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 필 무렵3김규환
보부상도 혀를 내두르는 두메 산골
<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는 왜 장돌뱅이가 되었을까?
조선 개국이래 봇짐과 지게를 지고 다니던 보부상(褓負商). 현재의 ‘전경련’이라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보부상은 조선 상권을 좌지우지했다. 조선 건국에 일조하고, 동학농민 전쟁을 무력하게 만드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흥선대원군의 사설 경비대 노릇을 하며 전국조직으로서 위력을 떨치기도 했다.
결정적인 순간 한 때의 안기부 노릇까지 톡톡히 해냈으니 정권의 애정은 남달랐다. 일제 시대에 들어 탄압 받는 존재가 되었을 뿐 영화(榮華)만 누리던 부보상단(負褓商團)이었다. 조정으로부터 상권을 보호 받던 보부상 단체의 힘이 미치지 않은 곳에 자생 전업 상인이 출현하기 시작한 때는 개항 전후다. 누가 강원도 평창에 나귀 타고 물건 팔러 가겠는가?
한 곳에 수천 수만 명의 인구가 밀집하여 살기 힘든 여건상 최소 30리(삼남지방)에서 100리(40km 강원과 이북지방) 이하에 요즘으로 말하면 시골 5일장이 곳곳에 등장하였다. 머리에 이고 다니던 행상은 장날에는 상업을 했지만 교통수단의 미비로 50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대부분 장사꾼은 농사지어 남은 산물을 갖고 나와 팔아서 다른 것과 바꿔 갔다. 물물교환과 부업(副業) 성격이 강한 때였다.
이곳은 기껏 모여 살아 봐야 현(縣)이나 군(郡)의 읍내가 5천명을 넘지 못한다. 평야지대가 넓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여느 농촌지역과는 판이한 사회경제적 환경에 처해 있었다. 이는 1970년 중반까지 이어졌다.
전라북도 무주-진안-장수의 고원지역도 매한가지였다. 장수군(長水郡)의 경우 현재 여전히 장수읍(邑)과 장계면(長溪面) 두 축으로 인구와 경제력, 생활권이 분산되어 있다. 자연지형에 적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궁한 처지를 말해주고 있다.