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가?

박철의 <느릿느릿이야기>

등록 2003.07.24 08:35수정 2003.07.2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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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우리집이 화성군 남양에서 살 때의 일이다. 남양에는 젖소 목장이 많다. 젖소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젖소를 키우는 모습이라든가, 젖소의 특징을 살필 기회가 생긴다. 정해진 시간에 젖소에게 사료를 준다. 하루에 두 번 주는 목장도 있고 세 번 주는 목장도 있다. 그리고 젖을 짜는 시간도 정해져 있다. 만약 다른 일을 하다 젖 짜는 시간을 놓치게 되면 젖이 팅팅 불어 유방염에 걸리게 된다. 유방염에 걸린 젖소의 젖은 우유가공회사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아까운 젖을 다 쏟아 버린다.


젖소도 운동을 시켜야 병이 없고 젖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 방사(放飼)를 한다. 밖으로 내보내 햇빛을 받게 하고, 흙구덩이에 몸을 뉘여 보게 하고, 위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되새김질을 하면서 소화시키도록 한다. 좋은 공기도 마시게 한다. 물론 완전 방목은 아니고 전기 철책을 하여 우리 안에서만의 자유다.

그러다 사료 줄 때가 되어 주인이 외양간 문을 열어주면, 젖소들이 밥을 먹으러 차례차례 줄을 서서 외양간으로 들어온다. 그 광경이 참 신기했다. 젖소마다 다 자기 집이 있다. 칸막이가 거의 똑같은 철제로 된 구조물인데 젖소들은 자기 집을 알고 찾아 들어온다. 소들도 자기 집을,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한동안 이 나라의 역사는 자기 자리를 크게 이탈한 자들에 의해 끌려 다녔다.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위해 사용해야 할 총칼을 자신들의 권력음모와 찬탈(簒奪)을 위해 사용했다.

자기 자리를 크게 벗어난 사람들의 특징은 목소리가 크다. 그리고 세상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속된 말이 정설로 통하게 되었다. 자신들의 명분을 극대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하여 마구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다.

이렇듯 사회를 노략질하는 잘난 사람들 탓으로 세상이 뒤숭숭하고 서글퍼진다. 부정을 일삼아 제 욕심만 채우고, 남의 몫을 제 몫으로 챙겨서 사회를 병들게 하는 패거리들이 선량한 백성들을 서글프게 한다.


누구나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 이 세상은 적당한 화음과 리듬에 의해서 움직인다. 어느 날 갑자기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되는 법이 없다. 춘하추동(春夏秋冬)이 그러하고, 일년 365일이 이미 정해진 순서에 의해 움직인다. 이것을 거부할 수 없다. 이 리듬이 깨지면 모든 자연계는 존재할 수 없다.

가장 이상적이고 인간적인 삶이란, 자연의 순리에 맞춰 순응(順應)하며 사는 것이다. 자기 자리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곧 ‘빈 마음’이다. 마음을 비우면 헛된 욕심이나 허명(虛名)에 치우치지 않는다. 자기 자리에 충실한 사람은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아도 마음이 든든하다. 속이 깊고 마음이 따뜻하다.


요즈음은 그런 사람을 만나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마음 속이 맑고 변함 없는 사람은 눈빛이 밝고 맑다. 눈빛이 마음의 속을 비추는 거울이다. 눈을 바로 보면서, 입술에 미소를 짓고 말하는 사람은 남을 속이지 못한다. 살벌한 세상일수록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빈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남을 믿고 자신을 남에게 맡기는 것을 서슴 없이 하는 사람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당당하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조용조용 말한다. 그 사람의 말은 깊은 신뢰감을 준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아니 말을 한마디도 안 해도 그 눈빛만으로도 신의를 주고받을 수 있다.

자기 자리를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은 목소리가 크다. 허풍이고, 남에게 감출 것이 많은 사람은 어딘지 켕기는 데가 있어 당당할 수가 없다. 속이 음험(陰險)하여 제 잇속만 차리고 이해득실을 따져서 해가 된다 싶으면 변덕을 부린다. 그런 사람은 남의 형편을 모른다.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른다. 다만 남을 이용하려고 할 뿐이다.

자기 자리를 벗어난 사람은 자기를 보는 눈이 멀었다. 그러나 남을 보는 눈은 발달되었다. 그런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그러나 남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잘한 건 자기 덕이고, 잘못한 것은 다 남의 탓이다.

자기 자리에 충실한 사람은 헤아림이 깊고 매사에 신중하다. 경망스러운 행위로 남이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을 헤아리는 까닭이다. 무엇이든지 분수에 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자기집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늘 자기를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남을 탓하지 않는다.

창문을 열고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소나무를 무심히 바라본다. 좋다 싫다 한마디 없이 소나무는 늘 그 자리에 서 있다. 참 장하다. 지금 나는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가? 하는 새로운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a 교회 마당위의 소나무

교회 마당위의 소나무 ⓒ 느릿느릿 박철


나는 지금 맑고 고요한 심성(心性)-빈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아무 소용없는 허명에 속아 눈이 멀지는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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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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