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농민주일'을 지내고

등록 2003.07.22 11:08수정 2003.07.22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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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셋째 주일은 한국천주교회가 제정한 '농민주일'이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1994년 춘계 주교회의에서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을 범교회적으로 펼쳐 나가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1995년 추계 주교회의에서 7월 셋째 주일을 농민주일로 정했다. 그리하여 다음해인 1996년부터 전국의 모든 교회들은 7월 셋째 주일을 농민주일로 지내기 시작했고, 올해는 지난 20일 '연중 제16주일'에 농민주일을 지냈다.

한국천주교회는 농민주일 제정과 함께 '농민을 위한 기도'도 만들었다. 그리고 1996년부터 해마다 '매일미사' 7월호에 한국천주교 공식 기도문들 중의 하나가 된 '농민을 위한 기도'를 수록해오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거의 모든 신자들이, 최소한 한 가정에서 한 부씩은 매월 구입하여 사용하는 '매일미사'는 재생지로 제작하여 값싸게 공급하는 책이다. 한달 동안의 주일미사와 평일미사의 자세한 안내서인데, 이 책의 7월호에는 '농민을 위한 기도'가 수록됨으로써 한국천주교 신자들은 해마다 7월에는 이 기도를 집중적으로 많이 바치며 생활한다.

한국천주교회가 9년 전에 농민주일을 제정한 배경에는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농업 현실, 농촌·농민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1994년은 우리 농업의 위기가 더욱 구체적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하던 때이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함께 쌀을 제외한 1312개 전 품목의 농산물이 수입 개방되어 농가 소득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농촌공동체는 '파괴와 상실'의 실상을 겪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쌀을 제외한 농산물 자급률은 놀랍게도 5% 수준을 밑돌고 있다. 무려 95%까지 외국에서 사들인 농산물을 먹으며 살고 있다는 얘기다. 현재 농가 소득의 54%을 점하고 있는 쌀도 내년 2004년에는 수입 개방의 격랑에 휘말리게 된다.

지난 1994년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10년 간 관세화를 유예 받았던 쌀마저도 더 큰 폭의 수입 개방 여부를 놓고 내년부터 재협상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우리 농업과 농촌은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데, 쌀 수입 개방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의 농업과 농촌은 또 얼마나 어려운 상황 속으로 내몰리게 될지 생각할수록 암담하다.

쌀을 제외한 농산물 자급률 5%라는 우리의 이 현실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역대 정부의 농업 정책을 포함한 전반적인 국가 정책이 얼마나 철학 부재, 민족 자존심 부재 속에서 이루어져 왔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 국민이 얼마나 무신경과 무감각 속에서, 농업 문제를 농민 문제로만 여기고 하찮게 생각하며 살아왔는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미국, 영국, 캐나다, 일본 등 선진국들이 농업 자급률 100%를 훨씬 웃도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프랑스의 경우 놀랍게도 225%에 이르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선진국일수록, 부강한 나라일수록 1차 산업을 보호 육성하여 건실하게 해놓고 2차·3차 산업 발전을 꾀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기초 산업 붕괴 현상은, 경제 구조와 연관하여 '모래 위의 성'을 생각하게 만든다. 농업 무시와 농민의 희생 위에서 쌓아올려진 경제 발전은 그 토대가 매우 부실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는 나라들이 어떤 상황에서는 그것을 무기화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만약 미국을 비롯한 식량 수출국들이 식량을 무기화 할 경우 기초 산업 기반이 거의 붕괴되어 있는 우리나라는 턱없이 비싼 값을 치러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돈을 쥐고도 구걸을 해야 하는 상황을 겪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거지꼴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천주교회가 농민주일을 제정한 배경에는 심각한 농업 문제에 대한 인식만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농업 문제에는 생명 문제와 환경 문제가 맞물려 있다는 인식이 더욱 크게 작용했다. 우리 농촌을 살리는 일은 죽어 가는 자연의 생명들을 되살리고 환경을 보존하는 일이라는 인식이었다. '우리농촌살리기운동'은 곧 생명운동이고 환경운동이며, 반드시 그렇게 가야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농업 문제와 생명 문제 환경 문제를 하나로 보는 한국천주교 지도자들의 첨예한 인식은 '농민을 위한 기도'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함께 하는 농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농업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그 기도문은 농업 문제에 대한 관심이 모든 죽어 가는 것들을 되살리는 일임을 일깨우면서 농촌과 도시가 하나로 이어지는 삶을 희구하는 것이다.

농민주일 제정과 함께 한국천주교회에서는 농촌과 도시를 하나로 이어주고 자연의 생명들을 살리는 여러 가지 일들이 창안되어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교구마다 존재하는 <가톨릭농민회>를 주축으로 <우리농생협>이라는 단체가 조직되어 유기농법에 의해 재배 생산된 농산물을 직거래로 판매하기도 한다. 도시마다 유기농산물 직거래 판매장을 설치하기도 하고, 농촌 성당과 도시 성당 사이에 유기농산물 직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1960년대 후반 <가톨릭농촌청년회>로 출범했다가 1970년대 유신 독재 시절 이름을 바꾼 가톨릭농민회는 군사독재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에서 큰 몫을 했다. 지금은 소속 농민들이 유기농법을 앞장서서 실천하며 과거 민주화 운동 때 쓰고 남은 힘을 모아 생명운동과 환경보호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비록 옛날에 비해 그 세(勢)가 많이 약화된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지금도 가톨릭농민회는 건재함으로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장인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가톨릭농민회 담당 지도주교로 일하고 있고, 각 교구의 농민회마다 지도신부가 있다.

필자가 속해 있는 대전가톨릭농민회의 경우 5년 전부터 해마다 농민주일에는 회원 농민들이 대전시에 있는 본당들에 가서 '특별 강론'을 한다. 올해는 대전시내 40개 본당 가운데 16개 본당에 가서 회원 농민들이 강론을 했다. 이 16개 본당은 농민회의 부탁을 기꺼이 수용해 주신 본당들이니 참으로 고맙지 않을 수 없다.

전국의 성당들 중에는 교구장의 방침에 따라, 또는 본당 주임신부의 재량에 의해 농촌과 농민을 위한 특별 헌금을 실시하는 본당들도 있다. 이 농민주일 헌금은 교구의 사회복지국으로 보내지기도 하고, 본당에서 농촌 지역의 사회복지 사업에 직접 활용하기도 하고, 가톨릭농민회에 운영 및 사업 자금으로 쓰도록 주기도 한다.

나는 2001년에는 대전 선화동 성당에 가서 아침미사와 오전 교중미사에 농민주일 강론을 했다. 지난해는 쉬었고, 올해는 내동성당에 가서 오전 교중미사와 저녁미사에 강론을 했다. 태안 본당에서 전례봉사도 하고 있어서 7월에는 전례봉사 주송을 할 때마다 미사 전에 '농민을 위한 기도'를 신자들과 함께 바치며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는 아름다운 기도문에 무한히 감동하곤 한 나로서는 그 기도문을 중심으로 강론을 하고 싶었다. 내동성당 신자들과 함께 새롭게 가다듬은 마음으로 '농민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나서 강론을 했다.

유기농산물인 '우리 밀'로 만든 국수, 라면, 빵 등이 소비자들의 무관심으로 우리 동네 슈퍼에서 몇 달만에 사라지고 만 현실, 우리나라 전체 농가의 74.9% 농업 소득의 54%에 달하는 농가 경제의 버팀목이기도 한 쌀마저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한때 전국의 많은 성당들이 행사 때마다 수입 밀가루에 의한 국수 사용을 억제하고 쌀을 많이 이용했으나 또다시 쉽게 끓었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냄비 현상을 보이고 있는 현실, 내 팔순 노모께서 시장에서 사다가 애써 담근 열무김치가 농약 냄새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모두 버리면서 겪었던 안타까운 심정 등을 소개했다.

우리 국민들이 농촌 문제에 대한 관심을 너무 거창하거나 막연한 일로 생각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동네 슈퍼에 가서 혹시 우리 밀 제품이 있나 알아보고, 우리 농산물에 의한 제품을 주의 깊게 고르는 일 하나만도 우리 농업을 보호하고 애국애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일임을 강조했다. 유기농산물을 애용하는 일은 그야말로 생명운동과 환경운동에 적극 동참하는 참으로 뜻 있는 일임도 설명했다.

내동성당의 최익선 신부님이 농촌이 처한 현실과 농민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해 주시고 필자 개인에게도 융숭한 대접을 베풀어주신 것은, 아무래도 최 신부님이 농촌 출신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셨을 것 같다. 농촌 성당에서 오래 사목을 해오신 분이고, 지금도 가족들이 농촌에 살고 있으니 농촌 문제의 실상은 최 신부님에게도 피부에 와 닿는 일일 것이다.

최 신부님이 농민을 위한 특별헌금을 실시해 주시고 특별헌금 전액을 대전가톨릭농민회에 주신 것이 여간 고맙지 않다. 필자는 물론이고 대전가톨릭농민회원 모두 크게 감사한다.

대전 내동성당 농민주일 강론을 위한 이번 나들이에는 아내와 방학을 맞아 집에 온 고교 1학년인 딸아이도 동행했다. 내 강론에 대한 딸아이의 조언을 들으면서 딸아이가 어느새 그만큼 자랐다는 사실에 묘한 감동을 맛보기도 했다.

"농부들은 기가 막혀 땅이 꺼지게 한숨만 쉬고"(에레 14, 4) 있는데, 우리는 "애써 농사지은 것을 약탈해 가도 보고만 있어야 하겠습니까"(이사 1. 7)라는 성경 말씀의 뜻을 깊이 음미해 본다. "생명이신 하느님은 농부이십니다"(요한 15, 1)라는 말씀도 되새겨 본다.

"농민이야말로 자연을 돌보고 생명을 섬기고 가꿈으로써 하느님 창조사업에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생명의 일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우리의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놓으신 것처럼 농민들 또한 온 몸으로 우리의 양식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신 장봉훈 주교님의 제8회 농민주일 담화문 말씀에 깊이 공감한다.

다시 한번 농민들의 노고와 농업·농촌의 중요성을 생각하고, 하느님 창조질서의 보전과 위기에 처한 생명·환경·농업을 살리고자 하는 한국천주교회의 '우리농촌살리기운동'에 적극 동참할 것을 굳게 다짐하면서, 하느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농민을 위한 기도'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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