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묵주를 지팡이 삼고 외 3편

신작시 4편

등록 2003.06.10 08:47수정 2003.06.1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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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있을까


모처럼 만에 또 술 한잔 마시니
내 작은 가슴에 여유가 생기고
감미로운 슬픔이 부풀어오른다

오로지 자신만의 의지로
늘 술을 멀리 하며
육십 평생을 살아왔다는 선배

개신교의 신앙 계율에 묶여
일찍부터 술과 담을 쌓고 사는 선배

술이 체질에 맞지 않아
마시지 못하는 또래 김 시인
후배 조 시인, 그리고…

거의 술잔이 오가지 않는 문학회 자리
한 친구 홀로 자작하는 모습이 미안하여
한잔 청하고 거드는 심사

술을 즐기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문득 부럽다
하다가도 섭섭하다

술을 흐벅지게 마시고 싶어도
시시각각 인고하는 심사도
문득 외롭다


내가 긴 세월 즐기고 풍미했던
애주(愛酒)의 세계를
취기 속의 풍성한 감상과 감동들을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 속에서
정말 외롭다

모처럼 만에 겨우 술 한잔 기울이고
감미로운 슬픔에 젖는
이 애틋한 심사를
그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병마 속에서도 내가 끝내 아끼며
그리워하고 싶은
술 한잔의 감미로운 슬픔을….




만취를 탐하지 않습니다


온 산야에
진달래 만발하던 날
오랜만에 다시
한 길을 걸었네

가까이 두고도
늘 그리워하는 길

태안읍 도내리와
팔봉면 어송리를 잇는
수십 개의 전신주들을 거느린
곧바른 길

바다의 제방 길과 이어져서
긴 저수지를 끼고
산야의 수많은 생명들과 조우하며
아스라이 뻗은 길

그리움에 못 이겨
다시 그 길을 걸으며
뒷걸음으로도 걸으며
예정되어 있는 석별의 시간을
지레 아쉬워하며
막걸리 한 잔을 그리워했네

감미로운 슬픔 때문에
감미로운 슬픔을 위해
팔봉면 소재지 한적한 마을
단 하나 아직 남아 있는 목로 집에서
막걸리 한 대접 들이키고

통풍 발작을 예감하며
혈당 상승을 자인하며
한결 도드라지는
감미로운 슬픔 속에서

더욱 아스라이 뻗은 길을 되돌아오며
간절히 기도했네

하느님
결코 만취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막걸리 한 사발만을 마시겠습니다
막걸리 한 사발로도 가능한
겹겹이 차 오르는 저의 감미로운 슬픔을
제가 좀더 사랑하며 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막걸리 한 사발의 행복을
제게 허락해 주십시오

내 삶과 동반하는
병고(病苦)의 슬픔 속에서
점점 짧아지는 남은 길을 아쉬워하며
간절히 기도했네
마침내 눈물 글썽이며….


묵주를 지팡이 삼고

또 한해 오월
대자연의 치마폭에서 풍겨나는
감미로운 훈향 속에서
어머니의 체취에 휩싸이는 듯한
아늑함과 안온함을 체감합니다

며칠 전에는 백화산을 오르며
온 산에 꽉 찬
아카시아 꽃향기 속에서
문득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식물의 생식기가 발정한 상태인
아름다운 꽃송이들과 향기를 맘껏 즐기며
또 문득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식물 생식기의 그 아름다운 발정 속에
식물에게도 깃들여 있는
모성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꽃향기처럼 감득할 수 있었습니다

동물처럼 몸으로 분만을 하지 못하고
몸으로 보듬어 기르지 못하는 대신
번식 방법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꽃과 향기를
식물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안배는,
곧 모성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으로
세상을 장식하기 위한 뜻임을
다시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식물의 발정으로 나타나는
꽃과 향기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기보다는
모성의 아름다움을 표징하는 것임을
깊이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안배 아래
영겁의 세월을 이어오고 이어가는
꽃과 향기
모성의 찬란한 생명력을 실감하며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안배하신
모성의 신비를
하느님마저도 스스로 깃들이고 누리신
모성의 아름다움을
오래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여자에게 잉태, 분만의 고통과 함께
바다와 같은 모성을 불어넣어 주시고
당신 스스로 모성을 누리신 것은
당신의 지음을 받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모성에 의지하게 하고
모성의 꽃을 추구하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천국의 꽃밭에 이르는 길을
더욱 아기자기하고도 쉽게 베푸시기 위함임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성모 마리아님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안에서
창세기 때부터 구세주의 어머니로 예언되신 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하셨으되
성부의 꽃이시고 성령의 꽃이시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모성의 꽃이 되신 분

어머님 당신의 모성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이 함께 하시고
당신의 그 모성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가는 제 발걸음이
한결 안전할 수 있음을 저는 압니다

이 세상을 모성의 힘으로 가꾸시는 하느님
세상 사람들에게 모성의 위대함을 알게 해주신 하느님
당신을 향해 가는 제게
성모 마리아
모성의 징검다리를 놓아주시어 더욱 감사합니다

저로 하여금
어머니를 공경하며 사랑하게 하시고
길잡이이신 어머니께 의지하게 하시고
초기교회 신자들이 성모 마리아님께 드린
장미 꽃다발에서 유래한 묵주를
제 손에도 지팡이처럼 쥐어 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묵주를 쥐고 백화산을 오를 때마다
저는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이 감사함과 행복함으로
하루도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고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묵주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영혼
이 세상의 온갖 공동선을 위해
제가 간절하고 명료하게 기도할 수 있음을
오늘도 감사히 되새기며
제 묵주기도의 갖가지 지향들을
또한 깊이 사랑하겠습니다

우리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님께
전구(轉求)를 비는 저의 기도가
하느님께 측량할 수도 없는 효력으로 꽃 피어남을
잘 알고 믿기에
천상에서 피어나는
내 어머니 모성의 꽃을 소원하고 추구하며

오늘도 내 손에서
묵주라는 이름의 지팡이를
놓지 않겠습니다
이승의 나그네인 저
이승의 여행을 잘 마칠 때까지….


나그네의 꿈



나에게도 꿈이 있었네
하나같이 세상의 길 위에
집을 짓는 꿈이었지

그 꿈들을 잃어가면서
아쉬움과 그리움도
내 세월의 길이 만큼
점점 커가기 시작했지

나에게도 꿈이 있었고
그리움에 젖을 수 있다는 것은
오늘도 꿈을 지닐 수 있다는 얘기

내 현실의 꿈이 모두 사라진 빈자리에
이제는 나그네의 꿈을 꾸네
나그네에게도 꿈이 있음을
알고 있기에

오늘도 번잡 무성한 일상사
끊임없는 파도를 헤치고
내 인생의 배를 저어가며
다시 나그네의 꿈을 생각하네

나그네를 나그네로 살게 하는
나그네의 꿈
결코 후회하지 않을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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