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우리 보고 총을 쏘기까지야 하것나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05>공장일기(6)

등록 2003.08.28 16:54수정 2003.08.2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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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깨어진 보도블럭 사이로 한 아이가 무심코 지나가고 있다

깨어진 보도블럭 사이로 한 아이가 무심코 지나가고 있다 ⓒ 부마항쟁기념사업회

"인자 클났다."
"와?"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마산 창원에도 위수령이 선포되었다 카더라. 니 시내 한번 나가봐라. 완전무장한 군바리들이 장갑차를 끌고 댕기쌌고 난리가 났다카이."

그랬다. 마산, 창원 일대에도 통금이 8시로 정해지고, 시내에는 장갑차와 완전무장한 군인들로 득실거렸다. 하지만 마산 시민들은 통금에 상관없이 거리로 몰려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시내 곳곳에 최루탄이 터지고,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 일부는 완전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어디론가로 개처럼 끌려갔다. 그러나 시위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확산되기만 했다.

"맥주집 종업원이 옥상에서 빈 맥주병을 군바리들한테 던지다가 군인들한테 개처럼 맞고 잽혀갔다 카더라."
"그거뿐이 아이다. 시민들이 군바리들한테 밀가루로 쎄리(마구) 뿌리다가 개머리판에 맞고 병원에 실려갔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 카더라."

당시 공장에 일거리가 없어 늘 6시가 되면 곧 바로 퇴근했던 나 또한 멋도 모르고 시위대를 따라가다가 군인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얻어터지기도 했고, 통금에 걸려 마산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일박한 일도 있었다.

"어젯밤에 북마산 파출소가 불에 탔다 카더라. 그라고 마산 시민들이 데모를 하는 시간만 되모 약속이나 한듯이 전깃불을 다 끈다 카더라."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의 반응은 의외로 시들했다. 아니, 시들했다기보다 당장 먹고 살기에도 바빴다. 나날이 늘어만 가는 방세에다, 이제는 쌀독마저 비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밀린 월급은 좀처럼 나올 줄 몰랐다. 그러나 현장 노동자들은 해고가 두려워 아무도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못했다.


"우리도 이랄끼 아이고 고마 회사하고 한번 붙어뿌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아이가."
"니 그라다가 군바리들이 총을 쏘면서 공장으로 들어오모 우짤라꼬."
"설마! 우리 보고 총을 쏘기까지야 하것나."

그랬다.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제법 강한 불만의 목소리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총대를 메려고 하는 이가 없었다. 또한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한번도 공장 내에서 시위란 걸 해 본 경험도 없었다. 그러하다 보니, 나이 든 노동자들은 젊은 노동자들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젊은 우리들 또한 대부분 병역특례란 올가미에 꽁꽁 묶여 있었기 때문에 나서고 싶어도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병역특례를 받는 상태에사 만약 잘못하여 해고라도 당하게 되면 일주일 이내 군대에 끌려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구! 이로 우짜노? 대통령이 죽어뿟단다. 대통령이…."
"뭐라카노? 섬뫼때기(섬뫼댁) 저기 아침부터 와 저라노? 혹시 덕순이처럼 아예 미치뿐 거 아이가."
"섬뫼때기가 미친 기 아이라 진짜로 대통령이 죽어뿟단다. 그것도 대통령을 보좌하는 중앙정보부장이 총을 쏘았다 카더라."
"그라모 우째되노? 인자 북한에서 쳐들어오는 거 아이가?"

그해 10월 26일, 무려 18년을 집권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가 쏜 총알을 맞고 '나는 괜찮아' 라는 그 유명한 말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그래 그 사건이 이른 바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 시해사건이었던 10.26 사건이었다.

하지만 우리 노동자들은 그 사건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잘 몰랐다. 그래서 현장 노동자들끼리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괜찮아'를 유행어처럼 썼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나자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씨가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씨가 이 사건의 합동수사본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정승화 육참총장이 비상계엄사령관이 되었다.

전두환. 전두환이란 이름 석 자는 그때부터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전두환이란 이름이 12.12사건을 일으키며,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줄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 10.26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개인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안 된 일이었지만, 총으로 일어선 정부는 결국 총으로 망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실현되었던 것이었다. 그래. 오죽했으면 박정희의 죽음을 접한 일부 민주투사들이 감옥에서 만세까지 불렀다고 했겠는가.

하지만 정국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회오리 바람 속으로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개월 째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박정희의 죽음은 '서울의 봄'이 아니라 '공단의 겨울'이었다.

"인자 진짜로 골치 아푸게 됐다카이."
"와?"
"대통령이 죽은 마당에 인자 함부로 월급 내놔라꼬 말도 못한다 아이가."

하지만 일부 의식 있는 노동자들은 '등산모임'이나 '낚시모임', '동문회' 등의 이름으로 저녁마다 은밀히 모여 무언가를 열심히 토론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노동3권이나 근로기준법 개정 등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동과 관련된 말만 들어도 치 떨리는 작업현장이 떠올라 그런 단어들이 무조건 싫었다.

당시 나는 '남천문학'이란 이름의 문학서클을 운영하면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에 이르는 병> 등의 여러 가지 철학서적에 푹 빠져 있었다. 그리고 틈틈히 헤르만 헷세와 릴케, 하이네 등의 시를 읽으며 시세계 또한 그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다.

"김재규가 시위현장을 보러 부산과 마산에 내려왔다가 이래가꼬는 도저히 안되것다 생각하고 마음이 급변한 기라."
"쉬이~ 그기 아이고, 김재규 뒤에는 미국이 있다 카더라. 박정희가 미국 몰래 핵무기로 만들라 캤다 아이가. 그래서 김재규로 시키가꼬 직있다(죽였다) 카더라."
"그라모 와 미국이 김재규로 안 구해주노?"

그해 11월, 나는 다시 부서이동을 당해야만 했다. 부서이동 사유는 연마실의 일거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생산부장의 핑계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밀링과 탁상선반 부서에도 일거리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내가 또다시 부서이동을 당한 진짜 이유는 드리클린 흡입사건과 내가 마산의 시위현장에서 종종 보였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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