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꼭 내 꿈 꿔야 돼"

<새벽을 여는 사람들 27> 백혈병 은진이의 희망

등록 2003.07.08 11:20수정 2003.07.0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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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
매직키드 마수리, 짱구, 뿡뿡이를 좋아하는 다섯살배기 은진이는 된장찌개와 고추장을 즐겨 먹고 피자보다도 부침개를 더 좋아합니다. 의젓하고 고집있는 행동으로 같은 병동의 주변 어르신들은 은진이를 '맏며느리 감'이라 부르곤 합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고 씩씩하던 은진이가 감기 기운을 보이자 단순한 감기인 줄로만 알고 동네 의원에서 1주일을 치료했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아찔한 열꽃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명랑하게 잘 뛰어 놀던 은진이가 멍하니 TV 앞에 앉아 있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점점 혈색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잔인함은 그렇게 감기처럼 은근슬쩍 뚜렷한 원인 없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막 한글을 깨우쳐갈 무렵 은진이는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이라는 서슬 퍼런 단어를 가장 먼저 배워버렸습니다.

김진석
아직은 혈소판 수치가 낮아 본격적으로 항암치료에 들어가지 못하는 은진이는 스스로가 '혈소판 수치'를 챙기며, 이를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듭니다.

"은진이가 다른 5살처럼 어리광도 부리고 좀 애다웠으면 좋겠는데 애가 너무 의젓하게 행동해 버리니깐 그게 오히려 더 가슴이 아파요. 저보다 더 빨리 일어나서는 꼬박꼬박 체온검사부터 시작해 소변검사까지 행여 제가 까먹을라 일일이 알려주고 가르쳐줘요.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못 먹어 짜증내고 한참 떼쓸 만도 한데 이제 다섯 살짜리 애가 '혈소판 낮아진다'며 자기가 알아서 음식 조절을 해요."


현재 은진이가 먹고 있는 약의 부작용 중 하나는 식욕이 왕성해져 무슨 음식이든 먹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이라 합니다. 은진이와 같은 병명을 지닌 어떤 꼬마도 자기 전에 음식을 챙겨 먹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무엇이든 다 먹어 보고 싶고 친구들과 어울려 먹지 말라는 불량식품만 더 골라 먹고 싶은 5살. "먹고 싶은 것 없니?"라는 엄마의 질문에 은진이는 그저 "혈소판 올라가고 난 다음"이라는 말을 할 뿐입니다.


엄마는 그 흔한 반찬 투정 없이 병원에서 준 음식을 잘 먹고 있는 은진이가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오히려 아픔을 담담히 받아들인 듯한 은진이의 어른스러움에 애써 입술을 깨뭅니다.

김진석
이름대신 은진이 엄마로 불리는 천옥희(25)씨의 뱃속엔 은진이 동생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은진이를 가질 때만 해도 살이 많이 쪘는데, 지금은 살도 많이 빠지고 과로로 코피까지 흘리는 바람에 남편 허민욱(29)씨의 가슴엔 장대같은 비가 무심히 쏟아질 따름입니다.

뱃속에 있는 생명을 위해 신선한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하는 천씨는 은진이가 생과일을 먹지 못하기에 그녀 또한 과일을 먹지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과일은 고사하고 물 한 모금조차도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는 천씨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천씨도 은진이 못지 않게 점점 파리해져가고 이를 보다 못한 주변 분들이 "뱃속에 있는 아기도 건강히 키워야 하지 않겠느냐"며 그녀를 설득했습니다.

은진이가 아프고 난 후 갑자기 3일만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작은 가게를 꾸리시느라 딱히 천씨 대신 은진이를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허씨마저도 군인이 직업인지라 주말이 아닌 평일엔 은진이를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결국 엄마보다도 더 의연히 아픔을 받아들이는 은진이의 웃음이 천씨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젠 은진이 동생을 위해 과일도 열심히 먹고 같이 살아야겠노라 심정을 담담히 고백하는 그녀가 은진이와 쏙 빼 닮은 미소를 짓습니다.

천씨가 은진이에게 바라는 건 오직 단 하나. 나쁜 행동만 아니면 무엇을 하든 다 좋으니 제발 건강하게 성장해주길 바라고 또 바랍니다.

김진석
"깨끗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 보여주면서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는 당당한 아버지요. 그리고 나중에 우리 은진이에게 작은 가게나 집이라도 한 채 물려주고 싶어요.

그냥 남들처럼 은진이가 평범한 아이로 성장했으면 해요. 너무 튀거나 특별한 아이가 아닌 보통의 직장을 가지고 남에게 피해 안주고 같이 어울려 평범하게 사는 보통 사람이 됐으면 해요."

횟수로 10년 째 직업 군인을 하고 있는 허씨는 은진이가 아프고 난 후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꼈다고 합니다. 주말이나 외박을 통해서만 은진이를 만날 수 있는 그는 홀몸이 아닌 아내에게 무거운 짐을 떠맡기는 건 아닌지 연방 미안해하며 가슴 쓰려 합니다.

또 그의 직업이 공무원에 속하는 군인인지라 상대적으로 각종 사회 단체의 지원 또한 미미합니다. 은진이가 입원한 지 아직 한 달이 채 안되었건만 벌써 들어간 병원비가 300만원을 웃돌고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항암치료, 2년간의 외래 진료, 그리고 5년간의 정기 검진까지 '시간'과 '돈'의 힘겨운 싸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평소에 백혈병 걸린 어린아이들이 TV에 나오면 마음이 아파 일부러 채널을 돌려 버렸다는 허씨는 "혹시 내가 그간 아픈 어린이들에게 무관심해서 우리 은진이가 이렇게 아픈 걸까, 왜 하필 내 딸인가"라는 생각에 은진이의 병을 받아들이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고 합니다.

은진이가 백혈병 진단을 받을 때 같이 옆에서 지켜주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사무친다는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로 아빠를 찾는 은진이 옆에 매일 함께 있어 주지 못함이 가장 가슴 저린 일이라고 합니다.

김진석
"엄마는 돼지고기 꿈꾸고 아빠만 돼지 꿈 꾸세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빠와 곧 헤어질 것을 아는지 잠이 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은진이는 아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평일이면 또 헤어질 아빠의 목소리를 기억하려는 듯 바로 코앞에 앉아 있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며 갖은 애교로 허씨의 웃음을 자아냅니다.

곧 죽어도 자신은 무조건 "아빠를 닮았다"고 주장하는 은진이는 "꼭 내 꿈 꿔야 돼요"라며 꿈에서조차 아빠와 만나고 싶어합니다.

은진이의 가녀린 손목과 발목에는 주사 바늘로 인한 퍼런 멍과 구멍 자국이 듬성듬성 남아 있습니다. 혈관이 잡히지 않아 여러 번 바늘을 꽂을 때마다 은진이는 그간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리곤 합니다.

"인턴 선생님보고 싶어!"

매번 인턴 선생님이 바뀔 때마다 힘들어하는 은진이가 이번엔 다행히도 주사를 한 번에 잘 놓는 인턴 선생님을 만났다며 아빠 다음으로 보고 싶어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생글거리며 잘 웃고 매일 주사 놓는 인턴 선생님이 미울 법도 한데 오히려 보고 싶다고 말하는 은진이의 고운 마음에 아마도 마음 고약한 도깨비가 잠깐 심술을 부린 모양입니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고 어른들 말씀 잘 들으며 귀염받는 은진이를 시샘한 도깨비가 짓꿎은 마술을 걸어 놓았나 봅니다.

김진석
"응급실에 있으면서 은진이보다 더 아픈 아이들을 보며 어찌나 가슴이 저렸는지 몰라요. 그래도 아직 우리 은진이는 항암 치료에 들어가지 않아 머리가 빠지지 않았지만 항암치료로 머리 빠지고 힘들어하는 애들 보면 과연 그 부모 심정이 어떨까 싶어요.

정말로 가장 염려되고 걱정되는 건 재발의 가능성이에요. 의외로 재발돼서 다시 입원하는 환자들이 많아요. 그 분들이 스스로 조심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분명 나름대로는 열심히 치료받았을 텐데 그렇게 다시 오는 분들을 보면 정말이지 앞이 깜깜해져요."

허씨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은진이와 홀몸이 아닌 아내를 뒤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합니다. 그는 은진이가 퇴원하면 고기와 생과일을 원없이 사주고 싶다며 얼른 은진이가 일어나 예전처럼 친구들과 신나게 뛰어 놀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아빠 아빠"라고 부르며 옆에 있는지 확인하는 은진이의 목소리가 잦아듭니다.

"뭐 먹고 싶니?"라는 질문에 "혈소판 높아진 다음에 먹을래요"라는 말대신 "수박이랑 아이스크림이요!"라고 신나게 소리치는 은진이의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밤에만 놀다 감쪽같이 새벽이면 사라지는 도깨비처럼 은진이에게 걸린 심술궂은 마술이 밝아 오는 새벽과 함께 거짓말처럼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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