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항일유적답사기 (16) - 윤동주 생가 Ⅱ

등록 2003.05.07 08:27수정 2003.05.12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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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윤동주 생가, 명동 교회와는 듬성듬성한 널빤지 울타리가 경계였다

윤동주 생가, 명동 교회와는 듬성듬성한 널빤지 울타리가 경계였다 ⓒ 박도

윤동주의 생가

어린 시절 윤동주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할아버지 대부터 예수를 믿은 집안이었고, 명동 교회를 세운 목사요 독립운동가인 김약연 선생이 바로 윤동주 외삼촌이었다.


이후에도 윤동주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명동촌을 떠나 유학했던 평양의 숭실학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도 모두 미션계 학교였다.

연희전문에 유학중일 때도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오면 윤동주는 명동 교회에서 주일 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기독교 사상이 물씬 배어 있다.

a 교회 마당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닭들

교회 마당에서 모이를 쪼고 있는 닭들 ⓒ 박도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십자가〉


교회당 옆 마당에는 암탉 수탉들이 어울려 한가로이 모이를 쪼고 있었다. 닭들은 낯선 나그네에 대한 경계도 전혀 없었다.


지난날 우리나라 농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지금은 보기 드물어 이국에서 본 정경이 내 유년시절의 추억을 불러일으켜 카메라 셔터를 눌렸다.

윤동주 생가는 명동 교회와 널빤지로 이은 야트막한 울타리로 이어져 있었다. ‘윤동주 생가 옛터 소개’ 팸플릿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시인 윤동주 생가는 1900년경에 그의 할아버지 윤하헌 선생이 지은 집으로 기와를 얹은 10간의 본체와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 구조로 된 집이었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 집에서 태어났다. 1932년 4월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전학하게 되자 그의 할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팔려서 다른 사람이 살다가 1981년에 허물어졌다.

a 윤동주 생가 기둥에 기댄 필자

윤동주 생가 기둥에 기댄 필자 ⓒ 박도

1993년 4월, 명동촌은 그 역사적 의의와 유래를 고려하여 룡정시 정부에서 관광점으로 지정하였다.

이에 룡정시 지산향 인민정부와 룡정시 문학예술계 연합회는 연변대학 조선연구중심의 주선과 사단법인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지원을 받고, 국내외 유지인사들의 정성에 힘입어 1994년 8월, 역사적 유물로써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였다.

1994년 8월 29일
룡정시 지산향 인민정부
룡정시 문학예술계 연합회


명동 교회 마당에서 널빤지 쪽문을 밀고 윤동주 생가로 들어갔다. 아담한 단층 기와집이었다. 현재는 아무도 살지 않은 듯, 방마다 문은 닫혔고 인기척도 없었다.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고즈넉이 적막감만 불러일으켰다.

청년은 처마 모서리에 있는 방명록으로 안내했다. 그의 지나친 친절이 부담스럽던 차에 서명을 한 후, 옆에 놓인 성금함에 금일봉을 넣었다. 이 기금은 건물 유지비와 명동촌 마을 기금으로 쓴다고 했다.

a 생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필자

생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긷는 필자 ⓒ 박도

쪽문과 생가 본체 사이에는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이 바로 〈자화상〉에 나오는 거라고 안내하던 청년이 말했다.

나는 두레박을 들고 우물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우물은 10미터 정도로 꽤 깊었다.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추억처럼 낯선 사나이’가 비쳤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 〈자화상〉


생가 별채 처마 밑에는 늙수그레한 한 아낙네가 목판을 펴놓고 찬 콩국을 팔고 있었다. “선생님들, 한 잔 드시라요” 하면서 애걸하는 눈빛에 못 이겨 10원을 주니까 두 잔을 따라주었다.

이항증 선생과 한 잔씩 나누어 마셨다. 시원하고 구수하며 맛이 담박했다.

생가 앞마당은 울타리도 없는 밭으로 앞이 환히 틔었다. 멀리 윤동주의 모교인 명동소학교가 정면으로 보였다.

명동소학교 종이 ‘땡땡’ 울리면 이 집에서도 들릴 정도의 거리였다. 학교와 집 사이는 온통 담배 밭이었다.

a 윤동주 생가에서 바라 본 명동소학교, 담배밭 옥수수밭 너머로 보이는 하얀 건물이 학교다

윤동주 생가에서 바라 본 명동소학교, 담배밭 옥수수밭 너머로 보이는 하얀 건물이 학교다 ⓒ 박도

사방을 둘러보니 언저리 산수가 너무 아름다워 그대로 며칠 머물고 싶은 마을이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고장이었기에 윤동주는 고향을 배경으로 주옥같은 시를 수없이 쏟았나 보다.

예술가에게 고향은 평생을 지배하는 밑거름이다. 유년과 소년 시절에 본 고향의 산과 들, 마을사람들은 그의 머리 속에 언제나 살아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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