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권의 악인록(惡人錄)
"뭐라고요? 단주라니요? 소생이요…?"
"허허허! 뭘, 그리 놀라는가? 광개토대제의 유전(遺傳)을 이은 이상 자네가 제세활빈단의 단주를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네."
"어르신, 무슨 말씀을…? 소생은 경험도 일천하고…"
"허허! 경험은 필요 없네. 자네에게 부족한 것은 우리가 채워주면 될 것인즉 더 이상 사양말고 단주에 취임하게."
"안 됩니다. 소생이 어찌…"
이회옥은 화담의 뜻이 확고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금빛 면구를 쓰고 있는 금면일호, 즉 일타홍 홍여진을 바라보았다.
현재는 그녀가 제세활빈단의 단주이다. 따라서 그녀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그녀의 눈치를 살핀 것이다.
홍여진은 기다렸다는 듯 면구를 벗으면서 입을 열었다.
"호호! 이제 외인이 아니니 굳이 진면목을 감추지 않겠어요. 공자께선 소녀가 금면일호라는 것을 알고 계셨지요? 맞아요. 소녀가 단주였지요. 하지만 이젠 아니에요. 할아버님의 말씀대로 대제의 무공을 얻으셨으니 공자께서 단주가 되셔야 하니까요."
"낭자! 그래도 어찌…?"
"호호호! 사실 소녀도 금면일호는 아니었어요. 소녀는 제세활빈단의 군사로 금면이호지요. 금면일호는 소녀의 아버님이셨어요. 그럼에도 소녀가 단주 노릇을 한 것은 아버님께서 먼 곳에 일이 있어 그곳에 가셨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더더욱…"
"호호! 아니에요. 아버님은 당분간 돌아오실 수 없으셔요. 따라서 단주를 맡을 수 없는 상황이지요. 게다가 아버님도 정식 금면일호는 아니었어요. 임시로 맡으셨던 거죠. 그리고 대제의 유전을 얻은 사람이 있는 이상 아버님은 더 이상 단주가 아니에요."
"그게 무슨 말씀…?"
이회옥은 홍여진의 말은 언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하여 반문하려던 찰라 화담이 끼어 들었다.
"허허!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고 우선 단주에 취임하게."
"……!"
이회옥은 일타홍과 화담의 눈을 직시하였다. 진심을 읽기 위해서였다. 이런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둘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화담의 눈빛은 여전히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하게 침잠되어 있는 반면 일타홍의 눈빛은 기대와 설레임 등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깊은 밤 북두(北斗)의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빛과 같은 그런 신비스런 눈빛이었다.
"휴우…! 소생이 뭐라 하든 두 분의 고집을 꺾을 수 없겠군요. 좋습니다. 한번 맡아보지요. 하지만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경험도 없고 하니 두 분께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셔야 합니다."
"허허허! 여부가 있겠는가? 그런 것은 걱정 말게."
"호호! 단주가 되셨음을 감축드려요. 자, 여기 이거 받으세요."
"어? 이건 뭡니까?"
홍여진이 건넨 것은 두 권의 서책이었다. 그것의 표지에는 여인의 필적임이 분명한 유려한 필체로 쓰인 글자가 있었다.
< 악인록(惡人錄) 권일(券一) >
< 악인록(惡人錄) 권이(券二) >
"악인록? 악인록이 뭡니까?"
생경한 제목에 어리둥절한 이회옥의 질문에 홍여진의 붉은 장미를 물었다 그대로 물든 듯 선홍빛을 띈 입술이 열렸다.
"그건 지난 세월동안 본단의 모든 제자들이 총동원되어 만든 것이랍니다. 선무곡 뿐만 아니라 천하의 앞날을 위해 옥석(玉石)을 구분해 놓은 것이지요."
"천하를 위해 옥석을 구분하다니요?"
"호호호! 보시면 알아요."
웃음 짓는 홍여진을 보며 악인록 권일의 첫장을 넘기던 이회옥은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구절 때문이었다.
세상에는 사람들에게 이로운 영초(靈草)가 있는 반면 해(害)가 되는 잡초(雜草)나 독초(毒草)도 있다.
잡초와 독초는 종종 영초가 자라는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마땅히 영초가 섭취해야할 자양분까지 빨아들여 고사(枯死)시키기 일쑤이다.
따라서 영초는 잘 자라도록 토양을 북돋아주는 대신 잡초와 독초는 눈에 뜨이는 대로 제거함이 마땅할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는 반면 제 잇속에 눈이 뻘개 타인을 마음대로 짓밟는 악인들이 있다.
제세활빈단은 이런 악인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여 세상을 두루 편안케 하는 것을 제일 목적으로 한다. 다시 말해 홍익인간(弘益人間)이 제세활빈단의 창립 이념이다.
다음은 제거하여야 할 악인들의 명단과 그들의 죄상이다.
― 철룡화존(鐵龍花尊) 구부시(九釜翅)
악의 근원인 무림천자성 성주. 무림천자성의 이익과 천하를 제패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희생시켜도 좋다는 심보의 소유자.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벌을 시행한 뒤 지독한 고통 속에서 처참하게 죽도록 하여야 할 것임.
철룡화존 주위에는 늘 백팔 호위대가 따라다니니 그를 생포하려면 각별한 주의를 기하여야 할 것임.
― 인의수사(仁義秀士) 채니(蔡 )
무림천자성의 부성주. 인자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은 귀계와 음모로 가득한 인물.
무림천자성이 천하를 장악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괜찮다는 극단적인 강경론자. 지극히 위험하니 기회가 닿는 즉시 주살(誅殺) 함이 마땅한 자. 이자 역시 늘 오십사 인의 호위대가 따라 다니니 척살할 때 주의를 기울일 것,
― 오각수(五角獸) 도날두(陶捏杜)
무림천자성 순찰원주. 인의수사 못지 않은 강경론자로 대화보다는 주먹이 우선이라는 편협(偏狹)된 사고의 소유자.
철룡화존을 강경 일변도로 변모케 한 모사꾼. 구부시와 같은 형벌로 다스려야 할 중(重) 범죄자.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목숨을 끓어야 애꿎은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으므로 기회가 닿는 즉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척살해야 함. 역시 주위에 호위무사들이 있으니 주의할 것.
― 무비수사(無非修士) 고파월(高巴月)
무림천자성 비보전 전주로 겉으로는 온화하며 합리적인 듯하나 실제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음.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무림천자성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자임. 가능한 빨리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세상을 위해 이롭다 판단됨.
신변 안전을 위한 호위무사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음.
그러나 완전히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음. 만일 있다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사려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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