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당당한 전문인, 대통령 안 부러워요"

[새벽을 여는 사람들 26] 동대문 헤어 디자이너 곽명란씨

등록 2003.07.04 10:00수정 2003.07.04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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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
서울 올빼미 특별시 동대문. 밤이면 환히 피어나는 요염한 네온사인 덕에 달빛도 아스라히 지나간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에서 터져 나오는 최신 가요와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청춘들의 열기가 밤의 적막함을 뒤흔든다.

온갖 사연에 울고 웃고 노래하며 춤추는 다양한 인생이 용광로처럼 들끓어 오른다. 좀처럼 꺼지지 않는 도시의 혼란스러움을 뒤로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정성 들여 차분히 어루만지는 사람이 있다. 그녀의 손길 따라 살아 숨쉬는 머리카락이 재단장을 마칠쯤이면 머리카락 주인은 변화된 자신의 모습에서 삶의 활력을 얻는다.


16년째 '미'를 끊임없이 공부하며 창조하고 있는 헤어 디자이너 곽명란(36)씨는 무언가 '변화'를 필요로 하는 지친 도시인에게 신선한 에너지를 선사하고 있다.

김진석
24시간 연중 무휴. 오후 1시에 출근해 새벽 4시에 퇴근하는 곽씨는 일주일째 지독한 목감기를 앓고 있었다. 피곤함이 빨갛게 물든 눈과는 아랑 곳 없이 고객의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그녀의 손놀림이 분주하기만 하다.

"대통령도 안 부러워요! 대통령 혹은 영부인도 결국 우리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나요? 헤어 디자이너는 예술을 창조하는 당당한 전문직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얼굴에서 풍기는 첫 이미지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첫 이미지를 창조해 주는 사람이잖아요. 다시 태어난다 해도 전 헤어 디자이너를 할 거예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다렸다는 듯 시원하게 자신의 직업관을 당당히 피력하는 곽씨의 눈빛에 거센 '생동'이 포효한다. 도무지 빈틈이 없어 뵈는 그녀에게도 초보의 시절이 있었다.

"정말 초창기 시절이었는데 손님 머리를 너무 만지고 싶었어요. 마침 원장 선생님이 없는 틈을 타 무조건 제가 해보겠노라 도전해서 간신히 커트 할 기회를 얻었어요. 긴 머리를 어깨까지 자르는 거 였는데 어느 새 하다보니 귀밑까지 자르고 말았어요. 양쪽 머리 길이가 달라 보여 계속 똑같이 하려다 보니 그렇게 돼버린 거죠.

손님은 울그락 불그락 하며 화를 내시고 급기야 원장 선생님을 불렀어요. 원장 선생님이 보자 마자 손님 보는 앞에서 바로 혼을 내시는데 그때가 정말 가장 많이 울었을 거예요. 나중엔 그 손님에게 너무 미안해 자비를 털어 파마를 해드리기도 했어요. 그저 어떻해서든 머리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마음에 겁없이 달려들었던 거죠."


김진석
초보의 설움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인력이 부족해 쉽게 미용 교육을 접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그녀의 초보 시절 환경은 '고됨'의 연속이었다.

"요즘 친구들은 상상도 못해요. 매일 먹는 게 눈치밥이죠. 따뜻한 밥 한 끼 제대로 먹을 틈도 없어요. 원장 선생님 속옷을 일일이 손빨래 하고 한 겨울에 맨 손으로 찬물에 담요를 빨았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 디자이너로 다시 태어나겠노라 강한 의지를 밝힌 곽씨였건만 자식 앞에서만은 그녀도 보통의 부모와 다를 바 없는 영원한 약자였다.


같은 헤어 디자이너인 남편과 자신의 피를 이어 받아 아이들도 손재주가 여간이 아니라고 칭찬을 하면서도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한다.

"정작 당신은 다음 생애에서조차 한 길을 걷고 싶어 할 만큼 직업을 사랑하면서 왜 2세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너무 힘들어서요. 우리까지만 힘들었으면 해요"라고 짧고 굵게 대답할 뿐이었다.

김진석
지난 16년간 외길을 밟아 오면서 그녀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맺음이었다.

"사람에게 치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초보일 때는 손님을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 헤맸고 지금은 후배를 양성하는 경영자의 입장으로서 어떻게 해야 참 미용인을 양성할 수 있는지 고민이 많이 돼요.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하는데 요즘은 현실이 너무 각박해진 것 같아 참 안타까워요. 적어도 제가 처음 미용을 배울 때만해도 같은 동료들끼리는 함께 고단함을 달래고 도움도 줬는데 요즘은 서로 경쟁이 심해 못 뺏어가 안달이 난 것 같아요.

남들이 들으면 바보라고 놀릴 지 모르지만 정말 힘들어도 인정이 있고 순수했던 옛날이 더 좋았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요. 정확히 손익을 계산하며 그저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듯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시대가 너무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진석
지금이야 미용이 학문의 한 분야로 자리잡았지만 과거엔 체계적으로 쌓여진 지식이나 데이터가 없어 혼자서 모든 걸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그만큼 어렵게 배웠기에 쉬이 가르침이 이어지질 않았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요즘은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굉장히 빠르고 민감하지만 과거에 비해 쉬이 헤어 디자이너가 되고 또 도중에 금방 포기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이러한 세태에 대해 그녀는 후배를 양성하는 입장으로서 참 미용인을 만나는 게 보기 드물다며 연신 씁쓸해 한다.

"인력난이 심각해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과거에 비해 쉽게 헤어 디자이너 일을 시작할 수는 있어요. 그래서 그런지 스스로 무언가를 새롭게 시도해 보려하기 보다는 편하고 좀더 빠르게만 배우려 해요. 그러다 힘들면 또 쉽게 시작한 만큼 금세 포기해 버리고 말죠.

참 미용인이 되려면 고단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어야 해요. 미용인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큰 조건은 '인내심' 이에요. 기술이라는 게 결코 하루 아침에 이뤄 지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노력한 만큼 반드시 돌아오기에 결국 자신의 의지에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거죠. 남들은 손재주가 타고 난다고 하지만 오히려 끊임없이 하고자 하는 의지로 여러 번 창작을 하다 보면 손재주는 자연스레 따라 오게 되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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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하기 바로 전 날 까지도 근무를 하고 출산 후 하루만에 다시 교육을 하러 나왔다는 그녀는 스스로의 능력에 80% 만족 할 따름이라고 한다.

"항상 20%가 남아요. 지금보다 더 완벽해 지고 싶어요. 근데 미용이라는 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원히 정답이 없는 것 같아요. 매번 어려운 주관식 문제를 푸는 기분이에요. 멈춰있는 순간은 곧 이 바닥에서 죽음을 의미해요. 때문에 100% 만족이라는 걸 할 수가 없어요."

그녀의 특기는 남들이 안 된다고 포기한 머리를(일명 수세미 혹은 나일론 머리) 나름의 스타일로 성공시키는 것이다. 오히려 남들이 못 해 포기한 머리를 만지는 게 더 짜릿하고 재미있다고 말하는 곽씨는 천상 영락 없는 프로였다.

기본적으로 헤어디자이너는 밥때를 놓치고 하루 종일 서 있기에 위장병과 디스크를 직업병으로 갖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여기에 팔목 관절이 하나 더 덧붙여졌다. 그러나 각종 직업병도 그녀에겐 창작 의지를 붙태우는 데 쓰이는 연료에 불과하다.

실습하는 후배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머리를 실험용으로 대주는 그녀는 자신에게 머리 손질을 받는 친정 어머님이 기뻐할 때가 가장 흐뭇한 순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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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자신의 머리는 손질하지 않는 그녀의 미적 철학은 '자연스러움'으로 요약된다.

"요즘은 정말 천차만별의 개성시대에요. 특별한 유행이나 인위적인 꾸밈을 쫓아가는 게 오히려 더 촌스러워요. 그냥 있는 그대로 자기 스타일을 살려 자연스럽게 연출해 주는 게 좋아요.

예전엔 머리가 날리거나 뻗치면 단정하지 못 해 보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자연스러움으로 치부되어 '바람머리'라는 유행을 만들었잖아요. 유난히 요즘 들어 성형에 민감한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정말 컴플렉스 여서 못 살 정도가 아니라면 굳이 성형을 하지 않았으면 해요.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자연스러울 때가 가장 아름다워요. 나중에 나이 들면 성형한 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또 다시 성형을 하게 될 수도 있어요. 동양인은 동양인 나름의 얼굴과 체형이 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서양인의 체형과 얼굴을 따라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 아쉬워요."

모발 상태만 봐도 사람의 성격과 건강 상태를 꽤 뚫는 그녀는 '사람을 키울 수 있는 경영인'이 되는 게 앞으로의 바람이라고 한다.

"앞으로 계속 후배 양성을 하고 싶어요. 결국 가게라는 건 종업원이 돈을 벌어들이는 거지 원장이 돈을 벌어들이는 게 아니잖아요. 종업원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참 경영인이자 미용인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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