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백화산의 슬픔과 기원(祈願)

등록 2003.05.20 13:39수정 2004.03.11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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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고장에나 그 고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산이 있다. 그 산은 그 고장의 정서나 특징, 사람들의 성정을 일정 부분 반영하기도 한다. 또 대개는 그 고장의 역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갖가지 전설이나 실제적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충남 태안의 명산은 백화산(白華山)이다. 태안 읍내의 북쪽을 병풍처럼 막아주는 진산(鎭山)이기도 한데, 정상에 서서 내려다보면 태안 읍내를 한 아름으로 껴안고 있는 듯한 형태가 더욱 분명해진다.

해발 284미터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온통 바위로 뒤덮인 아기자기한 모습은 아름다움과 함께 매우 강건하고 웅혼한 느낌을 준다. 태안에 와서 처음 백화산을 본 어느 유명 시인은 "아, 미산(美山)이네요!"라는 탄성과 함께 특유의 '기상' 같은 것이 느껴진다고 했다.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태안 사람들은 고향을 생각하게 되면 우선 백화산부터 떠올린다고 한다. 백화산은 모든 출향인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셈이다. 백화산이 있어 그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고향의 질감이 한결 명확해지는 것이다.

태안 토박이들은 오늘날에도 '백화산기질'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성격이 강건하고 확실한 사람을 일러 '백화산 물을 먹었다'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백화산은 태안 사람들의 유별난 자존심의 근거이기도 한 셈이다.

옛날 일제 36년 동안 일본 사람들이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한 동네라는 사실도 태안 사람들의 내면에서 하나의 자부심으로 작용한다. 일본 사람들이 행세를 하지 못한 큰 고장은 개성이요, 중간 고장은 강화요, 작은 고을은 태안이라는 말이 옛날부터 회자되었거니와, 태안은 정말 일본 사람들이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했을 정도로 배타성이 강하고 성깔이 드센 곳이었다.


시절이 현대로 오고 유입 인구가 점차 늘어나면서 태안 사람들의 배타심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투영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거의 사라진 상황 속에서 오히려 묘한 향수의 하나로 자리하게 되고 알게 모르게 백화산에 대한 애정을 배가시켜 주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태안의 백화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불로 추정되는 보물 '마애삼존불'로 말미암아 백제 때의 사연도 알차게 간직하고 있다. 왜구의 침략이 자심했던 고려 후기 고을 수령의 탈주로 폐군(廢郡)이 되고만 쓰라린 역사도 지켜본 백화산은 조선조 초기 태안을 찾은 태종과 신숙주의 발자취도 간직하고 있고, 방위각에 따라 45년마다 전국의 명산으로 자리를 옮기며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위해 임금이 내린 향으로 제를 지낸 '태일전(太一殿)'의 사연도 간직하고 있다.


근세로 오면서 동학혁명농민군의 처절한 항쟁의 흔적도 간직하게 되고, '교장바위'에 어려 있는 일제 때의 재미있는 일화도 간직하게 되고, 포탄 세례로 6·25사변의 참상도 온 몸으로 겪은 백화산은 오늘날에는 민족 분단의 한가지 모습이기도 한 미군의 미사일 기지(지금은 한국군이 사용)를 어쩔 수 없이 한쪽 어깨에 걸머지고 있는 형국이기도 하다.

백화산의 두 봉우리 중에서 가로림만의 아름다운 풍광을 더욱 쉽게 조망할 수 있는 북봉(北峰)을 온통 차지해 버린 미사일 기지는 1960년대 초에 건설되었다. 당시 태안면 삭선리 금굴산 아래쪽에 대대 규모의 미군부대가 자리를 잡으면서 시작된 백화산 미사일 기지 건설은 무수한 다이너마이트 폭발음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6·25 전쟁 때의 포탄 폭발음을 연상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미군이 타고 온 헬리콥터, 그들이 모는 장갑차와 트럭 뒤에 매달린 대포, 불도저와 포크레인, 그들이 가끔 던져주거나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아 주는 초콜릿과 과자…. 그 모든 것들은 당시 구경거리라면 끼니도 잊고 강아지처럼 쫓아다니던 우리들에겐 너무도 큰 경이(驚異)였다.

미군 병사 하나가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은 과자 하나를 선점하기 위해 친구들과 머리통을 부딪치며 경쟁을 벌인 일은, 그리고 그 장면을 보며 깔깔 웃던 미군 병사들에 대한 기억은 어른이 된 후부터 내 뇌리에서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백화산의 미군 미사일 기지는 1970년대 중반 주한 미군이 감축되면서 한국군에게 이양되었다. 한동안은 육군 부대가 주둔하며 관리했으나, 10여 년 전부터 공군 부대가 맡고 있다.

나는 백화산을 오를 적마다 북봉을 차지하고 있는 군 기지를 보면 이상한 상실감을 겪곤 한다. 백화산의 정상인 남봉에서 북봉은 지척의 거리다. 가리는 것도 없으니 그곳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또 그곳에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구호소리, 차임벨 소리, 전달 사항을 알리는 확성기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없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북봉을 바로 눈 앞에 두고도 그곳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상한 곤혹감을 안겨 준다. 초등학생 시절 소풍을 가서 신나게 뛰놀고 했던 곳인데….

나는 백화산을 처음 올라온 사람들에겐 (그들의 초행 걸음을 눈치로 알아채고) 스스로 말을 걸고 주변 풍광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천수만 상실의 아픔도 들려주고, 천수만과 가로림만의 물을 이으려고 했던 옛날 여러 차례의 공사 실패에 관한 얘기도 들려주고, 국방과학연구평가단의 포사격 시험장이 된 바람에 몽산포 앞 바다에 있는 거아도 역시 이제는 갈 수 없는 섬이 된 이야기도 들려준다.

그러면서도 지척에 있는 백화산 북봉의 미사일 기지에 관해서는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왠지 그 얘기는 하기가 싫었다. 정말이지 그 얘기를 한 기억은 전혀 없다. 지난해 가을 인터넷 게시판에서 만난 여러 외지 문인들이 태안에 와서 함께 백화산을 올랐을 때도 사면 팔방의 그림 같은 풍광만을 자랑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지난 3월 경남 울산의 한 시인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생각하면서 홀로 산을 올랐다가 내려오던 그는 나를 우연히 만나서, 나와 함께 다시 산을 올랐는데, 나는 의도적으로 그에게 미사일 기지 얘기를 일체 하지 않았다. 그에게 뭔가를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가 그저 백화산의 아름다움만을 느끼게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후 울산에 돌아간 그가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을 보니 그는 역시 감각이 예민한 시인이었다. 백화산의 형편없이 손상된 미관을 그는 아파하고 있었다. 백화산의 상처 입은 모습에서 화약 냄새도 맡고 있었고, 민족 분단과 원거리 대치 상황의 슬픔도 읽어내고 있었다.

나는 참으로 무안한 심정이었다. 내가 스스로 노출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치부를 그에게 고스란히 들켜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미 고정화되어 버린 백화산의 일그러진 미관을 다시 확인하며 백화산의 신음을 새롭게 듣는 기분이었다. 내가 스스로 일깨우지 않으려 하는 가운데서도 내 가슴속에 늘 잠재되어 있던 백화산의 원형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스럽게 절절히 살아나는 것을 아프게 느껴야 했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오래 전부터 백화산을 오를 때는 '묵주기도'를 한다. 일정한 코스로 산을 올라가면서 15단, 내려가면서 15단, 도합 30단씩을 바친다. 10단까지는 각기 다른 열 가지의 지향을 둔다. 그리고 태을암 근처 너럭바위에 당도하는 시간에 10단의 기도를 마친다.

11단부터 30단까지는 5단씩 묶어 네 가지의 지향을 두는데, 태을암 근처 너럭바위에서부터 시작하는 최초 5단의 지향은 이런 것이다.

"강원도 인제의 그 소년과 남태현에게 주님의 크신 은총을 비오며, 이라크 전쟁에서 숨진 모든 병사들과 유가족들, 그 곳의 모든 병사들과 모든 아라크 국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가 매번 태을암 근처에서부터 백화산 정상을 향해 오르면서 그런 지향으로 5단의 묵주기도를 바치는 것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군부대의 존재를 육감적으로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지뢰 매설' 경고판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부터 피비린내와 화약냄새를 느끼게 된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내 기도 지향 속에 존재하는 '강원도 인제의 그 소년'은 누구이고 '남태현'이라는 사람은 누구이며, 내가 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지 궁금해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강원도 인제의 그 소년'은 휴일에 부모를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하필이면 지뢰가 묻힌 곳에 넘어져 두 손과 한쪽 눈을 잃은 고등학생 소년이다. 나는 그의 기가 막힌 사연을 지난해 봄 KBS 1 텔레비전 '사랑의 리퀘스트' 프로그램에서 보았다. 병실 문 앞에서 몸부림치는 아버지의 모습도 보았다.

너무도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전화기의 단추를 누르는 일과 기도 뿐이었다. 하느님을 믿고 사는 천주교 신자인 이상 나는 그를 위해 기도라도 해야 했다. 아니, 반드시 기도를 해야 했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백화산을 오르면서 하는 묵주기도에, 태을암 근처에서부터 새로 시작하는 5단 기도의 지향에 그 소년에 대한 기원을 넣기 시작했다.

남태현이라는 사람은 우리 동네에 살고 있는 삼십대 초반의 청년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지망 대학에 합격한 기쁨을 안고 집으로 가던 중 군 트럭에 치어 의식불명 상태에서 15일만에 깨어났으나 몸의 한쪽 신경을 잃는 불구가 되고 말았다. 하반신 마비보다도 몸 한쪽의 신경을 잃는 반신불수 상태가 얼마나 더 활동을 제약하는가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는 소송 끝에 정부로부터 받은 보상금으로 연립주택 하나 장만해서 칠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나는 그에게 꽤 많은 책을 제공해 주고, 틈나는 대로 방문을 해서 함께 기도하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고 있다.

나는 그를 생각하면 기도의 의무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책을 갖다주는 일도 있고, 잠시 얘기를 나누어주는 일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일은 기도라고 생각한다. 기도가 당장 현실적으로는 어떤 효능이나 징표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리고 나는 '기복신앙'을 혐오하는 사람이지만, 하느님께서 어떤 형태로든 남태현의 현실 삶을 돌보아주시기를 간청하는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참으로 나의 의무요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뇨와 통풍이라는 심각한 질병을 안고 사는 불행한 사람이지만, 건강 관리를 위해 매일같이 산을 오를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기도 하다. 내게 있어 매일같이 산을 오를 수 있다는 것은 매일같이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니, 더욱 행복하다. 실로 복 받은 팔자가 아닐 수 없다.

내게 이런 조건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 더불어 우리 고장에 백화산이라는 명산을 주신 하느님께 늘 감사한다. 나는 백화산을 사랑한다. 백화산에는 내 슬픔도 있고 기원도 있다. 내가 백화산을 사랑하는 것만큼 나는 백화산에 어려 있는 그 모든 사연들과 슬픔들도 사랑하고, 나의 수많은 기원들을 온 산에 아로새기며 살 것이다.

나의 참된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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