당의 빨래를 퍼덕이게 하고, 아직 몸을 열지 못한 철쭉과 부겐빌리아 꽃들을 모가지째 떨어뜨리고, 기와지붕을 들썩이고, 구석구석을 휘감아 돌며 포악한 성질을 드러낸다.

나무와 꽃들의 비명이 요란한 거리에서 거칠게 등을 밀어대는 바람의 손길을 만나면 그저 눈을 감고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던 것처럼 제 풀에 꺾여 성질을 죽인 바람이 물러가면 다시 다리(大理)는 나른하게 몸을 뒤집으며 돌아눕는다.


운남성 다리의 특산물은 염색천이나 대리석이 아니라 바로 다리펑(大理風)이라는 이름을 지닌 바람이다. 다리(大理)에서 바람과 호수와 산을 빼놓고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

창산 가는 길 풍경
창산 가는 길 풍경김남희
남조풍정도로 들어가기 위해 타는 작은 통통배.
남조풍정도로 들어가기 위해 타는 작은 통통배.김남희
다리는 중국에 남겨둔 내 마음의 고향이다.
기껏해야 보름 남짓 머물렀을 뿐이면서 고향을 말하는 거냐고 힐난한다면 변명은 궁색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알아온 세월의 길이가 반드시 그를 이해하는 깊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듯, 우리가 몸을 의탁한 장소 역시 시간의 길이와 비례해 정이 드는 것은 아니다.

다리는 갚지 못한 외상값처럼 끈덕지게 마음에 달라붙어 결국 여행자를 무장해제 시키고야 마는 곳이다. 그렇기에 급한 발길에 좇기는 이들이여, 함부로 다리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남조국과 대리국의 수도였던 다리 고성은 4000미터의 창산을 뒤에 두고, 앞으로는 얼하이 호수의 품에 안겨있다. 해발고도 1800미터의 다리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 햇살과 꽃과 나무들의 노래로 가득 찬 곳이다.

남조풍정도 해변에서는 전라의 두 여인이 여행객들을 맞아준다. / 남조풍정도 숙소.
남조풍정도 해변에서는 전라의 두 여인이 여행객들을 맞아준다. / 남조풍정도 숙소.김남희
남조풍정도 숙소 중 일명 '공주와 하인방'의 침대들.
남조풍정도 숙소 중 일명 '공주와 하인방'의 침대들.김남희
남조풍정도 숙소.
남조풍정도 숙소.김남희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질병이 여행자들을 몰아내고, 하늘길마저 끊어놓은 지금, 그래도 다리는 수선 떠는 일도 없이 무심한 눈길로 낯선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고성 안 서울식당의 하룻밤 15원(2200원)짜리 방에 짐을 풀면 자유의지로 다리에 들어왔으나 떠나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상추가 자라는 햇볕 잘 드는 마당에서 '마의 산'을 읽으며 내가 소요해버린 시간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마음 다치지 않고, 그저 소진한 그 시간들. 아프던 몸과 마음을 천천히 회복시켰던 그 시간들 속으로 돌아가면 아직도 마당에는 부겐빌리아가 붉은 혀를 날름거리고, 바람은 가끔씩 불어오고, 햇볕은 뜨겁게 목덜미에 다가와 안기는 풍경이 고즈넉히 남아있다.


다리에서의 휴식에 지칠 무렵이면 한 권의 책과 약간의 음식을 챙겨 차에 오른다. 봄 햇살을 받은 풀들은 바람의 희롱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몸을 푼 여인처럼 드러누운 얼하이 호수는 잠들어있다. 그 호수의 한 켠에 떠있는 아주 작은 섬, 남조풍정도.

남조풍정도의 노을.
남조풍정도의 노을.김남희
남조풍정도 가는 길 풍경
남조풍정도 가는 길 풍경김남희
아름다움이나 규모로 치자면 어디에도 내놓을 수 없이 보잘 것 없는 섬이다. 하지만 이 섬에 숨어있는 작은 숙소 하나와 관광객이 모두 떠난 밤의 적막이 이 섬을 낙원으로 만든다. 호숫가를 걸으며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의자를 한 발 뒤로 물러놓기만 하면 계속 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어린 왕자의 작은 별이 저절로 생각난다.


이 섬 역시 섬의 끝에서 또 다른 끝까지 삼십 분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작기에. 물 속으로 자진한 붉은 해의 그림자를 끌고 숙소로 돌아오면 정원에는 고기 굽는 냄새가 자욱하다. 별이 총총하게 뜨고 밤의 장막이 두껍게 내려지면 섬은 육지로부터 완벽하게 격리된다. 이제서야 이 작은 섬은 우리들을 주인으로 맞아들인다.

밤이 깊어지면 모닥불을 피우고 불가에 모여 앉는다. 젊음이 무기이자 상처인 아이들은 몇 잔의 술과 노래로 밤을 새운다. 나는 파도소리가 슬금슬금 다가오는 방 침대에 몸을 누인 채 귀를 열어놓는다.

다리장. 담배잎을 파는 할아버지들.
다리장. 담배잎을 파는 할아버지들.김남희
다리 고성.
다리 고성.김남희
다리 고성 안에서 난과 화초를 파는 이족 아줌마. 늘 부지런히 뜨개질을 하고 계신다.
다리 고성 안에서 난과 화초를 파는 이족 아줌마. 늘 부지런히 뜨개질을 하고 계신다.김남희
규칙적인 호흡으로 들썩이는 파도의 숨소리를 듣다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쓸쓸함이 묻어난다.

몇 번을 뒤척이며 돌아눕다 잠이 들면 아침을 깨우는 것도 철썩이는 파도소리이다.

늦은 아침을 먹고 햇살에 기대어 졸고 있노라면 섬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유람선이 경적을 울리며 들어오고, 그들이 내려놓는 왁자지껄한 관광객들이 침입자처럼 기세 좋게 섬으로 상륙한다. 평화는 순식간에 깨어지고 천국은 사라진다.

그때는 우리도 짐을 챙겨 한 여름밤의 꿈처럼 짧고 아쉬운 추억을 남긴 섬에 작별 인사를 고하는 것이다.

이 작은 섬이 품고 있는 밤의 비밀이 영원하기를 기원하며….

다리 고성 서울식당 앞의 노점상들.
다리 고성 서울식당 앞의 노점상들.김남희
다리 서울식당 앞 가게에 내걸린 염색천들.
다리 서울식당 앞 가게에 내걸린 염색천들.김남희
전통 옷을 차려입은 각 마을 사람들이 '쿤밍 국제 관광전' 개막 행진을 벌이고 있다.
전통 옷을 차려입은 각 마을 사람들이 '쿤밍 국제 관광전' 개막 행진을 벌이고 있다.김남희
돈을 받고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백족 아가씨들이 관광전 개막 행진을 보며 웃고 있다.
돈을 받고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어주는 백족 아가씨들이 관광전 개막 행진을 보며 웃고 있다.김남희
산에서 캐온 난을 파는 이족 아줌마들.
산에서 캐온 난을 파는 이족 아줌마들.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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