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탕을 나누어주는 택시 운전사

내가 사랑하는 일

등록 2003.05.17 04:47수정 2003.05.1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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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시내 나들이를 가던 길이었습니다. 시내버스가 쉬이 오지 않아 잡아탄 택시 안에서 기분 좋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서른 남짓 되어 보이는 젊은 기사가 우리 내외에게 난데없이 사탕을 내민 것이었습니다.

운전석 옆에 사탕 봉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 손님들도 사탕을 받았으리라는 짐작이 갔습니다. 그 한 알의 사탕은 마치 공중전화기에 짤깍 소리를 내며 떨어진 동전처럼 곧바로 이야기꽃을 피우게 하는 신묘한 힘이 있었습니다.

"기사님 참 친절하시네요!"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고 뒤이어 저도 한 마디 거들었습니다.
"사탕 하나가 사람 기분을 참 좋게 해주네요. 고맙습니다."
그러자 기사님도 정면을 바라본 채 이렇게 말을 받았습니다.
"별거 아닙니다만, 손님께서 기분이 좋으시다니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대화가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아내는 감동을 한 눈치였습니다. 모처럼 나들이 길에 친절한 기사를 만났다는 사실보다는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과 잠시나마 함께 있었던 즐거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저도 내리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막 하려는데 "좋은 시간 되십시오" 라고 큰 소리로 먼저 인사를 하는 바람에 그 인사를 받아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순간 어쩐지 그가 커 보였습니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한 여학생에게 아버지의 직업을 영어로 묻자 조금 머뭇거리는 표정을 짓더니 "택시 드라이버" 라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에 잠깐이나마 스쳤던 표정의 파문으로 인해 저는 영어로 부모의 직업을 묻고 대답하는 것이 단순한 영어공부의 차원을 넘어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한 남학생에게도 같은 질문이 돌아갔습니다. 그 아이는 저를 잠깐 말똥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뜸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 영어로 노가다를 뭐라고 합니까?"


그 표정에 눈곱만큼의 그늘이나 주저함이 없었기에 저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일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가 잘못 사용한 언어에 대하여 이렇게 수정을 해주었을 뿐입니다.
"노가다가 아니고 노동이야."

알고 보니 그 아이의 아버지는 목수였습니다. 목수라는 말에 저는 물을 만난 고기처럼 신바람이 나서 이렇게 떠들어댔습니다.


"목수는 영어로 카펜터야. 예수님도 직업이 목수였지. 선생님이 한때 엄청 좋아했던 그룹 이름도 카펜터스야. 그룹이니까 복수를 사용한 거지. 선생님은 손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목수라는 직업을 가진 분을 보면 참 부럽고 존경스럽더라."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말과 현실은 다른 것 같습니다. 요즘 대학 전공을 정하거나 장래 직업을 선택할 때 자신의 적성이나 취향을 고려하기보다는 주로 성적을 따져서 정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학생 자신보다는 부모의 극성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원하지 않는 길에 들어서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여행을 떠난 셈이지요.

저는 진로상담을 할 때마다 제자들에게 꼭 이런 말을 해줍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평생 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야."

제가 사랑하는 일은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만이 아니라 그들과 만나고 생활하고, 때로는 그들로 인해 괴로워하는 것까지도 저에게는 분명한 일입니다. 아이들이 저를 너무 힘들게 할 때는 제가 받는 봉급 속에 고통수당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에게 온 고통이 아무 것도 아니게 느껴집니다.

물론 교사만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존재는 아닙니다. 철근 노동자의 꼼꼼한 손길이 없이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튼튼한 교실이 지어질 수 없습니다. 지난 해 학교에 교실 세 칸이 더 지어지면서 저는 한 철근 노동자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손에 공구를 들고 꼼꼼하게 철사를 묶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늘 교실에서 수업을 하면서도 교실을 지어준 손길에 대한 고마움이나 그분들의 존재가치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솔직히 그런 수고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집이 지어지는 줄만 알았던 것입니다.

교실 문짝 하나 창문 하나, 그리고 아이들이 앉아 있는 책상 하나 걸상 하나도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들입니다. 가끔 교사가 무슨 노동자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그 말끝에 스스로를 노동자로 전락시킨다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가슴이 아픕니다. 신성한 노동이 전락이라니요?

버스나 택시처럼 적당한 교통수단이 없다면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맞추어 학교에 오기도 힘들 것입니다. 누군가가 꼭 해야할 소중한 일들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직업에 귀천을 따지거나 차별대우를 하는 것은 오히려 웃음을 살 일입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도 업종에 따라 너무 심하게 급료에 차이가 나는 것도 바람직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직업과 그렇지 못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린 일이라고만 잘라서 말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에도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달란트는 화폐의 단위이지만 재능이란 뜻도 있습니다. 예수가 말씀하신 계산법대로라면 열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열 달란트를 남기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기면 됩니다. 제가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 중에는 한 달란트만을 받은 아이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 몫에다 한 달란트만 더 남기면 성공한 인생을 산 셈이 되는 것이지요.

사람을 만나다 보면 때로는 닮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명성을 얻었거나 휘황한 경력을 가진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일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비록 작은 재능을 가졌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면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그날 낯선 손님에게 사탕을 내밀었던 젊고 행복한 택시 운전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겠지요. 저는 지금 그만한 열정과 나눔의 정신을 가지고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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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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