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소 벌초, 또 한번의 공사를 마치고

등록 2003.09.02 16:08수정 2003.09.0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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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부모나 조상의 묘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최소한 일년에 한 번씩은 벌초라는 것을 한다. 대개는 추석 전에 하는 중요한 연례 행사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매년 벌초를 할 때마다 시기적으로 참 절묘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차례와 성묘가 가장 중요한 일인 추석 명절이 임박하였으니 미리 벌초를 해야 하는 것이지만, 계절적으로도 그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일년 중에서 잡풀이 가장 무성하게 돋아나 있는 때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에게 추석 명절이 없다고 하더라도 조상을 잘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때쯤이면 묘소를 찾아 벌초를 하리라는 생각이다.

묘소 벌초는 대개 집안의 장손이나 장자가 맡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많은 것 같다. 내 사촌형님 댁만 해도 그렇다. 집안의 장손인 사촌 큰형님은 일찍부터 묘소 벌초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아왔다. 언제부턴가 막내이신 셋째 형님이 해마다 벌초를 도맡은 형국으로 사람을 사서 해결하는 방식을 취해 왔는데, 그것은 일년에 여러 번씩 제례를 맡아 치르는 큰형님의 부담을 덜어 드리려는 셋째 형님의 사려 깊은 뜻이기도 할 터이다.

집안 선산이 아닌 천주교회 공동묘지 안에 모셔져 있는 내 아버님 묘소의 벌초는 당연히 장남인 나의 몫이다. 내가 고향을 떠나지 않고 아버님 묘소 가까이에 사는 덕에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집의 묘소 벌초 행사는 해마다 공사가 꽤나 크다. 내 아버님의 묘소 한 동만 벌초를 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아버님 묘소 한 동만 하는 것이라면 나 혼자 아무 때나 가서 잠깐 하고 올 수가 있지만, 작업이 커서 매번 뒷동에서 사는 동생과 동행을 하곤 한다. 또 아내도 기꺼이 동참을 하곤 한다.

지난 일요일 오후에 실시했던 올해의 벌초 행사에는 아내와 올해 중1인 아들녀석, 그리고 팔순이신 어머니도 동행 협력을 했다. 또 망둥이 낚시를 갔던 동생도 벌초 작업이 한창 진행될 때 바삐 달려와 주었다.


지난 봄 한식 때만 해도 잡풀이 거의 없었던 묘소들에는 그 동안의 잦은 비로 갖가지 잡풀들이 한껏 무성하게 자라서 마치 내 군대 시절 월남의 정글지대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한 순간 어떻게 작업을 할까 싶기도 했지만, 곧 일을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서울에서 사는 사람이 고향에 내려와 벌초 작업을 하다가 말벌에 쏘여 사망한 사건이 있어서 세게 분사할 수 있는 새 모기약을 두 개나 사오는 등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 왕탱이 벌들두 집 지을 장소를 물색헐 때는 걔들 나름대루 다 갈량을 헌다구. 외따로 떨어져 있는 묘소라면 물를까, 이렇게 수십 개의 묘가 모여 있는 공동묘지 같은 디다가는 집을 짓지 않는다구. 사람 발길이 많으리라는 것을 예상을 허구설래미…."

이런 내 말에 모두 웃음으로 동의를 표했다.

나는 묘소 벌초를 낫으로 한다. 묘소 벌초에는 기계 낫이 아닌 재래식 낫을 사용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좀 모호한 생각을 고수한다. 비록 왼손잡이이고, 왼손 낫을 구할 수가 없어 오른손 낫을 발로 밟아서 억지로 형태를 조금 바꾸어 사용하는 형편이지만, 그래도 내 낫질 실력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붙은 이력이다.

초등학교 5,6학년 시절부터 가을이면 지게를 지고 산에 가서 '푸장나무'라고 부르는 작은 초목들을 낫으로 베어오는 일을 했다. 그것을 햇볕에 말려서 아궁이에 넣고 때면 불이 제법 괄았다. 그 불로 밥을 해먹으며 살았다.

낫질을 해보겠다고 자꾸 낫을 원하고, 어색한 동작으로 낫질을 하는 아들녀석은 아빠의 낫질 솜씨의 연유가 궁금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런 녀석에게 아빠의 어린 시절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지만, 나에게나 아이에게나 별로 재미있는 얘기는 아니었다.

우선 아버님 묘소의 벌초부터 깔끔하게 마친 다음 아버님께서 생전에 좋아하셨던 막걸리 한잔 따라놓고 모두 함께 절을 올렸다. 그리고 음복을 한 다음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버님 묘소 바로 옆 내 어머니의 예정된 자리 벌초를 할 때부터 아들녀석의 질문은 좀더 많아졌다.

"이 일을 나중에는 제가 맡아야 하나요?"
"그럼. 당연하지."
"여기가 할머니 묻히실 자리라면, 아빠와 엄마 자리도 있어요?"
"왜?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네 개의 묘를 벌초하며 살 일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할머니 자리까지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게 좀 이상해서 그래요."
"걱정 마. 넌 그저 할아버지 묘와 할머니 묘만 잘 관리하며 살면 돼."
"왜요?"
"아빠와 엄마의 묘는 없을 테니까."
"화장을 한단 말예요?"
"아빠와 엄마는 이미 옛날에 가톨릭의과대학에다가 해부 실습용으로 쓰라고 시신 기증을 해놓았거든. 그래서 이런 묘가 필요 없어."

아들녀석은 잠시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기회에 중학생이 된 아들녀석에게 뭔가를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시신 기증의 이유 등 그것에 관한 여러 가지 얘기를 들려주었다. 올해 벌초 행사의 한가지 좋은 '수확'인 셈이었다.

어머니의 예정된 자리 벌초를 마친 다음에는 그 옆에 자리해 있는 두 동의 무연고 묘를 벌초해 주는 일을 했다. 1980년대 초에 조성된 태안천주교회 공동묘지 안에 무연고 묘가 두 동이나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의아스럽게 느껴지는 일일 터였다.

그 묘들은 198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공동묘지를 조성하는 공사를 할 때 발굴된 묘였다. 조선시대의 묘임이 분명했다. 임자 없는 묘라고 해서 그대로 덮어버릴 수는 없었다. 정성스럽게 유해를 수습하여 이장을 했는데, 그 자리가 바로 내 아버님의 묘 옆이었다. 도리 없이 내가 신경을 써야 했다. 해마다 내가 벌초를 해주고 있으니, 어쩌면 그 일 또한 장래에는 내 아들녀석에게 물려질 수도 있을 터….

해마다 내가 벌초를 해주는 묘는 그밖에도 두 동이 더 있다. 하나는 자식 없이 외롭게 살았던 노인 부부의 합장 묘다. 엿장수를 하고 고물을 주우며 가난하게 살았던 노인 부부가 내 아버지와 어머니에 의해 천주교 신자가 되었던 덕에 천주교회 공동묘지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누워 있는데, 조카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멀리서 사니 그들이 예까지 와서 벌초를 할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그 묘를 돌보는 일 또한 별수없이 우리 차지다.

또 하나는 미처 공동묘지 조성 계획도 수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선 묻고 보자고 해서 생긴, 태안천주교회 공동묘지 최초의 묘인데, 그 묘 또한 내 어머니 때문에 거기에 자리하게 된 묘이다.

1983년 여름, 우리가 전에 살았던 남문리 동네의 한 사글세 단칸방에서 한 중년 여인이 숨을 거두었다. 전주에서 괜찮게 살았는데 남편과 사별한 후 재산을 모두 잃고 병까지 얻은 후 언니가 살고 있는 태안으로 와서 말년 몇 개월을 산 사람이었다. 청소년기의 아들과 큰딸은 서울에서 제 밥벌이 길을 닦느라 고생을 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작은 딸을 데리고 와 병을 앓으며 살다가 운명을 한 것이었다.

그 여인이 살았을 때 그의 존재를 안 내 어머니가 수시로 그 단칸방을 다니며 여러 가지 도움을 주면서 하느님 얘기를 많이 들려주고 마침내 대세(代洗)를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의 묘비에는 '가타리나'라는 영세명이 새겨지게 되었다.

우리 교회에서 장례를 치러주고 아직 묘가 하나도 없는 교회 공동묘지의 한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 공동묘지의 첫 번째 묘 자리를 원래 신자가 아니었던 사람이 차지를 한 셈이었다.

그 분의 시신을 염습할 때의 일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무슨 병을 앓다가 숨을 거두었는지 뱃속에 검은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시신을 움직이는데 입 밖으로 검은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아예 뱃속의 그 물을 모두 빼내는 일을 했다. 그 물을 닦아낸 탈지면이 비닐 포대로 거의 하나 가득 찰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 손으로 어렵게 염을 해서 정성껏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 후 그 묘의 관리는 자연적으로 우리 집 책임이 된 셈이어서 해마다 내 손으로 벌초를 해주고 있다. 그 세월이 벌써 20년이나 되었고….

고(故) '이(李) 가타리나'의 자녀들은 모두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내가 몹시 가엾어하며 예뻐해 주었던 그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 여자아이도….

고 이 가타리나의 언니, 지금은 서울에서 살고 있는 그 노인을 몇 년 전에 태안 저잣거리에서 만났을 때 들은 말에 의하면 이 가타리나의 큰딸은 모 방송사의 분장사로 돈도 잘 벌며 잘 산다고 했다. 삼남매가 모두 괜찮게 산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20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그들을 볼 수 없었다. 전화 한 통도 없었다. 해마다 추석 전에 어머니 묘소의 벌초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고나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어머니 묘소 벌초는 그만두고라도, 추석이나 설 명절에 가끔이라도 성묘를 오기나 하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이 가타리나 묘소의 벌초를 할 때마다 괜한 생각을 하곤 한다. 이 가타리나의 자녀들이 지난 20년 동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계속 어머니 묘소의 벌초를 맡아줄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소리소문 없게라도 명절에는 어머니 묘소를 찾아 제대로 성묘를 하면서 사는 사람들이기를….

올해도 동생과 함께 연세 팔순이신 어머니와 아내와 중1 아들녀석까지 참여한 가운데 묘소 벌초 행사를 기분 좋게 마쳤다. 벌초 행사 기념으로 동생 가족까지 참여시켜 중국 음식점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즐겁고도 보람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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