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잊는 것은 반역이다"

항일유적답사기 (19) 연변대학 박창욱 교수를 만나다

등록 2003.05.15 18:16수정 2003.05.1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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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일제하 우리 독립전사들의 터전이었던 만주 벌판, 온통 옥수수밭으로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졌다. 겨울철에는 눈 덮인 황량한 벌판으로 변한다고 한다.

일제하 우리 독립전사들의 터전이었던 만주 벌판, 온통 옥수수밭으로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졌다. 겨울철에는 눈 덮인 황량한 벌판으로 변한다고 한다. ⓒ 박도

통일 후 항일투쟁사를 다시 써야 함

연길로 돌아오는 길에 허 기사는 자꾸만 곰 사육장에 들러 가자고 했다. 그곳에는 입장료도 없을 뿐더러 그냥 부담 없이 눈으로 잠깐 구경만 하라고 권했다.


오전에 두만강에 들러 나올 때도 그가 사슴농장에 차를 세우려는 걸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치게 했는데, 두 번이나 그의 청을 거절하기에는 그동안 친절이 무척 부담이 됐다.

바쁜 일정으로 기사에게 점심 식사도 대접하지 못해 미안한 감도 있어서 나는 봉사료로 50원을 더 주겠다고 달래면서 우리 속담 하나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 사람이 번다’라는 게 있어요.”

눈치 빠른 허 기사는 내 말을 새겨들었는지 속담이 재미있다고 껄껄 웃고는 더 이상 곰 사육장에 들리겠다고 보채지를 않았다. 그는 나와 이 선생을 돈 많은 유람객으로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곰 사육장에 들렸다온 사람들에 따르면, 이곳에는 백두산과 흑룡강성 일대에서 잡아온 100여 마리의 곰을 철책 우리에다 인공 사육하면서 관광객이 보는 가운데 웅담을 꺼내서 판매하는 모양이다.


웅담 제조업자들은 살아있는 곰을 철책에 가두어놓고 심지어 살아있는 곰의 쓸개에다 호스를 연결시켜서 흘러나오는 담즙까지 즉석에서 받아 판매한다고 한다.

아무리 곰의 쓸개가 정력 강장에 신통한 효험이 있다지만 어디 양식 있는 사람이 할 짓인가? 사람은 저만 살겠다고 이런 동물 학대 행위를 해도 되는 건지.


많은 사람들은 이런 잔악한 짓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저지르고서도 하나님을, 부처님을 찾는다. 태초에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이런 잔악한 짓도 허용하셨는지?

점심 식사시간까지 아끼면서 두만강·용정 일대를 서둘러 다녀왔건만, 약속 시간 3시를 조금 넘어서야 빈관에 도착했다. 다행히 약속한 손님이 30분 늦게 오겠다는 연락이 와서 그 틈에 온종일 뒤집어 쓴 먼지를 닦을 수 있었다.

3시 30분, 연변대학 부설 민족연구소 소장인 박창욱 교수가 오셨다. 이분은 동북지역 독립운동사의 대가다. 나는 초면이었지만 독립운동가 후손인 김중생 이항증 두 분과는 구면으로 정담을 나눴다.

박 교수는 역사학자답게 요즘 젊은이들이 ‘역사를 너무 모르는 게 유감’이라는 말머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거를 잊는 것은 반역”으로 민족 정기란 거창한 게 아니라, 바로 자기 핏줄을 아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모름지기 민족에 대한 자호감(自豪感 :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말함)이 있어야만 젊은이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운다면서, 조상들의 투쟁사를 후세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책임은 사회지도층을 비롯한 기성 세대에 있다고, 당신 책임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변의 역사학자 중심으로 지난날의 역사를 정리하여 <역사 발자취 총서>를 펴내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내가 얕은 지식으로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무장 항일 투쟁이 침체된 듯하다고 질문을 드렸다.

박 교수는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 만주국을 세운 후부터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삼광(三光) 작전'이란 이름으로 일제 침략자들이 항일단체에 대하여 감행한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사르고' '모조리 빼앗는' 작전이었다. 이 때문에 독립투사 중 일부는 지하로 숨거나 상해로, 또는 본국으로 잠입했다.

또 몇몇은 일제에 투항하기도 했으며, 또 다른 독립투사들은 항일의 한 방법으로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동북항일연군으로 끝까지 일제와 싸웠고, 또 다른 많은 부류는 빨치산, 곧 항일 반만(抗日反滿 : 일제에 항거하고 괴뢰 만주국에 반대함) 유격대로서 눈부신 공을 세우며 오히려 중국 인민보다 해방 때까지 더 줄기차게 일제에 투쟁했다고 한다.

다만 그동안 조국이 분단되어 냉전 체제로 좌익 계열의 독립운동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왜곡해서 그 기간이 남조선 독립운동사에는 공백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했다.

당시 공산당에 들어간 사람의 대다수는 어디까지나 항일의 한 방법으로 중국공산당을 선택했거나, 당시 젊은이들에게 유행처럼 번진 ML(마르크스 레닌) 사상에 휩쓸린 탓이지, 애초부터 무슨 대단한 이념으로 입당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특히 1943년 모택동 주석이 중국의 소수 민족에게도 해방이 되면 땅과 자치권을 준다는 데 고무되어 더욱 열성적으로 항일투쟁을 했다면서, 해방 후 냉전의 시각으로 독립운동사를 봐서는 안 된다고 박 교수는 여러 차례 역설했다.

a 독립전사들이 넘나들었던 압록강과 국경지대 산들.

독립전사들이 넘나들었던 압록강과 국경지대 산들. ⓒ 박도

한 예로 조선혁명군 제2사 사령 최윤구(崔允龜)를 비롯한 조선혁명군 60여 명의 대원들은 항일을 하기 위해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끝까지 일제와 투쟁했다고 한다.

“분단된 조국이 통일이 되면 흩어진 자료를 모아 항일투쟁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에요”라고 하면서 어떤 독립투사는 그 묘가 남북에 각각 있는 웃지 못할 현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이제는 남북이 서로가 상대를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역사에 잘못을 남기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항일합방 초기 민족주의 계열에서 시작한 항일운동이 밑거름으로 수많은 항일열사가 나왔으므로, 좌익 우익을 초월하여 모든 항일지사는 높이 받들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현재 남조선의 햇볕정책은 때늦은 감은 있지만, 민족 화해에 좋은 정책이라고 하면서, 21세기에는 이러한 남북 화해 분위기가 지속되어 남북이 대화로써 평화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내가 일제 36년간 동북지방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한 독립투사를 굳이 부탁드리자 다음 분을 조심스럽게 추천하였다.

이 분들을 한 분 한 분 들면서도 갑작스런 질문이라 빠진 분도 있을 거라며, 그 당시에는 제대로 기록을 남길 수도 없었고 (일본 군경에게 붙잡히면 항일 투쟁의 증거물이 되기에), 성명도 본명은 숨기거나, 이명(異名)도 어떤 분은 두세 개나 사용했기에, 혹 잘못 알려지거나 빠트린 분도 있을 수 있다면서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박 교수는 그래도 이름이라도 남아 있는 분은 다행이지만, 무명 독립투사로 산야에 쓰러져간 분이 수없이 많다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 후손들은 그분들의 뜨거운 애국심에 깊이 머리 숙여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북간도〔연변 일대〕

민족주의 계열 : 이상설(李相卨) 여준(呂準) 김약연(金躍淵) 정재면(鄭載冕) 등

국민회 계열 : 구춘선(具春先) 마진(馬晋) 강구우(姜九禹) 서일(徐一) 김좌진(金佐鎭) 홍범도(洪範圖) 이동휘(李東輝) 이동춘(李同春) 등

공산주의 계열 : 김일성(金日成) 최용건(崔庸鍵) 김책(金策) 허형식(許亨植) 등

남만주〔압록강·서간도 일대〕

민족주의 계열 : 이회영(李會榮) 이동녕(李東寧) 이상룡(李相龍) 김동삼(金東三) 류인석(柳麟錫) 양세봉(梁世奉) 박장호(朴長浩) 조맹선(趙孟善) 오동진(吳東振) 김한호 등

공산주의 계열 : 리홍광(李紅光) 리민환(李敏煥) 류만희(柳萬熙) 박한종(朴翰鍾) 리광국(李光國) 등


오후 5시 30분, 전 연변대학교 의과대학장을 역임한 강순구(姜順求) 선생이 빈관으로 찾아오셨다.

강 선생의 고향은 경북 상주인데 큰아버지가 석주 선생의 사위로, 할아버지는 석주 선생과 사돈간이었다. 강씨 집안은 1911년 설을 쉰 후 할아버지는 석주 선생의 권유로 가솔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당시 만주로 망명한 분들은 대부분 일가 친척이나 사돈 사이로, 만주 생활 중에도 서로 아는 집안간에 혼인을 한 탓에 사돈 겹사돈으로 얽히고 설켰다.

이는 이국 땅에서 여러 해 지내다보니 아무나 혼인할 수 없어서 아는 집안끼리 통혼한 결과라 하겠다. 그래서 이번 답사에 동행한 이항증, 김중생 선생의 집안간에도 선대에는 사돈간으로, 서로 혈연을 맺고 있었다.

a 지난날 청산리 전투의 전적지였던 산촌 (어랑촌에서 천수평으로 가는 길목)

지난날 청산리 전투의 전적지였던 산촌 (어랑촌에서 천수평으로 가는 길목) ⓒ 박도

나는 강 선생을 통해 님 웨일즈가 지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張志樂)의 얘기도 들을 수 있었고, 독립지사 이광민(李光民) 선생의 아드님 이석화(李錫華)씨의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도 들었다.

이석화씨는 1919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하얼빈 공과 대학을 졸업하고 하얼빈 제3 고교에서 수학 교사로 지내다 귀국하여 건축기사로 일했다.

이분은 건축기사로서 국내 여러 곳의 교량 설계를 하였던 비정치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해방 후 용산철도국에서 건축기사로 근무할 때 아버지 이광민씨가 북한 정권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

이석화씨는 당시 국토가 분단된 현실에서 좌우익의 극심한 대립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가족과 함께 다시 만주로 가려고 38선을 넘어 북상하다가 해주 부근에서 인민군에게 붙들려 토굴 속에 갇혔다.

인민군이 남한의 박헌영에게 이석화씨의 신원 조회를 의뢰하자, 박헌영은 “이석화는 젊고 유능한 청년으로, 조국 건설에 꼭 필요한 인물”이라는 회신을 했다.

이석화씨는 곧 석방되어 다시 서울로 돌아와 용산철도국에 다시 근무하다가 곧 철도 파업으로 육군 형무소에 수감됐다.

수감생활 중에 6.25 한국전쟁으로 풀려나자 후퇴 길에 혼자 월북하여 북한에서 함흥지구 공업 책임자로 있던 중, 삼촌 이광국씨가 연안파 계열로 숙청 당할 때 삼촌에 대한 비판을 거부하다가 같이 숙청되었다고 했다.

이석화씨의 부인은 전라도 명문 가문에다 경기여고 출신의 '인텔리' 여성으로, 남한에 남아 살면서 이석화씨 부인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어 보신책으로 경찰 고위 간부와 재혼했다.

부인은 두 아들의 성(姓)까지 바꾸면서 살다가 그래도 못 미더워 아이들을 브라질로 이민보냈고, 그 아이들이 성년이 된 후에야 비로소 제 성을 찾아주었다고 했다.

이석화씨는 조국 분단에 희생된 인물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최인훈 씨 <광장>의 주인공 이명훈과 비슷한 인물이었다. 일제 36년과 조국 분단 반세기에 희생된 인물이 어찌 이분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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