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14

악인은 지옥으로 (4)

등록 2003.08.26 16:43수정 2003.08.26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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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흐흐! 어서오너라. 팔열지옥 중 최하층에 자리잡고 있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온 것을 환영하는 바이다. 어째 네놈이 오지 않나 학수고대하던 차였다. 네놈은 생전에 극악무도한 죄를 많이 지었으니 영원히 유황불에 타는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니라!"

털썩―!


배루난이 통나무처럼 쓰러지자 약간의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이회옥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살인을 하였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죽어 마땅한 자였어. 죽어 마땅한 자였다구… 그냥 놔 뒀으면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모를 악인이었다구…"

죽창이 살 속을 파고들 때의 그 느낌 때문에 잠시 전율하던 이회옥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돌아서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양손에서는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디디는 자리마다 선혈이 묻어 있었다.


전신에 난 상처 때문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고통을 느끼지도, 자신이 선혈을 흘리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살인을 했다는 숨막힐 듯한 충격 때문이었다.

* * *


깊은 밤, 무한 외곽에 자리잡은 의성장에는 싸늘하게 식은 찻잔을 앞에 둔 여인이 멍한 표정으로 창 밖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천강선녀라 불리던 호옥접이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빗줄기는 세상의 모든 때를 벗기려는지 엄청난 기세로 내리고 있었다. 저녁나절에는 가랑비였는데 밤이 점점 깊어지면서 점차 폭우로 변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시끄러울 판인데 뇌성벽력까지 동반하였으니 잠들고 싶어도 잠들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하여 잠 못 이루던 그녀는 아흐레만에 왔던 장일정이 왜 자지 않고 그냥 갔는지를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지난번에도 또 그 전번에도 그냥 갔다면 이상할 것이 없다.

올 때마다 자고 갔는데 이번엔 안 그랬으니 이상한 것이다. 게다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빨리 가고 싶어 안달하는 듯하였던 것이 이상하였다. 아마도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다는 말은 순전히 핑계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싫어져서 그러는지 아니면 남궁혜라는 여인에게 빠져서 그러는지 궁금하였기에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이 싫어져서 그런 것이라면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눈을 뜨고 있기는 하지만 무엇인가를 보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호옥접은 문득 대문 근처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는 느낌에 흠칫 놀라며 일어섰다.

비록 노인이기는 하지만 반광노조가 있으면 아무도 두렵지 않을 것이나 현재 장원엔 혼자뿐이었다. 하여 정체 모를 인영에 괜한 두려움이 솟는지 말을 더듬고 있었다.

"누, 누구…? 거기 누구예요?"
"……!"

굵은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인영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상공이에요? 어머!"

호옥접은 장일정이 되돌아 왔나 싶어 반색을 하며 일어섰다. 그 순간 비틀거리던 인영이 쓰러지자 얼른 튀어나갔다.

엷은 침의(寢衣) 차림인지라 튀어 나가는 즉시 비에 젖었고, 그와 동시에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거의 벌거벗은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호옥접은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정인이 술에 취해 쓰러졌으며 얼른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일념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녀는 문가에 엎어져 있던 인영을 뒤집고는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심한 부상을 입어 온통 선혈 투성이였기 때문이었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과 뇌전(雷電)이 명멸(明滅)할 때마다 드러나는 시뻘건 선혈은 웬만한 강심장이라 할지라도 기겁을 하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따라서 웬만한 여인이라면 기절을 할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호옥접은 달랐다. 누군지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심한 부상을 당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의복과 손에 선혈이 묻는다는 것도 잊은 채 사내를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의원으로서 환자를 돌보겠다는 생각의 발로였다.


"휴우! 이제 끝인가? 다행이야! 오늘 이 금창약이 완성되지 않았다면 무척 고생했어야 할텐데…"

외상을 전문적으로 아물게 하는 금창약을 바른 뒤 조심스럽게 붕대로 감은 호옥접은 이마에 흐른 땀을 씻으며 일어섰다.

침상 위의 사내는 대략 약관 정도 된 청년이었다.

문가에 쓰러져 있던 그를 침상까지 끌고 와 의복을 벗기던 호옥접은 연신 혀를 찼다. 어깨며 팔 다리는 물론, 가슴과 등, 옆구리와 배 등 전신이 온통 상처 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찔리고 베인 상처로 미루어 예리한 검에 당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근육을 상하지 않았다는 것과 요혈 또한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근육을 상했다면 치료기간이 길어지거나 병신이 될 수도 있고, 요혈에 손상을 입었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태를 확인한 호옥접은 상처 주의를 점혈하여 지혈시킨 후 덧나지 않도록 금창약을 바르고는 붕대로 상처를 감쌌다.

이 과정에서 호옥접은 여러 번 감탄사를 터뜨렸다.

수많은 환자들을 보아왔지만 부상당한 청년처럼 근골(筋骨)이 뛰어난 사람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군살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대신 강인해 보이는 근육으로 똘똘 뭉쳐진 그야말로 이상적인 신체였던 것이다.

상처가 제법 크고 깊기는 하였지만 워낙 뛰어난 약효를 지닌 금창약을 발랐으니 보름 정도가 지나면 대강 아물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심한 실혈(失血) 때문에 정신을 놓은 상태이나 정신이 드는 대로 연자탕과 같이 부드러운 음식을 먹으면 금방 기력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방금 진맥에서 모든 기혈의 움직임이 지극히 정상적이라는 것을 확인하였기에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다.

의성장은 아흐레에 하루만 북적이는 곳이다. 장일정이 왔다 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날 이외에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라 할만한 곳이다.

거기에 반광노조라도 저잣거리 유람을 나가면 아예 아무런 움직임조차 감지되지 않는 곳이 의성장이다.

그런 의성장에 부산한 움직임이 있었다. 탕약을 달이느라 숯불을 피우면서 콜록콜록 기침하는 소리가 있었고, 주방에서는 연자탕 등 부드러운 음식을 만드는 움직임이 있었다.

호옥접이 부상당한 청년의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턍약을 달이고, 음식을 만드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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